공간과 작업의 전문성 혹은 개인의 남다른 문화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 해도 안정적으로 레지던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대부분 지역의 사설 레지던시들도 중앙이나 지자체에 의존도가 높은 만큼 안정적인 운영구조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며, 개인이나 단체의 기여와 애정이 더해진다 해도 정착 단계에 이르지 못한 우리의 레지던시 환경이나 문화에 대한 운영주체나 작가들의 한계도 보인다.
도내에서 활발하게 혹은 새롭게 진행되던 레지던스 2곳이 사업을 중단했다. 미술 레지던시로는 이른 시작과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전주 교동아트센터와 문학창작공간으로는 유일했던 변산 바람꽃이 올해는 운영되지 않는다. 다른 변화를 꾀하기 위해, 운영상의 여러 난맥을 해결하지 못하는 등 이유와 사정이 있다. 분야나 전문성으로 주목받았던 두 레지던시 공간에 대한 이야기 속에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고 다듬어야 할 것들이 분명해 보인다.
전주교동아트센터,
작품 보다 '작가 인큐베이팅'
전시, 예술교육, 세미나 등 문화예술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는 전주 교동아트센터는 전북지역 창작 레지던시의 선발주자이다. 2010년부터 매년 작가를 선발해 안정된 창작 환경을 제공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 이곳은 2013년을 마지막으로 현재 레지던시 사업을 중단한 상태다.
교동아트센터는 안정적인 사업 운영으로 4년 연속 전북 레지던시 지원사업에 선정되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호남권 최우수 레지던시 사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교동아트센터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당시 레지던시 총괄기획을 담당한 이문수 씨는 레지던시의 본질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작가 인큐베이팅(Incubating)이라는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작가들이 안정적으로 작업하고, 전시할 수 있도록 최선의 환경을 제공하고자 했어요. 또 언론이나 지역 화단과 연결해 줌으로써 작가들이 알려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죠. 교동아트센터는 작가 양성이라는 레지던시의 기능을 살려 프로그램을 운영했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었어요." 더불어 단체로부터 기획자의 독립성이 확보된 점은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예산을 집행함에 있어 여러 시도가 가능하도록 해주었다.
교동아트센터의 레지던시 사업은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교동아트스튜디오에서 약 1년 단위로 진행됐다. 선발된 작가들은 이곳에서 거주하며 작업, 전시 등의 공간을 제공받고 지역과 함께 소통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특히 전통과 현대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인 한옥마을에 자리잡고 있어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환경이 돼줬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에 위치하다보니 작가들의 독립적인 작업공간이 제공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양면성은 존재했다.
교동아트센터의 레지던시는 크게 전시사업, 오픈스튜디오, 지역 커뮤니티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됐다. 참여 작가들은 다양한 연령대에, 다양한 지역에서 온, 다른 분야의, 다른 작업스타일을 지닌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레지던시를 통해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며 서로의 예술관을 이해하고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예술가들 간에 지역, 분야 등의 다양한 시각을 교류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킹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2012년 참여 작가인 이광철 씨는 "평소 지역사회 내에서는 듣기 힘들었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고 전했다.
예술가들의 상호작용은 참여 작가들끼리 뿐만 아니라 지역 작가들과의 연계로도 이어졌다. 이는 지역 작가들과 교류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획전을 함께 함으로써 가능했다. 기획전을 함께 준비하며 지역 화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레지던시 말미에는 참여 작가들의 개인전을 열어 평론가를 매칭해 줌으로써 작가를 홍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지역민들과 문화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위해 단기적으로 레지던시 파일럿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역민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작가의 작업실을 공개해 그들의 작업을 엿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이나 교육 프로그램 등이 바로 그 것.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참여 작가가 공간에서 개인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레지던시를 통해 받는 혜택을 지역민들에게 베푸는 순환구조로 연결됐다.
지원 위한 성과위주 프로그램,
작가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은 레지던시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공공기관에서 레지던시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성과중심의 프로그래밍 계획서로 평가받게 된다. 이는 레지던시의 본질인 '작가 인큐베이팅'을 위한 운영보단 단기적이고 새로운 프로그램 위주의 운영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작가들에게 부담은 안겨줄 수 밖에 없고, 창작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 그저 짧은 '행사' 하나에 그치고 마는 모습으로 비춰지게 된다. 작가가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불필요한 행정적 부분은 축소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지금까지의 레지던시는 참여 작가 개개인에 집중되기보단 전라북도의 레지던시 전체에 대해 알리는 시작단계였다. 앞으로 레지던시가 정착하는 단계에서는 작가들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문서 위주의 사업계획에서 벋어나 지속적인 레지던시가 가능하도록 각 단체에게 일정부분 자율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와 더불어 예산 집행에 작가들의 생계 등 현실적인 비용도 고려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결국 레지던시 본질에 충실할 수 있도록 뒷받침돼 주는 지원 환경이 필요한 상황이다.
40 여 명 작가와 습작생 다녀간
전북 최초 문인 창작공간, 변산 바람꽃
지난 2015년 4월 13일 부안 변산 진서면에 위치한 바람꽃 펜션에서는 '레지던스 변산 바람꽃' 개소식이 있었다. 2014년 시범운영을 거쳐,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모한 '2015 문학창작공간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레지던스 변산바람꽃'은 작가들에게 작품구상과 집필을 위한 창작실을 지원하고 다양한 문학행사를 통해 문인들의 창작욕을 일깨운다는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안도현 시인이 위원장을, 박범신 소설가가 고문을 맡은 '레지던스 변산바람꽃'은 전북지역 최초의 문인 창작 공간으로 주목을 받았다.
'레지던스 변산바람꽃'은 바람꽃 펜션의 서융(55) 대표가 부안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데 쓰고 싶다며, 펜션의 공간 일부를 내놓으면서 구체화되었다. 고향인 부안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서융 대표는 부안역사문화연구소를 열어 부안의 역사와 문화, 생태를 기록한 잡지 「부안이야기」를 연 2회씩 펴내는 등 지역문화 활동을 해왔다. 평소 교류하던 안도현 시인으로부터 작가들의 창작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간 기증을 결심했다.
'레지던스 변산바람꽃'은 주거복합형인 5개의 개인창작실 외에 도서관, 멀티미디어실 등을 구비하고 매일 식사가 제공되는 등 작가들이 오직 작품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최소 관리비 명목으로 매달 6~8만원만 받았다. 특히, 기성작가뿐만 아니라 습작생까지 함께 받아 이들이 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기성작가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 중단했지만
원하는 작가들에게 공간 개방 지속
지난 2015년 '레지던스 변산바람꽃'은 작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동안 집필용도에 집중되었던 다른 창작공간과 달리 이곳은 변산반도와 줄포만의 빼어난 풍광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창작과 함께 휴식을 겸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인근의 마실길은 작가들에게 인기 산책코스였고, 작품 쓰러 왔다가 살쪄서 돌아간다는 작가도 있을 만큼 전라도식 밥상 또한 인기가 좋았다. 실제 2015년 1년 동안 약 40여 명의 작가와 습작생이 이곳을 다녀가고, 이곳에서 쓴 작품으로 책을 출판하거나 등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올해부터는 지난해 같은 본격적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운영하지 않는다. 지난해 3천만 원을 지원받았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창작공간지원사업'도 신청하지 않을 계획이다. 다만, 애초의 취지에 맞게, 지난해 운영위원들을 통하거나 개인적으로 문의해 오는 작가들에게는 계속 문을 개방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