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4 | [문화저널]
판소리명창
열아홉살, 공식데뷔한 대가의 후예
명창 이일주 1
최동현 군산대 교수, 판소리 연구가(2003-09-23 10:41:41)
이일주의 본명은 옥희(玉姬)이며, 193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아버지 이기중과 어머니 강화자 사이의 7남매 중 둘째(딸로는 첫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부여이지만, 그곳에서는 태어나기만 했을 뿐 성장을 충남 서천에서 했다. 후에 가족이 다시 서산읍으로 이사를 하였으므로, 현재 이일주의 본적지는 서산읍 읍내리로 되어 있다.
이일주의 부친인 이기중은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서편제 소리의 대가였던 이날치의 손자로 판소리를 매우 잘 하여, 소리꾼으로도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날치는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본래는 줄타기의 명수였으나 후에 판소리로 전환하여 대성한 사람이다. 이날치는 처음에 고부에 살던 동편 소리의 대가 박만순에게 배우고자 수행 고수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았으나, 박만순의 하대(下待)를 견디다 못하여 포기하고, 후에 서편소리의 창시자인 박유전에게 배워 대성한 사람이다. 이날치의 소리는 광주 담양 화순 등지에 퍼져서 6.25전까지는 가장 세력이 강한 소리였으나, 6.25중에 이날치 계의 소리를 대표하는 박동실 공기남 등이 월북함으로써 세력을 잃어, 지금은 한애순 장월중선 한승호 등에 의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기중이 이날치의 손자라면 본래의 생활터전은 전라도였을 것인데, 언제쯤 충청도로 옮겨가게 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이기중 1913년에 태어나 1977년에 죽어는데, 판소리사에 별로 알려진 소리꾼은 아니었지만, 자기 집안의 소리를 이어「흥보가」의 박타는 대목,「심청가」의 심청이가 밥빌러 가는 대목,「춘향가」의 이별 대목 등을 잘 불러 청중들을 울렸다고 한다. 이기중의 소리 중에서 특기할 만 한 점은 그가「숙영낭자전」을 불렀다고 하는 점이다. 이일주의 증언에 의하면, 이기중은 두 시간짜리「숙영낭자전」을 잘 했으며, 이일주 자신도 어렸을 때 부친으로부터 이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숙영낭자전」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소리가 두 시간이나 되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제 시대 정정렬이 만들어 현재 극히 일부에게 전해지고 있는「숙영낭자전」과는 다른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정정렬이 만든「숙영낭자전」은 그의 수제자였던 이기권과 박록주 등에게 전해져서, 이들로부터 몇몇 사람이 배워 부르고 있는데, 이기중은 정정렬의 수제자였던 이기권과 같은 집안이었다고 하니, 이「숙영낭자전」이 이기권에게 배운 것일 수도 있다.
이기중의 소리는 이일주의 표현을 빌면 맑고도 구성 있는 목으로 다양한 기교를 구사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서편소리의 여성적 특징을 그래도 지니고 있었음을 내보이는 말이라 생각된다. 이기중은 신영채 임방울 김연수와도 교유하였으며, 이들은 이기중의 소리를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특히 김연수는 우리국악단 시절에 이기중을 불러 같이 공연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일주는 이러한 집안의 전통 속에서 자연스럽게 판소리 수업에 나서게 된다. 이일주가 본격적으로 소리수업에 나선 것은 14세 무렵부터였다. 당시 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대여섯 명과 함께 자기 아버지로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일주가 부친으로부터 집중적인 소리지도를 받은 기간은 약3년쯤 된다고 하는데, 그동안 어떻게 열심히 소리를 하였던지 북 대신으로 쓰던 참나무 목침이 열 개나 부서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일주는 목구성이 좋아 뭇 사람들로부터 장차 큰 소리꾼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3년여의 초기 소리수업을 마친 후에 이일주는 자기 아버지와 함께 김연수의 우리국악단에 참여하게 된다.「옥루몽」등을 공연하며 4-5개월 공연을 하다가 수입이 시원치 않아 단원들 숙식비마저 해결할 수 없게 되자, 그해 겨울 마침내 우리국악단이 경상도에서 해산을 하게 되어, 이일주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때가 정확하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연수의 우리국악단이 여성국극단에 밀려 여성 위주의 단체로 전환한 것이 1955년 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을 보면, 1954년쯤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러니까 이일주는 비록 그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었지만 열아홉에 공식적인 데뷔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