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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 | [문화저널]
여성과 문화 도발적인 '역할바꾸기'의 허망함 김인숙의 소설「그래서 너를 안는다」를 읽고
여성문학연구모임(2003-09-23 10:44:05)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가족과 사회가 요구하는 남상과 여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김인숙의 소설은 우리 스스로 그것을 묻고 답을 찾아보라고 주문한다. 화두를 끌어안고 고행길을 떠나듯 소설 속으로의 여행을 시작하는 우리의 마음이 왠지 무겁다. 산동네에 살면서 시인을 꿈꾸는 섬약한 소년 완기와 뭇 사내아이들을 거느리는 골목대장 인호는 전도된 성 역할의 전형이다. 그들은 둘 다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gender)의 불일치로 사회의 편입에 어려움을 겪는 인물이다. 반면에 친구 송재는 타고난 남성성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다움을 완벽하게 갖춘,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생활하는 전형적 인물이다. 이 세 사람의 우정과 사랑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중심 이야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맨 처음의 질문과 만나야 한다. 인간의 성별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의학적으로 염색체의 쌍(xx혹은 xy)이 남녀의 성을 결정한다는 불변의 진리는 우리의 물음에 충분한 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우연적(?)결과야말로 진정한 성 역할 문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성별과는 별개로 인간에게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즉 인간은 양성적 존재라는 주장이 우리에게는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것이 우리가 만나는 숱한 '기집애 같은 녀석' '선머슴애 같은 년'들을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길게 말하자면 각자가 지니고 있는 양면적인 성향(물론 그 비율은 개인차가 크겠지만)이 어느 쪽을 계발시키느냐에 따라서 한 가지 성향으로 외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때 생리적인 성별과 외화된 성적 특성이 일치하면 아무 갈등 없이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사회의 낙오자가 되기 쉽다. 그렇다면 생물하적 성에 부합하기도록 잘 교육시키기만 하면 되는가? 즉,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길러야 한다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원론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 소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원만한 사회 편입에의 욕구가 숨기고 있는 억압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는 것이다. 사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회를 지탱해 주는 가족제도는 어떤 것인가? 그동안의 여성문제 소설 속에서 익히 강조되어 왔던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가부장제의 폐해를 우리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세 인물의 복합적인 드라마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 완기의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막노농꾼으로 '밥버러지'에 지나지 않은 어머니와 도무지 사내다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외아들과 그 밑의 두 딸을 먹여 살리는 힘겨운 가장이다. 그러나 그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어머니를 두들겨 패는 그의 행동은 이웃 아낙네들처럼 일을 하기는커녕 분수에 맞지 않게 허영심(예쁘고 화려한 물건 사들이기)에 빠져 있는 어머니에 대한 정당한 분노의 표출로 그려진다. 어머니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단지 폭력이 싫어서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완기가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공사판에서 '수도 없는 아버지'를 발견하는 것은 아버지의 거칠고 상스러운 심성이 실은 가정과 사회에 의해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일깨운다. 그러나 완기는 아버지의 처참한 죽음으로 떠맡게 된 가장의 역할을 배겨내지 못하고 끝내 거부해버리는 무책임하고 몰인정한 아들이 되고 만다. 그저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여자들'을 저버린 뒤부터 그는 소이 남성적 면모를 지니게 된다. 중장비기사가 되어 험함 노동판에서 부대끼며 체득하게 된 그의 남성성이란 남자들 사이의 거친 욕설과 몸싸움, 그리고 술집 작부에게 가하는 폭행을 수반한 성행위 등으로 나타나는데, 그것들은 자기 파괴적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완기의 남성성이 인간성 상실이란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니는데 비해 인호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 이유는 완기의 경우 자신의 성향과 의지를 거스르는 자기 분열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인호의 남성성은 다분히 목적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딴 살림을 차린 파렴치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가슴 밑바닥에 간직하고 있는 그녀는 남자라는 족속, 특히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남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내면화한 인물이다. 때문에 인호의 남성성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자신과 어머니를 방어하기 위한 힘으로 의미 주어진다. 주유소 급유원으로 시작하여 자동차 정비사로 변신하는 동안 그녀는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아 가는데, 자기 소유의 정비공장을 갖고 싶어 하는 것도 "여자 복은 남자에게서 나느니라. 따위의 말에 조금도 상심하지 않을 만큼은 돈과 힘을 갖고 살 것"이라는 의지의 발로이다. 그런 인호가 지나치게 사내다움을 과시하는 송재를 끔찍이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누나처럼 어머니처럼 울보 완기를 다독거리고 보호했던 그녀가 그의 맹목적인 구애를 거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힌다. 그것은 통념적으로 여성의 속성이라 말해지는 모성성의 거부에 가깝다. 남자임을 내세우지 않는 완기이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나약함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끝에 가서 결국 완기를 끌어안는 인호의 행위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틀림없이 변하기는 했지만 이미 부서 질대로 부서진 그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 되어 주려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인가? 어린 시절의 전도된 성 역할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완기처럼 믿기로 한 것인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전편에 흐르는 비장한 슬픔의 여운이 너무 짙게 남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면서 진지하게 청혼하는 송재의 솔직함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인호가 느닷없이 결별을 선언할 때 보여주는 예의 그 당찬 자립심과 어쩔 수 없이 완기를 끌어 안을 때의 심리상태에는 깊은 단절이 놓여 있다. 의식적으로 거부해왔던 잠재적 모성성의 인정 혹은 수용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때에도 문제는 남는다. 완기가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의 불일치로 철저히 파괴되어 가는 요인을 사회에서 찾은 것과는 달리 인호의 변모는 다분히 설명 부족이다. 송재와 함께 겪은 교통사고의 체험 때문에 정비공장의 꿈을 쉽사리 포기하고 옷가게를 여는 것도 인호의 여성성 회복 이라기보다는 패배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사회생활에서 인호가 여성으로서 어떤 불이익을 받는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드는 것은 결함이라 할 수 있겠지만 더 나아가 인호의 결심을 바꾸게 하는 어떤 내적 동기도 없다는 사실을 거꾸로 보여주는 것이다. 너무 멀리 가지 말자. 서서히 출구를 찾아 빠져나가자. 고정된 성 역할이 인간을 얼마나 파괴시키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훌륭한 것이었지만 균형감각을 잃어버렸다. 즉 가부장제 사회의 피해자로서 남성의 입장을 변호하는 만큼 여성의 현실을 천착하지 못한 것이다. 완기의 어머니나 두 여동생, 그리고 완기를 사랑했지만 비참하게 버림받는 혜경, 또 작부 희자 등의 여성인물들이 하나같이 부정적으로 그려진 데서도 느껴지는 이러한 불균형은 고유한 성 역할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완기의 여성성이 사회 편입을 어렵게 만들어 한 인간을 타락시킨 것이라면 인호의 과도한 남성지향성이야말로 문제인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사회는 여성에게 능력은 남성과 같을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여자다움을 갖추기를 바라는 이중적 성 역할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호의 남성성은 오히려 장점이 될 뿐 그닥 걸림돌이 되지 않는 듯하다. 이는 작가가 완기라는 인물에 쏟는 애정, 다시 말해 완기를 남자로 만드는 데 들이는 공력(그것의 성공여부는 차치하고)에 비해 인호를 너무 쉽게 여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갖게 한다. 여행을 마치면서 우리는 김인숙이 『남자의 가정』이나 『그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의 남성작가들보다 훨씬 따뜻하고 깊은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또 갑작스럽고 도발적인 '역할 바꾸기'가 얼마나 허망한 껍데기인가를 고통스럽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페미니즘 진정성에 좀 더 다가서고 있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이 미완으로 여겨지는 것은 "마치 철통같은 갑옷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성역할 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함에 있어 작가가 견지하지 못한 공평함 때문이 아닐까? 여성문학연구모임 / 93년 3월부터 활동을 시작해 문학, 드라마, 영화 등 문화에 나타난 여성문제를 비판하고 개선,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단체로 여성이론, 문학이론 등을 토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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