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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 | [서평]
체계적 포스트 맑스주의 비판서 『계급으로부터의 후퇴』
지역사회연구모임(2003-09-23 10:48:09)
'포스트 증후군'이라 이름할 만큼 다양한 포스트 논쟁들이 등장하고 있는 이때, 나름대로 혼돈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은 심정으로 엘린 메익신즈 우드의 『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접했다. '뿌리 없는 맑스주의의 폭발. 그리고 맑스주의가 우리사회에 채 뿌리내리기 전에 강습한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일부 선도적 맑스주의 이론가들을 포스트맑스주의로 경도하게 했고 포스트맑스주의의 유행을 가져다주었다'는 편역자 손호철 교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변혁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서슬 퍼런(?)계급의식이 젖어들기도 전에 계급의 조기은퇴라는 유령이 나돌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맑스의 죽은 것과 산 것을 분별하면서, 맑스의 산 것을 계승. 보존하고이것과 비맑스주의적 진보이론의 풍부한 유산들을 올바르게 흡수·통합한 이론의 총체'가 포스트맑스주의라는 이병천 교수의 논리는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맑스주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신선한 포스트수액을 흡수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라끌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읽고, 포스트맑스주의에 대한 뚜렷한 정의도 없이 논쟁에 휘말렸다. 포스트맑스주의의 정당성을 제고하고 그 입지를 높이기 위해 많은 정의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여전히 혼란스럽다. 우드의 말대로 이제 포스트맑스주의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맑스주의로부터 너무 멀리 나아간 듯한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이 책은 최초의 체계적인 포스트맑스주의 비판서로서 출판된 다음 해인 1987년에 세계지보학계의 권위 있는 저술상인 '아이작 도이처 기념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다. 손호철 교수는 제1부에 「계급으로부터의 후퇴」를 제2부에 우드의 「합리적 선택 맑스주의 : 할만한 게임인가?」를 추가시켰고, 3부에서는 포스트 맑시즘과 분석적 맑시즘에 대한 옹호론자들의 서평과 반박을 실었다. 우드는 1840년대에 맑스와 엥겔스가 주요 논적으로 삼은 지적조류인 '진정사회주의(true socialism)'가 새로운 진정사회주의(new socialism:NTS)로 1980년대에 부활했다고 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녀는 포스트맑스주의라는 용어대신 NTS라는 용어를 즐겨 썼는데 NTS는 맑스주의적 '경제주의'와 '계급 환원론'을 거부하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주의적 프로젝트에서 계급과 계급투쟁을 사실상 제거해버렸다고 본다. 또 이런 조류의 가장 독특한 점은 이데올로기와 정치를 모든 사회적 토대로부터, 구체적으로는 자율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으며, 경제와 정치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조응관계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아무런 특권적 지위도 차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NTS가 사회주의 운동을 경제적인 계급적 조건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수단들에 의해 건설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계급적인 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보편적 인류 선'과 합리적 사회질서에 대한 이성적 호소에 의해 건설하려 한다고 본다. 이러한 NTS의 이론적 장치들은 사실상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핵심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추방하고, 계급적 적대를 이데올로기 혹은 '담화(discourage)'의 균열로 대체하고 있다고 열렬히 통박했다. 즉 현실의 살아있는 주체는 사라지고, 지식인의 토론이, 오직 담화만이 주체로 둔갑하고 있다고 본다. 남는 건 공허한 형이상학뿐! 이러한 지적 조류인 NTS의 여정은 맑스주의의 핵심인 계급투쟁과 노동자계급을 제거하는 과정, 즉 맑스주의 원칙들로부터 점진적인 이탈에 의해 형성되었다. 우드는 알튀세의 '과도한 방법론주의'가 정치적 내용이라는 문제를 제거해버렸고 그의 이론적 아카데미즘은 모호한 언어들로 나타났으며, 특히 이러한 경향은 유로코뮤니즘의 프로그램 변경과 결합되었다고 본다. 우드는 풀란탸스가 '구각론에서 정치적인 것의 우위를 확립하고 계급론에서 계급의 일차적 결정요인으로 착취를 기각하고 대신 이데올로기를 끌어올리면서 용해된 한줌의 집단으로 격하시키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질적 단절이 없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적대적 계급갈등을 모호하게 하면서 NTS의 모든 주요 주제들의 맹아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드는 계속해서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자율화, 역사와 정치의 무작위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와 보편적인 인간선에 대한 NTS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전개한다. 일련의 포스트논쟁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우드의 뛰어난 논쟁력을 실감할 수 있으며, 포스트맑스주의와 분석적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흥미진진한 법정토론을 보는 기분이 든다. 결론에서 우드는 사회주의 운동이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계급조직과 '신사회 운동'이 표방하는 해방적 영감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해야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계급정치가 모든 해방의 프로젝트를 통일하는 힘이 되지 못한다면 '신사회운동'은 현존 사회질서의 주변부에 남게 되거나, 기적 지지를 확보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해방과 '보편적 인간선'의 실현에 반대하는 자본주의의 모든 방어 장치와 함께 자본주의 질서 그 자체는 건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놓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 리끌라우, 무페류의 포스트맑스주의는 '사소하고 당연한 사실'로부터 거대한 논리의 비약-담화에 선행하는 이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을 통해 그릇된 결론을 유도해내고 있다는 우드의 핵심주장은 상당한 시사를 준다. 우드의 계급으로부터의 후퇴경향에 대한 강렬한 논박에 대해 합리적 선택 맑스주의자 카링은 '무언가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믿는 '전능주의'라고 공격한다. 이에 대한 우드의 답변은 읽는 이를 즐겁게 한다. 한편 우드의 주장은 서구에서 나타나는 고전적인 계급정치와 노동운동의 쇠퇴 등을 고려할 때 정치적으로 무력하며 이를 돌파할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고 있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뭔가 포스트증후군의 공격으로부터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독자들은 여기서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계급으로부터의 후퇴조짐 등 많은 혼란과 침체가 계속되는 현실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적 논리를 우드에게 기대하는 것은 역시 담화의 오류에 빠질 뿐이다. 우드는 유럽통합과 통일 독일의 실상 등을 접하면서 이제 바야흐로 자본과 노동의 새로운 계급적 충돌의 조건이 창출되고 있음을 한국판 서문에서 희망적으로 예시한다. 왜 죽어가고 있는 포스트맑스주의 논쟁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왜 1840년대의 맑스의 주요 논적인 진정사회주의로 돌아가려 하는가? 라고 강하게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계속되는 현실의 답답함을 힘들어하는 우리로서는 이제는 한물 가버린 논쟁이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겐 최신인 포스트논쟁을 통해 변혁의 지향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손호철 씨의 서문도 한국판 포스트논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과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정리: 김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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