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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 | 기획 [기획]
장인의 공방 ① 전주
전주-1
이동혁, 김하람(2020-07-07 11:26:32)

기획 | 장인의 공방 ① 전주_1


나무, 소리가 되기까지의 인고를 품다
악기장 고수환 <전주국악기전수관>



전주 메가박스 송천점이 위치한 발단리네거리에서 월평마을로 향하는 전미로로 들어서자 도심의 떠들썩함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진다. 갓길에는 웃자란 들꽃들이 완연한 여름의 기운을 받아 생기를 뽐내고, 부쩍 낮아진 건물의 높이가 풍경에 시원함을 더한다. 그 풍경 한가운데 위치한 ‘전주국악기전수관’. 우리 지역 가야금 제작의 1인자 고수환 장인이 운영하는 전주국악기전수관은 옛 선비들의 기상처럼 자연의 호젓함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도립국악원 인근에서 이곳으로 공방을 옮긴지도 어느새 24년이 지났다. 도심에선 멀어졌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는 장인. 가야금을 만들 때 소음, 분진 문제가 발생해도 이웃들에게 폐를 끼칠 걱정을 덜었기 때문이다. 남은 과제는 온전히 작업에 몰두하며 좋은 악기를 만들어 내는 일뿐. 제자들의 작업 소리가 취재 내내 들려왔다.


그의 공방에선 가야금 제작의 모든 과정이 지금도 원형 그대로 이뤄진다. 잘 숙성된 오동나무 중 적당한 것을 골라 울림통을 만드는데 수만 번의 대패질이 필요한 고단한 작업임에도 그에게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다. 악기의 생명인 음색은 손이 닿을수록 좋아지기 때문에 수고스러워도 절대 허투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울림통이 완성되면 뒷판과 접착을 시키고 윗판에 인두질을 한다. 인두질을 하면 나무의 결이 자연스럽게 살아날 뿐만 아니라 병충해와 습기로 인한 부식을 막을 수 있다. 그 다음 가야금의 머리 부분인 좌단과 끝부분인 봉미를 붙이고, 좌단에 문양을 넣은 뒤에 뒤판에 옻칠을 한다. 좌단의 명주실 구멍과 봉미의 부들 구멍을 뚫는 작업도 함께 이뤄진다.


이후 줄꼬기를 하는데 가야금 줄은 누에고치에서 나온 생사를 삶아서 꼬아야 한다. 생사의 질이 얼마나 좋은가, 어떻게 줄을 꼬았느냐는 가야금 소리를 결정하는 요인이므로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가야금 줄은 ‘세줄꼬이’와 ‘외줄꼬이’ 방법으로 꼰다. 먼저 현의 굵기에 맞게 합사된 세줄을 꼬고, 세 줄을 한 줄로 꼰 다음, 다시 그 한 줄을 양쪽에서 단단하고 촘촘하게 꼬면 줄이 완성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현침에 줄을 고정하는 돌괘, 줄을 매는 부들, 줄을 거는 안족, 안족을 연결하는 끈, 장식용 매듭 작업까지 이뤄져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선율을 품은 가야금이 만들어진다.


장인은 가야금으로 재탄생되는 나무가 인고의 세월을 지나 자라듯 장인에게도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인고의 시간이 그대로 누적된 공방은 어쩌면 그의 삶을 전부 대변하는 거울이자 자화상이 아닐까. 그가 쌓은 수십 년 세월의 경험이 공방에 아로새겨져 있다.


1949년 정읍에서 태어난 장인은 16살에 전주로 나와 악기제작공방에서 가야금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그는 악기 제조 분야의 첫 무형문화재인 김광주 명장을 시작으로 조정환-조정삼•남갑진-고수환으로 이어지고 있는 악기 제작의 정통성을 지켜가고 있다. 분업이나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원칙을 지켜온 그의 악기는 좋은 음색과 쉽게 변하지 않는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2003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가요인 ‘공무도하가’에 등장하는 전설의 악기 공후를 복원하는 데 성공해 주목을 모았다.


전주시 덕진구 전미월평1길 55-12



조선시대의 부채를 만나다
선자장 김동식 <동성공예>



조선시대 전라남북도부터 제주도까지 통할하는 관청인 전라감영이 있던 곳 전주. 전라감영 내에는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던 선자청이 있었다.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서도 부채를 만들지만, 전주 부채는 대나무 껍질을 얇게 이루어 이것을 서로 합쳐서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합죽선’도 거기서 나온 이름이다.


조선시대 만들던 이 합죽선의 제작 방식을 그대로 재현해 전주 부채의 맥을 잇고 있는 자랑스러운 곳이 있다. 바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김동식 장인의 공방. 합죽선으로서는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자부하는 그는 모든 과정을 전통 방식을 따라 수작업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그 기술을 국가에 인정받아 합죽선으로는 최초로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됐다.


삼천동 어느 골목길을 오르면 보이는 고풍스러운 현판을 달고 있는 주택이 그의 공방이다. 자택에 들어서면 곳곳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자택의 한쪽 방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장인뿐만 아니라 아들이자 이수자인 김대성 씨와 며느리가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예전 바쁠 때는 하루 16시간도 더 부채를 만들던 그는 자나 깨나 부채 생각뿐이다. “어떻게 만들어야 부채를 쓰는 사람이 만족할지, 어떻게 하면 전주의 부채를 알릴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지.” 그가 만드는 부채는 사람 얼굴 천 명이 다 다르듯 다르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부채 하나하나가 유일한 작품이 된다.


“국가무형문화재에 등록시킨 것 하나로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전수관을 지어 홍보하는 것이 중요하지.” 하지만 따로 공방이 없이 자택에서 작업을 하는 그는 전주 부채를 홍보할 기회가 적어 늘 아쉬움이 남는다. 부채가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섬세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가를 사람들이 직접 볼 수 있게 해야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것. 그런 점에서 전수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장인은 강조했다.


기술이 현대화되고, 기계화되는 가운데 전통 기술을 전수하지 않으면 그 첫 번, 원형을 알 수 없게 된다. 그 기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그는 지금도 처음 손으로 만들었을 때의 기술 그대로를 고집스럽게 보존하고 전수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장인은 1943년 전주시 인후동 가재미 마을에서 출생했으며, 14세가 되던 해인 1956년 당시 합죽선을 가업으로 이어오던 외조부 라학천 선생의 영향으로 합죽선과 처음 연을 맺게 됐다. 그의 외조부는 고종 황제에게 합죽선을 진상할 만큼, 뛰어난 합죽선 장인으로 당대에 인정을 받았었다. 현재 김동식 선자장은 외가로부터 4대째 가업을 대물림 받고 있으며, 그의 아들인 김대성 후계자까지 포함하면 5대째를 이어나가고 있다.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으로 지정됐다.


전주시 완산구 송정3길 19-7



무궁무진한 지승의 쓰임을 엿보다
지승장 김선애 <보은정지승공예연구소>



견오백 지천년. 비단은 500년을 가지만, 한지는 1,000년을 간다는 이 말은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한 해 1,000만 명이 방문하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문화재 복원을 위해 우리 한지를 택한 것만 봐도 그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한지를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삼태기, 망태기, 소반, 심지어는 옷을 짓는 데까지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한지를 엮어 생활용품으로 만들어 썼던 옛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공방이 있다. 전주 화산체육공원 인근에 위치한 ‘보은정지승공예연구소’다.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61호 지승제조 김선애 장인이 운영하고 있는 보은정지승공예연구소는 그가 공방 겸 전시 공간으로 시민들과 만나고 있는 곳이다.


지승공예는 한지를 가늘고 길게 잘라 엄지와 검지로 비벼 노끈을 만들고 이를 겹줄과 홑줄로 엮어 여러 기물을 만드는 한지공예의 한 방식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필통이나 바구니와 같은 작은 물건에서부터 화살통이나 항아리처럼 큰 물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능과 형태를 가진 기물들이 제작됐다. 중국에도 지승으로 엮은 유물이 있지만, 현재까지도 지승공예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엮는 법은 짚공예, 왕골공예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재료가 가진 특징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대나무는 딱딱하죠. 딱딱한 걸 가지고 엮을 때는 모양을 자유롭게 만든다거나 섬세한 표현이 상대적으로 어렵죠. 그런데 지승은 그런 표현들이 가능해요. 활용이 무궁무진한 거죠.”


실제 그의 공방에는 이게 종이로 만들어진 기물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다양한 쓰임을 가진 작품들이 빼곡이 전시돼 있다. 농삼장(물건을 싸기 위해 만든 보), 주루막(물건을 나르는 데 쓰는 농기구), 화살통, 신발, 주전자, 대야, 요강 등 그 무궁한 활용이 놀라울 따름이다. 전부 유물을 스승 삼아 독학으로 한지를 엮어 온 30여 년 세월의 결정체들이다. 더욱 감탄스러운 것은 과거의 것을 본따 만든 것임에도 지금의 감각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이다. 옛 선인들의 빼어난 미적 감각과 섬세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지승은 앉을 수 있는 한 평 남짓한 공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작업을 할 수 있는 공예다. 작업을 위해 반드시 공방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부러 공방을 열고 시민들과 만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소중한 전통을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단 사명감 때문이었다.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인 지승공예를 지키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오늘도 색색의 한지에 둘러싸인 공방에서 자부심이란 이름의 전통을 엮고 있다.


장인은 1993년 지승공예에 입문해 각종 자료와 유물을 뜯어보며 연구, 옻칠이나 미투리 제작 등 부족한 부분은 전문가를 찾아가 배우며 독학으로 기법을 터득했다. 홀로 지승 기법을 체득한 그는 배우는 과정에서 익힌 자료를 바탕으로 2006년 ‘지승공예기법에 대한 연구’ 주제의 논문을 발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과 대한민국 한지대전 특별상을 수상한 그는 세 번의 개인전을 통해 지승공예를 알리고 대중화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그룹전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전주시 완산구 백제대로 323-7



죽었던 나무에 새 숨을 불어넣는 공간
민속목조각장 김종연 <목우헌>



한 번 죽었던 나무지만, 장인의 손길이 닿는 순간 다시금 새로운 생명을 얻어 피어난다. 향기를 머금은 연꽃으로, 금방이라도 웅장한 울음소리를 내지를 듯한 호랑이로 변모한다. 이처럼 죽은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목조각을 업으로 삼아 시민들과 만나고 있는 공방이 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8호 민속목조각장 김종연 장인이 운영하는 ‘목우헌’이다. 그의 호이기도 한 ‘목우’는 나무와 우연히 만났다는 뜻이다.


입구서부터 공방 벽 한쪽을 빼곡히 채운 도구들이 눈에 띈다. 쓰임새에 따라 장인이 직접 의뢰해 만든 수공예 도구들이다. 수백에 달하는 도구들 중 똑같은 도구는 단 하나도 없다. 각각의 쓰임새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구분해 사용하는 장인의 눈썰미가 놀라울 따름이다.


공방 바로 옆에는 그가 작업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는 공간도 별도로 마련돼 있다. 손바닥만한 작은 작품들부터 사람 키만한 작품들까지 그동안 장인이 이뤄 온 경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처럼 다양한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목침’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침은 백제시대 무령왕릉의 왕비 관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목침은 가운데가 움푹 패인 사각 장방형으로,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품위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의 공방에도 무령왕릉 목침을 재현해 만든 작품이 있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섬세한 조각이 장인의 빼어난 솜씨를 가늠케 한다.


골동품상에서 목침 재현 의뢰를 받으면서 우연하게 목침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그는 고증을 바탕으로 각종 한약재나 허브, 라벤더 등 체질과 효능에 따라 넣을 수 있는 서랍을 목침에 도입하기도 했다. 기능도 기능이지만, 멋스러운 조각이 보는 즐거움까지 안겨 준다.


그가 공방에서 만드는 것이 목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 현판, 불상, 심지어는 현대적 감각이 더해진 예술 작품들까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개방을 앞둔 전라감영 현판도 그가 작업한 작품이다. 그동안은 주로 구상 작품에 집중해 왔지만, 최근에는 비구상 작품에까지 영역을 확대해 ‘노래하는 나무’ 등의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의 공방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배움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전통문화전당 수업에서 인연을 맺은 제자들이 더 많은 배움을 얻고자 수시로 그의 공방을 찾기도 한단다. 장인이 직접 시범과 함께 본을 보여 주니 배움을 청하는 입장에선 이보다 나은 곳이 없다.


장인은 1961년 장수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중요무형문화재 박찬수 명장에게 기능을 전수받으며 본격적인 목공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뒤 전주에 내려와 공방 ‘목우헌’을 열어 독립하면서 지금까지 목조각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목침과 인연을 맺은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무령왕릉 출토 목침을 재현, 대한민국 목침기능전수자로 지정받기도 했다. 전각 분야에서도 돋보이는 솜씨를 인정받았으며 대한민국 5대 국새대전에서 우수상을 차지했다. 2018년도에는 7세기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보살상 ‘백제금동관음보살입상’을 본떠 재현했다.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88



망치질 소리 정겹게 울려 퍼지는 그곳
야장 김한일 <한일민속대장간>



지금만큼 세상이 편해지기 전, 날이 무뎌진 농기구를 벼리거나 손에 착 감기는 호미를 사기 위해선 대장간을 찾아야 했다. 깡깡 울려 퍼지는 망치 소리가 낯설지 않았고, 풀무질 장단에 맞춰 쌕쌕 소리를 내며 뜨거운 불을 토해내는 화덕도 우리네 삶과 가까운 풍광 중 하나였다. 하지만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해 익숙한 풍경이었던 대장간들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옛 기억이 되고 말았다.


전주 용머리고개에 아직도 치열한 삶의 열기와 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대장간이 남아 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5호 야장 김한일 장인이 운영하는 ‘한일민속대장간’이다. 이곳은 도내에서 유일하게 전통방식을 지키며 대장간의 맥을 잇고 있는 공간으로 더 유명하다.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꿋꿋이 전통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장인은 50년이 넘는 아득한 세월 동안 굳은 신념과 장인 정신을 가지고 대장간의 명맥을 잇고 있다.


“기술이 많이 좋아졌지만,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던 그 방식 그대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모든 물건을 기계로 만들면 편리하고 수익도 나아지겠지만, 품질면에서 기계로 만든 연장은 직접 담금질하고 두드려 만든 연장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물건은 호미에서부터 칼, 낫, 특수 망치 등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장인의 손을 거치면 만들어지지 않는 물건이 없는 것이다. 수십 년 세월이 꼬박 담긴 장인의 손길은 노련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그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막내아들이 지난 2002년부터 대장장이 장인 전수자로 일을 연마하고 있어 그는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었다. 고된 노동의 현장이지만, 전통이니까 지켜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매일 대장간 문을 열도록 가슴에 불을 지핀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연신 수건으로 닦아내며 망치질을 그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삶의 고동처럼 다가온다.


1945년 군산에서 태어난 장인은 형인 김한기 장인에게 기술을 배워 열다섯 살부터 대장장이 일을 시작했다. 1970년대에 전주 남부시장에서 일을 했는데, 시장에 화재가 난 뒤 일이 힘들기도 하고, 일터를 잃기도 해 많은 대장장이 일을 그만두었으나 그는 이 길을 지켰다. 최근 기술의 발전으로 금속 제품들이 공장에서 생산되어 대장장이들의 입지가 줄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전통방식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쇠를 달구고 메질하여 형태를 잡아가는 일은 아직도 직접 해낸다.


전주시 완산구 용머리로 2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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