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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 | 연재 [윤지용의 튀르키예 기행]
윤지용의 튀르키예 기행 - 1
두 대륙을 품은 도시 이스탄불
윤지용 편집위원(2022-11-11 22:30:05)



윤지용의 튀르키예 기행 1

두 대륙을 품은 도시 이스탄불


글·사진 윤지용 편집위원






3년 만에 다시 튀르키예에 다녀왔다. 튀르키예 화폐인 리라화 가치가 폭락한 이후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난번에 가보지 못한 아나톨리아반도의 도시들을 둘러보고 싶었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서 안탈리아, 파묵칼레, 가지안테프, 셀축을 여행했다. 보름 동안의 여행기를 나누어 싣는다. 이번 호에는 튀르키예를 대표하는 도시 이스탄불 이야기다.




터키(Turkey)였던 나라 이름이 얼마 전 ‘튀르키예(Türkiye)’로 바뀌었다. 그런데 최근에 바뀐 것은 국제사회에서 쓰이는 영문 표기일 뿐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1922년 건국 이래 줄곧 자신들의 나라를 ‘튀르키예 줌후리예티(Türkiye Cumhuriyeti, 튀르키예공화국)’로 불러왔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Korea(고려)라고 부르지만 정식 국호는 ‘대한민국’인 것과 비슷하다. 고대에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제국으로 고구려와 교류했던 돌궐(突厥)도 ‘괵튀르크(Göktürk)’였다.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가 튀르크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이 돌궐이었다. 그 돌궐족이 수백 년에 걸쳐 대륙을 가로질러서 아나톨리아반도에 정착해 셀주크튀르크와 오스만제국과 튀르키예공화국을 세운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대륙의 한 귀퉁이에 정착해 살아온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민족 대이동’이지만, 그들은 본디 기마유목민족이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이스탄불은 크게 유럽지구와 아시아지구로 나뉜다. 서울의 강남, 강북과 비슷하지만, 이 도시의 두 지역을 나누는 것은 강이 아니라 바다다.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보스포러스해협이 다. 유라시아대륙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지리적 경계는 육지에서는 러시아의 우랄산맥, 바다에서는 보스포러스해협이다. 보스포러스 해협 동안(東岸)은 아시아의 아나톨리아반도, 서안(西岸)은 유럽의 발칸반도다. 그러니 해협 양쪽에 걸쳐 있는 이스탄불은 한 도시 안에 두 대륙이 있는 셈이다. 서울시민들이 강남북을 오가며 출퇴근하는 것처럼 이스탄불 시민들도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출퇴근한다. 유럽지구 쪽은 관광지와 업무지구가 많고 아시아지구 쪽이 주거지가 많다.





서울보다 인구가 많은 대도시인데, 해협을 건너는 다리는 세 개뿐이라서 교통체증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이스탄불 시민들은 주로 대중교통수단인 페리를 이용해서 해협을 건넌다.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이라서 뱃삯은 우리 돈 600원 정도다. 시내버스나 지하철, 노면전철인 트램과 요금이 비슷하고 서로 환승할인도 된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에서 유람선을 타려면 몇만 원씩인데, 이스탄불에서는 시내버스 요금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다.


해협 서안의 유럽지구는 다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뉜다. 골든혼(Golden Horn) 남쪽이 구시가지, 북쪽이 신시가지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나누는 골든혼도 역시 강이 아니라 바다다. 바다가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만(灣)인데, 잔물결이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만의 형상이 뿔처럼 뾰족하다 해서 ‘황금뿔’ 골든혼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금각만(金角灣)’이라고도 한다. 현지 튀르키예인들이 부르는 진짜 이름은 ‘할리치(Haliç)’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오가기 위해 골든혼을 건너는 다리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갈라타다리다. 구시가지의 선착장인 에미뇌뉘와 신시가지의 갈라타지구를 잇는다. 갈라타다리는 자동차와 트램, 보행자들이 함께 이용하는 다리인데, 난간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낚시꾼들이 많다. 생업으로 낚시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소일거리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갈라타다리 남쪽 에미뇌뉘 선착장에는 유명한 ‘고등어 케밥’이 있다. 고등어 비슷한 생선을 구워서 바게트 빵 사이에 끼운 일종의 샌드위치인데 선착장에 매어놓은 배들 위에서 조리해서 판다. 본래 이름은 ‘발륵에크멕(발륵은 생선, 에크맥은 빵)’인데, 우리나라 사람들만 고등어케밥이라고 부른다. 한 개에 30리라, 우리 돈 2천 원 정도인 서민 음식이다.




다시 모스크가 된 아야소피아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는 우리의 구시가지, 신시가지와 다른 개념이다. ‘신시가지’라고 해서 최근에 조성된 곳이 아니고 몇백 년 전부터 번성했던 지역이다. 구시가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을 뿐이다.


이스탄불의 구시가지는 3천 년 가까운 역사를 품고 있다. 기원전 7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식민도시 ‘비잔티온(비잔티움)’을 건설한 것이 도시의 시작이었다. 서기 330년에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긴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도시)가 되었다.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고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로 천 년 동안 번성했다.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도 계속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다. 오스만제국의 수도일 때 도시의 이름은 튀르키예어로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콘스탄티니예‘였다. 1922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주도로 터키공화국이 수립되고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진 이후에 지금의 이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구시가지의 중심은 술탄아흐메트 역사지구다. 오스만제국의 제14대 술탄이었던 아흐메트에 의해 17세기 초에 세워진 술탄아흐메트 모스크(Sultan Ahmet Camii, 이슬람 사원이 튀르키예어로는 ‘자미’)가 있는 곳이다. 이 사원은 푸른색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 때문에 실내에 은은한 푸른색이 감돌아서 ‘블루모스크’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웅장한 사원 바로 옆에는 훨씬 더 유명하고 더 유서 깊은 ‘아야소피아(Ayasofya)’가 있다. 두 개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나란히 서 있는 술탄아흐메트 역사지구는 이스탄불 여행의 핵심이다.


아야소피아는 오스만제국의 튀르키예인들이 지은 건축물이 아니다. 서기 537년, 기독교(동방정교)가 국교인 동로마제국 시절에 지어진 성당이었다. 동로마제국의 공용어가 고대 그리스어였으므로 본래의 이름은 그리스어 ‘하기야 소피아(성스러운 지혜)’였다. 이 성당은 비잔틴 건축양식의 백미로 꼽힌다. 1,500년 전에 이런 건축물을 지었다는 것이 경이로울 정도다.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이 도시를 차지했을 때 이 아름다운 성당을 차마 파괴하지 못하고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성당의 돔 천장에 그려져 있던 기독교 모자이크화들은 석회로 덧칠해서 가려졌다. 다른 종교의 성화라서이기도 했겠지만, 본래 이슬람 교리에서는 사원 안에 동물, 사람을 형상화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간주해서 절대 금지한다. 알라신이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형상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전세계의 모든 이슬람 사원들은 식물 문양,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문양, 경전 코란의 문구를 쓴 캘리그라피로만 장식되어 있다.





1922년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폐위시키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수립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의 세속화(정교분리)와 유럽식 근대화를 추구했다. 이슬람권의 공용문자였던 아랍문자 대신 라틴문자(알파벳)를 도입했다.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인 아야소피아를 이슬람 사원으로 독점할 수 없다며 박물관으로 개방했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 대천사 가브리엘 등이 그려진 기독교 성화들도 회칠이 벗겨져 노출된 채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3년 전에 내가 처음 갔을 때도 박물관이었다.


그런데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포퓰리스트인 현 대통령 에르도안은 2020년에 아야소피아를 다시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어버렸다. 900년 동안 성당이었고 500년 동안 이슬람 사원이었다가 100년 동안 박물관이었던, 아야소피아가 다시 이슬람 사원이 된 것이다. 이번에 다시 가보니 예전에 드러나 있던 기독교 성화들은 흰 천을 드리워 가려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 석회로 덧칠을 하지는 않았다. 아야소피아가 다시 모스크가 되어서 좋은 점도 있다. 예전에 박물관이었을 때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했는데, 사원으로 바뀌니 공짜로 입장할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역사적인 건축물을 관람하기 위해서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이른 아침부터 몇백 미터씩 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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