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갯바닥이 우리 새끼들 다 키웠어'
계화도는 이름 그대로 본래 섬이었다. 1963년에 시작된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었고, 2006년 새만금 끝막이로 해안선은 계화도 너머 아득히 먼 거리인 고군산도까지 후퇴해 있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해안선 길이는 본격적인 간척이 이루어지기 전인 일제강점기 초기에 비해 지금은 약 40% 짧아졌다고 하는데 부안은 해안선 길이가 짧아진 정도가 아니라 벽해상전(碧海桑田)의 땅이 되었다.
1968년 계화도간척사업이 완료되어 계화도 일대 지형이 크게 바뀌었어도 아직은 동진·만경강이 닿아 있고, 두 강은 육상기원 퇴적물을 싣고 내려와 갯벌에 풀어놓아 썰물 때면 끝 간 데 없는 건강한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이처럼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는 강 하구의 수역을 '기수역'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생물의 서식환경이 위치에 따라 급격하게 달라진다. 따라서 하구갯벌은 다양한 생물이 살아가는 어족자원의 보고인 것이다.
새만금 찬·반간에 가장 뜨거운 쟁점은 '갯벌의 가치'였다. 찬성측은 '농지가 갯벌보다 3.3배 더 높다', 반대측은 '갯벌이 농지보다 3.3배 더 높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영국의 과학전문지인 '네이처'에 의하면 연안습지의 생태적 가치는 1ha(0.01㎢)당 9,900달러로 농경지의 가치인 92달러보다 100배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연안습지는 퇴적물이 강 하류 지역에 넓게 쌓이면서 만들어진 삼각주 지역이나 기수역의 갯벌 즉 하구갯벌을 의미한다. 동진‧만경강 기수역은 위에서 네이처지가 다룬 바로 그 생태적 가치가 높은 연안습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렇듯 계화도갯벌은 단순한 갯벌이 아니라 하구갯벌이고 새만금의 전 해역이 하구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에 전남대 전승수 교수도 '새만금 해역은 서남해에 분포하는 다른 갯벌과 해역에 비해 종 다양성과 1차 생산성이 약 3~7배 정도 높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하구갯벌을 끼고 있는 계화도갯벌의 대표 생물은 백합이었다. 석패목(石貝目) 백합과에 속하는 백합은 민물이 유입되는 기수역의 모래펄갯벌을 선호하는 꽤 까다로운 생태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동진‧만경 두 강의 기수역은 백합의 최적의 서식지였던 것이다.
계화도가 섬이었을 때, 농토가 없어 오로지 갯벌에만 의지해 살아야 했던 계화도사람들은 한 물때에는 갯벌에 나가 백합을 잡아 그것을 이고지고 부안까지 걸어 나와 곡식으로 바꿔가지고, 다음 물때에 계화도로 돌아갔다. 그때를 계화도 양지마을 이복순(2003년 당시 78세) 할머니는 이렇게 증언한다.
"저 갯바닥 하나에 의지해서 살았지, 저 갯바닥이 우리 새끼들 8남매 다 키웠어. 그때는 여그가 섬이라 장사가 안 들어 와. 갯일 해갖고 얼른 집에 가서 아뜰 밥 챙겨주고는 그길로 부안으로 나가..., 백합을 고개껏 이고 부안에 가면 쌀보리 한 되나 받어갖고 저녁 늦게나 집에 와. 그러고들 살았어."
백합을 고개껏 이었다면 10~15kg 정도는 될 것이고, 요즈음 시세로 치면 쌀 40kg의 가치는 더 될 터인데 그 시절에는 겨우 쌀보리 한 됫박과 바꾸기 위해 하루를 꼬박 노동하였다니 짠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옛날이야기이다.
조개 중의 조개 '백합'
그래도 백합은 계화도사람들의 삶을 지탱시켜준 고마운 생물이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에도 갯벌에는 백합이 무수히 묻혀 있어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갯벌에서 대학생 난다'는 말도 있듯이, 그들은 이 검은 땅 갯벌을 터전 삼아 백합 잡아 자식들 공부시키고, 혼사도 시키며 질척이는 삶을 이어왔다. 계화도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갯벌은 곧 저금통장이여. 언제라도 그곳에만 가면 돈을 벌어 올 수 있응게, 농사를 지어서는 그 1/10의 수익도 못 올리지...'
새만금 물길이 막히기 전, 계화도에서 하루 출하하는 백합의 양은 15t이 넘었다. 여성어민들이 한나절 나가면 그 당시 금으로 10∼15만원 벌이를 했을 정도로 백합은 흔했고, 갯벌은 그들에게 해고당할 걱정 없는 평생직장이었다.
백합은 부안을 대표하는 맛이기도 했다. 먼저 크고 잘 생긴 외모부터가 마음을 사로잡는 조개 중의 조개이다. 갈색의 표면은 코우팅이라도 한 것처럼 매끈한데다 ∧∨의 화려한 무늬는 백이면 백 다 다르다. 그래서 '백합'이라는 이름이 얻었다고 한다.
백합은 조개류 중에서는 몸집이 큰 편에 속하는 놈으로 어른 주먹만 하게 자란다. 그러나 어린 아이 주먹만 한 중간 크기가 먹기에는 더 좋다. 회로, 탕으로, 죽으로, 구이로, 찜으로 요리해 먹는데 맛과 향이 아주 뛰어나다. 또한 백합에는 철분, 칼슘, 핵산, 타우린 등 40여 가지의 필수 아미노산이 들어 있어 영양 면에서도 으뜸이다. 예부터 간질환, 특히 황달에 좋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합은 입을 꽉 다문 채 겨울철에는 한 달이 지나도 죽지 않고 오래 산다. 부안사람들이 백합을 '생합'이라 부르는 것도 이렇게 오래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합이 입을 벌리고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래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백합이 입을 벌리지 못하도록 문지방에 놔두고 들며나며 밟고 다녔다. 이렇게 밟아 자극을 줄 때마다 백합은 더욱 움츠리기 때문에 수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백합은 꼭 새만금(부안의 계화도갯벌이나 김제의 거전갯벌)에서만 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서해와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난다. 그러나 새만금에서 나는 백합이 질도 좋고, 양도 우리나라 전체의 약 70%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민물이 유입되는 하구역의 모래펄갯벌을 선호하는 백합의 생태적 특성 때문이다. 그런데 전국 대부분의 강들의 하구가 둑으로 막혀 버리다보니 백합의 서식지는 극히 좁아졌다. 하구 둑으로 막히지 않아 강다웠던 동진‧만경 두 강의 기수역인 부안의 계화도와 김제의 거전갯벌에 주로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계화도 '백합'을 기억한다
'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새만금 끝막이 공사 달포 전쯤, 계화도갯벌 들머리에서 고군산군도 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갯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계화도의 한 여성어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저는 요즈음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꿈을 자주 꾸어요. 바닷물이 저 아래에 머문 채 해안선까지 밀고오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꿈에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요. 어쩔 줄을 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꿈을 깨곤 해요."
그런데 그러한 경천동지 할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2006년 4월 21일 새만금 물길은 막히고 말았다. 물길이 막히자 지구가 생긴 이래 하루에 두 차례씩 어김없이 들고 나던 바닷물은 계화도 주민의 꿈에서처럼 더 이상 해안선까지 밀고 오지를 못했다. 그 좋던 갯벌은 이내 소금사막으로 변해갔고, 그 갯벌에 깃든 생명들은 요동치며 죽어갔다. 그리고 그 갯벌에 기대어 조상대대로 살아온 어민들은 삶터를 잃고 말았다.
새만금 물길이 막힌 지 13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뭇생명을 품었던 그 넉넉했던 갯벌은 민망하게도 잡초 밭으로 변해 있어 예전의 그 갯벌의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다.
가이없이 사라진 새만금의 뭇생명... 그중에 우리네 삶을 지탱해 주고, 입맛을 사로잡았던 백합... 우리가 꼭 기억해두어야 할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