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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인종적 차이를 넘어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마주하기
그린북
김경태(2019-04-16 13:01:42)



1962년 뉴욕, 일하던 클럽이 내부수리에 들어가 백수가 된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유명 피아니스트이자 박사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의 제안으로, 두 달 간 진행되는 미국 남부 지방 투어 공연을 위한 그의 운전기사이자 비서 역할을 맡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셜리에게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로의 여행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만큼,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서 싸움꾼인 토니는 셜리가 모든 공연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보호막이다. 토니로서는 가족과 오래 떨어져 지내야한다는 게 썩 내키지는 않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당장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 이처럼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만날 일 조차 없었을 두 사람은 동행을 넘어 서로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영화는 그런 시대 배경에도 불구하고 흑인과 백인의 정형화된 재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상류층인 셜리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천재 뮤지션으로 매사에 품위 있고 반듯하게 행동한다. 또한 그가 흑인일 뿐만 아니라 벽장 안에 갇혀 있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더 깊게 한다. 반면에 중산층인 토니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다혈질의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흑인 음악을 즐겨들으며 사소한 규칙쯤은 아무렇지 않게 어긴다. 따라서 이들 간의 갈등은 주로 인종적 편견이 아니라 성격과 취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들에게 인종적 차이를 환기시키는 것은 외부의 시선이다. 밭을 갈던 흑인 농부들은 멈춰 선 채, 백인의 호위를 받는 정장 차림의 셜리를 한참동안 응시한다. 한편, 우연히 만난 토니의 친구들은 흑인 밑에서 일하는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어느 날, 차 안에서 토니와 다투던 셜리는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뛰쳐나와 그에게 소리친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뭐죠?" 이는 자신이 어떤 정체성으로도 소속감을 가질 수 없음에 대한, 즉 결핍된 정체성에 대한 한탄이다. 그것은 흑인이 차별 받는 시대에 대한 원망과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시대에 대한 불만, 그 이상의 존재론적 고민이다. 그 어느 쪽의 사회적 기준에도 부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던질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은 (피부색이 어떻든 간에) 본래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 불완전함을 채워줄 누군가를 찾아야한다. 셜리와 토니는 서로에게 차츰 동화되어 가면서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서로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그것은 서로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준다. 일례로, 토니는 능숙한 처세술로 육체적 위협이나 곤경에 처한 셜리를 여러 차례 구해준다. 셜리의 경우,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이용해 토니의 편지 쓰기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 오랜 운전으로 지친 그를 대신해 운전기사가 되어 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늦지 않도록 해준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단순히 인종 간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드라마로 단정 지을 수 없다. 또한 선한 백인이 위기에 빠진 흑인을 구원하는 드라마로 분류할 수도 없다. 그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에 인종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바른 설교의 한계, 혹은 그 교조적인 주장에 대한 반발 앞에서 인종을 잠시 내려놓고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집단 대 집단의 갈등은 그 구성원들을 동일한 정체성으로 묶어낸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단일한 집단 안에서도 개인들은 서로 다른 다양한 정체성의 결들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란, 멀찍이 서서 피부색깔로 서로를 구분하고 이해를 요구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존재이다.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다짐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많은 셜리와 또 수많은 토니가 서로의 삶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 부딪치고 화해할 때, 비로소 그 두 집단은 친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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