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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 | 특집 [환국 동학농민군 지도자 안장사업]
고이 잠드소서! 세기를 밝힌 꽃넋이여
이동혁·김하람(2019-07-17 10:40:15)



뜨거웠던 그날의 열망, 한 생애의 마지막 숨결을 저 하늘은 기억할까. 자그마치 125년만에 이뤄진 고인의 안장식 앞에선 따스한 햇볕도 맥을 추지 못했다.


6월 1일, 풍남문 앞은 분주하면서도 깊은 숙연함에 잠겨 있었다. 한 세기가 지나도록 쉴 곳을 찾지 못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드디어 영면에 드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뫼시게 됐다는 안도감과 너무 오랜 기다림을 드렸다는 송구함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먹먹한 가슴을 두드렸다. 100년 동안의 방치, 그리고 또 긴 23년의 기다림 끝에 비로소 이뤄진 안장식이었다.


1995년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한국동학당 수괴'라는 문구가 새겨진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06년 한국에서 일본으로 무단 반출돼 소홀히 방치되고 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었다. 한승헌 변호사를 상임이사로 한 유해봉환추진위원회를 꾸려 낯선 이국 땅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던 고인을 1996년 다시 모셔 왔지만, 안장할 곳을 찾지 못해 다시 어두운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서 23년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가세, 가세, 어여 나아가세."
오전 10시 전주 풍남문에서 시작된 꽃상여 행렬은 임실필봉농악보존회 양진성 회장의 상엿소리와 함께 싸전다리, 초록바위, 완산도서관을 거쳐 전주동학농민혁명 녹두관까지 이어졌다. 꽃상여를 바라보는 전주 시민 모두가 고인의 유족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하던 일도 전부 멈추고 모두가 한 마음, 한뜻으로 고인의 숭고한 넋을 기렸다.


싸전다리 앞에서 잠시 행진을 멈춘 행렬은 구성진 농악 장단을 연주하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발걸음에 명복을 기원했다. 이어 초록바위 앞에서 또 한 번 멈춰서 호남창의소 창의문과 패정개혁안을 낭독한 뒤 완산공원 내 전주동학농민혁명 녹두관 앞에서 해산했다.


상여가 도착한 완산칠봉 녹두관 앞 특설무대에서는 지도자의 넋을 달래는 진혼식이 이어졌다. 지난 1996년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발견한 일본 북해도대학 이노우에 명예교수와 당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이었던 한승헌 변호사가 참석해 고인에게 바치는 추모사를 낭독했다.


한 변호사는 "침략의 아픔과 수모, 죽임을 당하고도 다시 버려져 백골로 침략자의 땅에 들려간지 90년, 그 원한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었겠냐"며, "지난날의 침략을 반성하지 않은 채 아직도 온갖 망언과 작태를 되풀이하고 있는 침략의 전과자들에게 이제라도 역사의 교훈을 깨닫고 엄숙히 사죄할 것을 단호히 요구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노우에 명예교수는 "무명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구 일본 제국주의와 불굴의 의지가 쓰러질 때까지 싸웠던 지도자로서 일본인인 저도 사죄와 함께 한 인간으로서 존경심을 표한다. 부디 고국의 대지에서 편히 쉬시길 바란다"며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진혼식을 마친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은 전주동학농민혁명관 녹두관에 안장됨으로써 그 긴 여정을 끝내고 비로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영령이시어, 부디 안식을 누리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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