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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 | 특집 [오래된 오늘]
대장간의 화로는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대장간 이야기
이동혁(2019-08-14 15:04:27)



지금만큼 세상이 편해지기 전, 장날만 되면 날이 무뎌진 농기구를 벼리거나 손에 착 감기는 호미를 사기 위해 대장간 앞은 언제나 북새통을 이뤘다. 혹여 대장간이 없는 마을이더라도 떠돌이 대장장이가 각 집을 돌며 날을 벼려 주는 풍경이 그때는 참 낯익고 당연했더랬다.
하지만 무정한 세월 앞에선 누구도 변해 가는 세상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대장장이가 전통 방식으로 호미 하나를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한 시간, 같은 시간에 수십, 수백 자루를 찍어 내는 기계와의 경쟁에 지친 대장장이들은 하나둘 화로의 불을 꺼트리고 망치를 내려놓았다. 더 편하고 쉬운 것을 쫓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지만, 때로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 한편이 아련해지기도 한다. 그때 대장장이들이 내려놓은 것이 조부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다시 자신에게로 이어진 까마득한 시간의 기억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직하게 대장장이의 길을 걷고 있는 이가 있다. 무려 48년,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대장간을 지켜 온 박석진 씨(64)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려워 사회 진출을 고민하고 있을 때,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대장간에서 잠시 도와 준 인연이 어느새 그를 48년 동안 대장장이로 살아오게 했다.


땅, 땅, 따당!


장날을 맞은 장수시장의 아침, 시장으로 들어서는 입구께부터 달궈진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장 보러 나온 이들을 반갑게 맞는다. 다섯 평 남짓한 대장간 이곳저곳을 누비며 빨갛게 달아오른 쇠붙이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벼리는 박 씨의 손길이 여느 때처럼 분주하다. 찾는 손님도 각양각색, 무뎌진 날을 갈러 온 어머님부터 느슨해진 손잡이를 조이러 온 어르신까지 그야말로 해결사가 따로 없다.
진열대에 놓인 다양한 완성품들도 눈길을 끈다. 섬세하고 꼼꼼한 마감이 돋보이는 괭이와 호미, 낫, 곡괭이, 식칼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한껏 벼려진 날을 빛낸다. 하나하나 손에 쥐어도 보고, 들었다 놨다 무게를 재 보기도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손님들의 태가 과연, 하며 장인의 솜씨를 인정하는 듯하다.


"얼마여?" "아이구, 됐어요. 다음에 주고, 그냥 가요." "지난 번에도 안 받았는디, 오늘은 받어."


박 씨의 대장간에선 아주 빈번하게 품삯을 두고 이런 훈훈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원체 사람이 좋아 웬만한 일은 돈도 안 받고 무료로 해 주니, 이제는 박 씨의 주머니에 억지로 품삯을 넣어 주는 것이 일상이 됐다.
쉼 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풍광 속에서 몸은 더 편해졌지만, 이런 풍경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잃은 것 역시 적지 않음을 느낀다. 그것은 인심이란 이름의 구수함이고, 정이라는 이름의 푸근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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