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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 | 연재 [연재]
혼자 사나 홀로 살지 않는,
이 사람이 사는 법
이재규(2021-01-06 09:55:58)


이 사람이 사는 법


혼자 사나 

홀로 살지 않는,


지리산 시인 

박남준

이재규 • 사진 안봉주


하동군 악양 동매마을 박남준 시인의 집을 한나절 다녀왔다. 코로나 방역이 강화된 상황에서 휴게소 한 번 들르지 않고 겨울 섬진강의 풍광도 차창으로 대신한 길이었지만 시인을 만나기 위해 오가는 길 마음은 환했다.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매화 꽃잎 살아나는 따뜻한 차 한 잔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은 밥상이 떠오르기에 가만있어도 몸을 덥히는 온기 같은 것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최근 겨울 거리에 서 있던 사연의 전말 같은 것은 시시콜콜 묻지 않았다. 시인이 살아온 세월에 이미 그 답이 있을 것 같기에 그의 책을 되짚어 읽었다. 그가 얼마 전에 낸 시낭송 시디를 틀자 가만가만 흘러가는 강물소리처럼 그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사는 게 모두 당신과 관련된 일이며, 이렇게 숲과 강을 보며 생명이 차오르고 지고 하는 풍경 안에, 살아가는 것의 의미가 다 담겨있다고. 그러니 그냥 두라고. 어린 찻잎처럼 고요하고 그윽하게 살아가자고.


“그냥 둬요” _ 2020 겨울 거리에서 

지난 겨울 초입, 박남준 시인은 악양 집을 떠나 세종시 정부청사 기재부 앞과 광화문, 국회의사당 입구에서 내내 서 있었다. 청와대 앞도 갔다. 소식을 전하는 화면 자막에 ‘지리산산악열차반대대책위 대표’라는 직함이 눈에 들어왔다. 평생 무엇을 대표해본 적 없고 이름을 내세우길 저어하는 그가 기꺼이 대표 직을 맡은 것은 오래 깃들어온 지리산이 그에게 전해온 말 때문이다. 그의 시 <지리산이 당신에게>에서는 개발이라는 파괴 앞에 스스로 죽어버리길 결심하는 지리산이 나온다. “이 나라 모든 산이 강이 바다가 다 같이 목숨을 끊어버린다면 그때쯤이면 사람들이 뉘우칠까 그리워할까” 산과 강을 대신한 시인의 전언이 서늘했다. 박남준 시인은 팔색조와 정향나무와 지리터리풀과 반달가슴곰에 우리의 오늘과 내일, 모든 인연들이 있다고 썼다. 무슨 투쟁 이유를 더 묻겠는가. 집 앞 느티나무 한 그루 베어진 그루터기에도 막걸리 한 잔을 뿌리며 애도의 고사를 행하는 그에게 ‘하동 알프스’는 생명 가진 것들의 터전을 뒤집는 만행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고함을 치는 대신 수건 한 장을 펼쳐놓고 그 거리에서 매일 백팔배를 올렸다.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SNS를 꺼리는 그가 처음으로 페이스북 계정도 열었다.


                              (아직도 동안인 그의 머리칼에는 어느새흰눈이 앉았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을 급하게 가는지 몰라. 산은 천천히 가야 하는 건데. 꽃도 들여다보고 하늘도 올려다보고 새소리도 들으며 그렇게 쉬엄쉬엄 가야하는 건데. 이렇게 정신없이 왔다 가면 뭐가 남는 게 있다고. 그러니까 지리산에도 케이블카 놓으라고 요란을 떨지. 어디든 가보는 건 중요하지 않네. 가서 뭘 보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하지. 안 그런가?”  (2009 손민호 인터뷰)


지금의 사태를 마치 예감한 듯 오래전 박남준 시인은 말을 그렇게 꺼내놓고 있다. 어쩌면 지리산이 그를 이곳 악양으로 불러들인 게 아닐까, 싶었다. 그가 악양에 온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은 2004년 봄 지리산생명평화탁발순례단의 일원이 되어 49일간 1,500리길을 걸으며 지리산 구석구석을 몸에 새기며 마음에 담는 행선(行禪)을 하게 된 인연도 지리산이 그에게 준 소임의 시작이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원재 (心遠齋) - 세상의 명리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고자 한 집주인의 작정처럼 박남준 시인의 집은 마을 끝에 고요하게 놓여있다)


박시인의 발화가 이곳저곳의 울림으로 이어지면서 12월 알프스 프로젝트는 일단 제동이 걸렸다. 박시인은 이제 ‘한걸음’ ‘상생’ 이런 말만 들어도 싫어졌다고 진저리를 쳤다. 세상의 모든 말을 무람없이 품는 시인에게 왜 그 좋은 말을 빼앗아 가는지 씁쓸하게 함께 웃었다. 



<하동 알프스 프로젝트>는 지리산에 호텔을 짓고,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로 연결하는 등 ‘세계 최고의 산악관광’을 내세운 자치단체 주도 개발사업이다. 하동군 화개, 악양, 청암 3개 면 일원에 총사업비 1650억 원(민자 1500억 원, 지방비 150억 원)을 들여 무가선열차 12km, 케이블카 3.6km, 모노레일 2.2km 등을 설치하고 리조트형 호텔 등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2019년 '규제특례 시범사례'에 선정됐고 2020년 이해관계자 갈등을 조율해 방향을 정하는 '한걸음 모델'이 되어 상생조정기구에서 수차례 회의와 현지조사 등을 거쳐 논의가 진행된 결과, 정부 차원에서는 이 프로젝트에 필요한 법 개정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하동군에 주민여론 수렴 과정을 다시 거치도록 주문했다. 하동 알프스를 ‘지리산으로 간 4대강 사업’으로 규정하고 다양한 반대활동을 펼쳐온 ‘지리산산악열차반대대책위원회’는 일단 한 단계 저지를 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이후 하동군에서 법 개정 없이도 가능한 산악열차, 케이블카, 모노레일 등 설치 사업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긴장을 놓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30년 산자락의 시간과 시인의 밥상 

박남준 시인의 악양 집으로 가는 길, 화개와 하동을 지날 때 섬진강로 구간에는 차선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꽃필 때 잠깐 밀리는 것이 불편하다고 이렇게 자꾸 넓히고 깎고, 그게 좋은 일일까.” 차창 밖의 겨울 섬진강을 보면서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남원, 구례 지나서 하동 가는 길, 잔물결 여울지는 섬진강을 따라 바람결의 춤을 추는 지리산의 남쪽 산자락 악양으로” 이사를 온 박시인이 짐을 부려 두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당 한쪽을 일궈 씨앗을 뿌린 일이었다. 그리고 나무를 심었다. 2003년 9월의 일이니 벌써 17년의 세월이다. 도연명의 시에서 ‘심원재’(心遠齋)란 당호를 끌어오며 세상의 명리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고자 한 집주인의 작정처럼 박남준 시인의 집은 마을 끝에 고요하게 놓여있다. 처마 끝에 잘 깎은 감들이 줄에 매달려 겨울바람을 쐬고 있다.  


        (시인의 밥상 밥상 위의 음식들은 모두 그가 키우고 거둬들인 것들이다. 소박하지만 '찐맛'인 시인의 밥상이다)


오래 이어진 농성시위 때문에 꽤 몸이 축났을 텐데도 박남준 시인은 전주에서 찾아온 일행에게 굴밥 한상을 뚝딱 멋지게 차려 내어준다. 공지영 작가가 쓴 <시인의 밥상>에는 박남준 시인의 계절 따라 한상차림 레시피가 선연한 색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어 입맛만 다시게 했는데, 시인의 밥상 실물을 받고 보니 절로 환성이 터진다. 밥상 위의 음식들은 모두 그가 키우고 거둬들인 것들이다. 소박하지만 요즘 말로 ‘찐眞맛’인 밥상 뒤를 따라 지리산자락 바람에 말린 곶감과 차가 나온다. 소반에 푸른 잎과 가을꽃 봉오리 하나가 얹혀있다. 후식에도 품격이 있는 성찬이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손님을 대하는 소소한 마음이 살아있는 이 밥상이야말로 박남준 시인을 닮았다.


밥과 차를 마시는 공간 바로 옆 작은 방이 그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는 거처다. 모악산방에 들 때 배낭 하나에 책과 옷가지를 담은 가방 뿐이었는데 악양으로 올 때에는 책과 음반이 태반 1톤 트럭을 채웠다고 한다. 그 뒤 지리산의 시간이 더해져 수북하게 쌓여있는 시디와 책이야말로 자연 풍광과 함께 그의 온전한 세계다. 



내 그리운 것들은 모두 전주에 있다

전주 일행이 모두 그와 30년 넘게 인연을 쌓은 지기인지라 차를 거듭 비워가며 이야기는 세월을 종횡하며 이어졌다. 모악산자락 무당집(박시인이 ‘모악산방’이라 이름붙인)에서 보낸 13년의 시간 전에 그의 들끓는 젊은 날이 먼저 불려 나왔다. 전남 영광 법성포 태생인 그는 전주에서 대학과 청년시절을 보내며 질풍노도의 시대를 견뎠다. 지역 민주화운동에 관여하며 농촌 현장을 준비하던 시기에 그는 얼마나 여리고 풋풋한 순정의 문학청년이었던가. 그런 그가 KBS 공채 1기 작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 길을 내처 갔으면 잘 나가는 드라마, 다큐 작가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았지도 모를 그는 1991년 막 문을 연 우진문화공간의 기획실장 제안에 KBS에 사표를 던지고 귀향했다. 버스와 지하철, 택시를 몇 번을 갈아타고 출근해야 하는 서울살이의 지겨움도 있었겠지만 어떤 정형화된 틀에 자신을 가두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정이 자신에게 속삭였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렇게 돌아온 전주에서 우진을 1년만에, 민중미술 전시를 활발하게 기획하던 온다라미술관의 운영을 책임지던 자리도 잠깐, 그는 모악산방에 들어가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자유인의 삶을 13년 살았다. 그리고 마흔 중반이 되어, 정해진 인연처럼 지리산 악양에 깃들어 지낸지 17년. 아직도 동안인 그의 머리칼에는 흰눈이 앉았다.   



이 시간 동안 거둔 그의 시와 산문들은 점묘화처럼 전체가 하나의 군락을 이룬다. 쓸쓸함이 정서의 주조를 이루되 마냥 처져있지 않고 세상으로 열려있는 푸른 빛이다. 산색을 닮았다. 


“내 그리운 것들은 모두 전주에 있다.”


박남준 시인이 <이사, 악양>이란 시에서 “나 또한 북쪽 그리운 창을 향해 머리를 눕히고”라고 썼던 그 북쪽의 실체는 전주라고 고백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리워하기 위해서 멀리 가버린 사람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그를 지리산 시인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것은 너무 작은 울타리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을 지키는 것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두려는 생명 자체의 본성 자체라고 믿는 이에게 세계는 모두 한 자리, 같은 장소이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늘 혼자를 감내하는 시간이었지만 홀로의 삶은 아니었다. 나무에게 말을 걸고, 바닥에 엎드려 다른 이의 말과 처지에 온 귀를 세우는 함께의 삶이었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개울공사 포크레인에 쓸려간 어린 꽃나무들을 애도하며 그는 “그대로 두라.” 혼잣말을 하며 나무들을 다시 심었다고 했다. 그대로 두라. 주문처럼 그 말을 되새기며 섬진강을 되짚어 왔다. 


         (곶감 소반에 푸른 잎과 가을꽃 봉오리 하나가 엊혀있다. 시인의 밥상은, 후식에도 품격이 있는 성찬이다)





안봉주  30여 년 동안 일간지 사진기자로 활동해왔다. 전주천에 사는 수달을 가장 먼저 세상에 알린 이로 고집스럽게 생태분야에 천착해왔으며, 현재 사단법인 JB영상문화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재규  우석대학교 교수. 작가. 시민단체, 방송, 국회, 남북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다. 젊은날에 시와 소설을 썼으나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 정치비평 등 주로 정책 분야의 글만을 한동안 썼다. 2013년에 상하이에 1년 체류하면서 30년 만에 다시 문학의 길로 돌아왔다. <시와 소설로 읽는 한국현대사> <사람의 숲에서 길을 묻다> 등의 책을 냈다. 

“”안의 문장은 모두 박남준 시인의 글과 말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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