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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7 | 기획 [도시의 유산]
부안의 당산제와 풍어제
사라져가던 전통민속놀이, 다시 일으켜 세우다
김하람, 신동하(2022-07-11 15:51:43)



▲ 사진제공, 국립무형유산원



사라져가던 전통민속놀이, 다시 일으켜 세우다




부안의 곳곳에서는 지금도 굿판이 열린다. 변산면에서는 당산제와 풍어제가 마을마다 성대하게 개최되며, 수성당제도 열린다. 격포리 격상마을에서 열리는 당산제는 1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대항리 합구마을, 지서리 지서2마을과 지동마을에서도 당산제를 이어오고 있으며, 도청리 모항마을과 격포리 궁항 마을에서는 자체적으로 풍어제를 지내고 있다. 이렇듯 농촌의 굿인 당산제와 어촌의 굿인 풍어제가 함께 나타나는 것은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어장을 가지고 있는 ‘부안’만의 특성이다. 부안의 유산이 된 당산제와 풍어제 중에서도 ‘동문안 당산제’와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 ‘위도 띠뱃 놀이’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살아남은 ‘굿’의 역사성과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풍년을 기원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힘의 원천

최초의 문학, 최초의 춤, 최초의 음악



▲ 사진제공, 국립무형유산원



신선한 소리를 찾던 MZ세대들이 국악과 양악을 적절히 섞는 '크로스 오버' 장르에 주목하면서 국악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날치 밴드'는 판소리와 모던 록을 결합하여 조선팝 열풍을 일으켰으며, 전자음악 듀오 '해파리'는 종묘제례악에 테크노를 섞어 흥겨운 댄스 음악을 만들어냈다. '수궁가'를 떼창하고,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테크노를 추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국악은 모두 '굿'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굿이란 무속의 종교 제의로 무당이 음식을 차려 놓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귀신에게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하여 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따라서 모든 굿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제로 하여, 신에게 재앙을 없애고 수명을 늘리고 복을 증진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것의 내면에는 개인이 홀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적 어려움을 초월적인 힘을 빌려 타파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를 외면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술성을 가진다. 


이때, 신은 인간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을 즐겁게 해야 한다. 사람들은 무속의 신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밌는 것을 보면 기뻐한다고 생각했고, 춤과 재담과 같은 오락에 목적을 둔 것들이 추가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각각 무용과 문학으로 발전한다.


굿은 소외된 사람들의 것이다. 과거 조선 시대에는 팔천이란 단어가 있었다. 여덟 가지의 천한 직업이란 의미로 노비, 광대, 무당, 백정, 승려, 기생, 상여꾼, 공장이 이에 해당한다. 신분제가 철폐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무속은 근대성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멸시당했다. 그러나 굿은 가장 깊은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미천해서 받아줄 곳 없는 잡귀들마저 베풀어 먹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것들을 지켜온 굿. 버리고 버려지는 것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모든 것을 보듬고 축원하는 굿은 더욱 특별하다.




화려한 오방색 속 숨겨진 슬픈 역사


부안지역의 당산제는 17세기에서 18세기에 크게 성행했다. 이때 조선은 끊이지 않는 자연재해와 전염병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1670년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의 모티프가 된 경신 대기근까지 일어난다. 이는 전라도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전라 감영(監營)에 가까운 고을에서 얼어 죽은 수가 무려 1백 90명이나 되고, 갓난아이를 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흉년이라 하여 용서해 주지 않는데 한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어서 그 수를 셀 수 없고, 돌림병이 또 치열하여 죽은 자가 이미 6백 7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현종 개수실록 12년 1월 11일) 

 

시간이 지나고 숙종 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형국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숙종은 25년 전염병을 구제할 방안과 백성을 진휼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비망기를 내린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근시(近侍)를 중외(中外)에 나누어 보내어 여단(厲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고, 측은하게 여기는 뜻을 보임으로써 조금이나마 원통한 마음을 위로해 주도록 하라.’라는 구절이다. 


이때 여단은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에게 제사를 베풀던 곳이다. 숙종은 무속의 힘을 빌려 상황을 돌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시기 부안 읍내에는 많은 당산이 세워졌다. 부안 군청 근처에 있는 ‘서문안 당산’도 그러하다. 당산 주변에는 ‘벅수’라고 불리는 장승도 함께 있는데, 전염병을 막을 길이 없자 액막이용으로 세워졌다고. 이들은 우리 땅에서 최초로 명문이 새겨진 벅수이기도 하다. 완주 봉동의 당산나무 앞 선정비나 정읍의 원백암 마을에서 당산으로 모시는 남근석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때 그 굿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동문안 당산제


당산제에는 과학 시대 이전의 인류가 어떻게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했는지에 관한 해답이 있다. 이는 나아가 인류 문명의 원형이 되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당산제는 산업화 및 도시화의 영향으로 그 명맥이 단절되는 중이다. 그중 가장 안타까운 사례는 ‘동문안 당산제’다.


“그냥 돌오리만 저 위에 올려놓으면 되는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대보름마다 당산에 용줄을 감으며 굿을 할 것이고, 당산은 지난 300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부안을 지켜왔듯 앞으로도 늘 그럴 것 아니여.”


한 일간지에서 진행했던 동중 마을 주민의 인터뷰 중 일부이다. ‘동문안 당산제’는 숙종 때 세워진 돌오리 솟대, 그리고 근처에 있는 당산목과 당산 할아버지•할머니 장승에게 제를 올리던 행사이다. 그러나 2003년, 당산의 돌오리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돌오리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큰일을 한 건 동문안 당산제를 진행하던 부안 동중 마을의 주민들이다. 할머니처럼 따르던 돌오리를 다시 모시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민들은 다시 똘똘 뭉쳤다. 2015년의 어느 날 동중 마을 주민들과 이장 장대현 씨는 돌오리가 경기도의 모 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함께 군청을 찾아 돌오리의 생김새를 증언하여 문화재 반환에 힘썼다.


주민들의 완고한 의지와 인내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돌오리는 온전한 형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돌오리는 국가민속문화재이기 때문에 동중마을이나 부안군의 관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화재청의 허락과 작업과정을 따라야만 했다. 돌오리는 방부제 처리 후 기둥 끝에 접착제로 고정되었다. 당산제를 지내는 과정(당산에 옷 입히기)에서 돌오리를 들었다가 놓아야 하는데, 이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주민들의 완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여러 악재가 겹쳐 단절된 경우인 만큼 더욱 안타깝다.



▲ 사진출처, 내소사




민과 관이 협력하여 새로운 문화로 

-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


다양한 분야의 관계자들이 협동하여 영영 끊길 뻔한 당산제를 복원한 경우도 있다.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가 그러하다. 석포리는 용동, 입암, 원암, 석포 1구와 2구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내소사가 위치해 있다. 당산으로는 내소사 안에 있는 1,000년령 나무인 할머니 당산과 내소사 정문 앞에 있는 700년령 나무인 할아버지 당산을 모신다. 이에 따라 할머니 당산은 불교식 제례로, 할아버지 당산은 유교식 제례로 지낸다는 특이한 전통이 있다.


원래는 정월 대보름의 전날 오후, 내소사에서 진행되는 당산제가 먼저 열리고, 정월 대보름에 각 마을에서 주관하는 당산제가 열리는 형식이었다. 내소사 당산제가 1980년대 후반 여러 상황에 의해서 사찰에서 전승되던 당산제가 축소되었고, 1990년 이후에는 민간주도로 할아버지 당산에서만 전승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주민들의 꾸준한 요구와 당시 내소사 주지 스님이었던 진학 스님의 노력에 힘입어 2009년 사찰이 다시 참여하게 되었고, 그 전통을 재정립하고 있다. 이에 변산반도국립공원이 힘을 보탰다. 변산반도국립공원은 지역주민지원사업에 따른 당산성역화사업을 통하여 당산의 제단과 주변 도로를 정비해주었다. 당산제를 위한 쾌적한 주변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는 사라져 가던 전통이 회복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앞으로도 이를 이어간다면 다른 당산제들뿐만 아니라 사라지고 있는 전통문화의 전승적 측면에서도 좋은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산제에는 나 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 전체가 잘 먹고 잘 살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다. 이는 매년 정월 만들어지는 긴긴 새끼줄을 따라 전해져 여전히 부안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글 신동하 인턴






풍어와 안녕, 꼭 지켜야 할 소중한 전통



▲ 사진 출처, 국립무형유산원


만선을 알리는 오색기가 휘날리고, 배 위에서는 흥겨운 민요와 장단이 흐른다. 이윽고 모선에서 끊어낸 띠배는 마을의 모든 재액을 싣고 깊은 바닷속으로 서서히 잠긴다. 풍어와 안녕을 기원한 위도띠뱃놀이. 이제는 종교적 의미와 마을 단합의 의미를 넘어 지역을 상징하는 소중한 유산이 됐다. 



칠산 앞바다 조기 잡세


띠뱃놀이의 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부안 격포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제사 유물이 출토된 것을 바탕으로 삼국시대부터 행해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위도띠뱃놀이는 부안군 위도면 대리마을에 내려오는 마을굿이다. 본래 대리마을의 제사 드리는 당집인 ‘원당’을 넣어 대리원당제나 대리원당굿으로도 불렸으나, 제의 마지막에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띠뱃놀이라고 부르게 됐다.


지난 2월 고창농악을 주제로 한 문화저널의 기획 기사를 참고하면 지역에서 큰 굿을 벌인다는 것은 그 지역이 부유하다는 뜻이다. 위도 앞바다는 조기잡이로 유명한 칠산어장(전라남도 영광군 안마도 인근에서부터 송이도, 낙월도, 칠산도와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과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인근에 이르는 해역)의 중심에 속해 있어 조기는 물론, 삼치, 박대, 갈치, 전어 등 각종 생선이 잡히는 풍요로운 바다였다. 그렇지만 바다는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위험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따라서 바다에 나갈 때 풍어와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안녕을 기원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대리마을에 전해져오는 <원당중수기(願堂重修記)>(1900)에 따르면 칠산어장을 지나는 어선들이 원당을 찾아가 제의를 지내거나 당집이 보이는 곳에 배를 멈추고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른 흐름에 띠뱃놀이 역시 휩쓸리게 된다. 칠산어장에 물고기들이 줄어들면서 조기잡이가 쇠퇴했고, 자연스럽게 굿도 함께 시들해졌다. 전통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띠뱃놀이는 그 맥이 잠시 끊기기도 했다. 다행히 이도곤이라는 마을 이장이 다시 주민들을 단합시키고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띠뱃놀이를 부활시켰다고 전해진다. 띠뱃놀이는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용왕님전에 빌어보세



▲ 사진 출처, 문화재청



띠뱃놀이는 모임굿•마당굿 - 동편당산제•원당오르기 제물차림 - 독축과 원당굿 - 띠배와 제웅만들기- 주산돌기 - 용왕굿 - 띠배띄우기 – 대동놀이의 과정을 거친다. 


‘놀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본래부터 제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만큼 굿으로 시작된다. 무녀와 화주가 앞장서면 풍물패가 행렬을 이루어 당산제를 올리고, 산 정상의 원당에 올라 제물을 진설한 뒤 원당굿을 진행한다. 그 사이 원당에 올라가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띠풀과 짚, 싸리나무 등을 함께 엮어 길이 3m, 폭 2m 정도의 크기의 띠배와 띠배 안에 넣을 제웅(허수아비)을 만든다. 띠배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2시간 정도로 띠배와 제웅이 거의 완성될 즈음 원당에 오른 행렬도 주산돌기를 하며 다시 마을로 내려온다. 띠배가 완성되면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벌인다. 용왕굿은 여성이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용왕제가 끝나면 밥과 콩, 뜸부기(해조류)를 골고루 섞어 용왕밥을 만들어 바다에 던진다. 바다에 떠도는 영혼에게 음식을 나눠준다는 의미다. 굿을 마치면 띠배 안에 마을의 재액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제웅을 싣는다. 바닷물이 썰물로 바뀌면 띠배를 모선에 달아 바다로 이끌고 나간다. 모선에는 민요(소리)를 매길 앞소리꾼과 풍물패들이 탄다. 마을에서는 바다로 떠나는 배를 환송하고, 모선에 탄 소리꾼과 풍물패는 민요를 부르며 흥을 돋운다. 마을로부터 멀리 벗어나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면 모선과 띠배를 연결한 줄을 끊는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띠배는 망망대해를 흐르다 점점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마을의 모든 재액을 실은 띠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며 재액도 함께 가져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띠배 띄우기 과정이 끝나 마을로 돌아오면 함께 어우러져 여흥을 푸는 대동놀이로 마친다.



띠뱃놀이와 심청전


띠배는 일반 어선과 비슷하게 만드는데, 돛대도 세우고 키와 닻도 만들며, 오색기도 건다. 오색기는 만선을 알리는 깃발로 풍어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는다. 배 안에는 만선, 평안, 행복 등이 적힌 소원문을 붙이고 돈이나 각종 음식도 넣는다. 짚으로 만든 제웅(허수아비)도 함께 태우는데, 띠배의 선원들이다. 동서남북의 방위신과 중앙신을 뜻하기도 해서 다섯 개나 그 이상의 제웅을 만든다. 제웅은 마을의 재액을 대신 맡는 역할이다. 



▲ 사진출처, 문화재청


배에 실은 재물을 바다에 빠뜨려 용왕에게 바치는 행위. 어딘가 익숙한 내용이다. 바로 심청전이다. 위도 근처에는 물살이 험하기로 유명한 임수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이 임수도 근처 해역이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라는 설이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바다에 재물을 바치는 행위는 곳곳에 있기 때문에 근거로서는 부족하지만, 띠뱃놀이와 심청전을 함께 떠올리며 거친 바다에서도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한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전통문화의 전승 


현재 위도 띠뱃놀이의 보유자는 1995년에 지정된 김상원 씨, 2007년에 지정된 이종순 씨 둘이다. 띠뱃놀이의 전수와 보존에는 위도띠뱃놀이보존회가 힘쓰고 있지만, 다른 전통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전승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령화 문제와 지원 문제다. 보유자에게 약간의 지원이 있으나, 보존회는 별도의 지원을 받지 못해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수자들 모두 대리마을 사람들인데, 이들은 낮에는 생계를 위해 바다에 나가고 밤에는 교육을 받는 수고를 감수하나 아무런 지원이 없다.


“저희 마을에서는 고유하게 내려오는 전통이다 보니 소중하게 생각하고, 꼭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다만 노령화로 이어갈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 큽니다. 예전에는 마을의 행사였지만, 이제는 위도, 부안을 대표하는 행사가 된 만큼 지역에서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기동 위도띠뱃놀이 보존회장)


글 김하람 기자






지역의 설화, 거리를 춤추게 하다

거리축제 연출가 오해룡 대표 인터뷰





거대한 인형을 앞세운 퍼레이드. 그 주변을 따라 펼쳐지는 한국무용에 사람들의 시선이 멈춘다. 부안의 개양할미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퍼레이드가 축제의 분위기를 더욱 달궜다. 이 퍼레이드의 연출자 포스댄스컴퍼니 오해룡 대표는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부안 예술회관 상주단체로 활동하며 부안 곳곳에 녹아있는 이야깃거리를 퍼레이드로 끌어냈다.



판타지 부안



“부안은 굉장히 판타지적인 소재를 많이 가진 곳이에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고령화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젊은 에너지가 부족하죠. 그래서 빨리 이런 소재들을 꺼내서 알리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16년 처음 부안에 가서 수성당 개양할미라는 거인 할머니에 대해서 듣게 됐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서 바로 떠오른 것은 디즈니의 ‘모아나’였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인 할머니가 부안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꺼내는 방식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는 대중이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퍼레이드’에서 찾았다. 실내 공연은 자발적으로 공연을 찾아와야 관람할 수 있지만, 퍼레이드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 그는 직접적으로 공연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퍼레이드의 형식을 선택했다. 


무용을 전공한 그는 미국 디즈니랜드에 가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어린아이들이 알라딘이 아라비아의 이야기이고, 백설공주도 유럽 그림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디즈니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다. 북유럽 신화임에도 불구하고 마블의 토르라는 캐릭터를 먼저 떠올린다. 그는 문화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됐다.


그는 죽막동 제사유적을 조사했을 때 개양할미가 칠산 앞바다 가장 깊은 곳에 발을 담갔을 대 버선 끝자락만 젖었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것. 그는 그 특성을 살려서 개양할미를 6m에 이르는 마리오네트 형식으로 거대하게 만들었다. 전통적인 소재에 음악, 무용, 연극을 복합적으로 활용해 만든 퍼레이드를 2017년 마실축제에서 선보였다.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개양할미 이야기를 꺼냈더니 부안 지역민들이 더 좋아하셨어요. 군수님도 감사하다고 말씀해주시고요. 지역에서 이런 작업들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개양할미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도깨비, 서해 수산물 등 부안과 관련된 소재를 발굴해 퍼레이드로 제작했으며, 다른 지역에도 이름을 알리게 됐다. 특히 태권도를 접목한 도깨비는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통과 현대가 융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는 알지만, 누군가는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농악단이나 보존회같이 전통을 유지, 보존하는 여러 단체들에는 그곳만의 가치가 있어요. 저의 역할은 우리 문화를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일단 먼저 확실하게 이미지를 알리면 자연스럽게 전통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국형 퍼레이드를 꿈꾸다





퍼레이드라는 문화가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름만 다를 뿐 우리도 퍼레이드와 유사한 거리 예술이 있다. 바로 농로 주변에서 펼쳐졌던 풍물패다. 신명 나는 장단에 화려한 퍼포먼스를 지닌 풍물패이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점점 사라져가는 문화다. 현대화되고 개인주의화된 시대에 맞춰서 어떻게 우리나라만의 퍼레이드를 만들지 고민 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퍼레이드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 가운데 있어요. 아직은 완전히 초기 단계예요. 현대화된 거리에서 우리의 전통을 가지고 재해석하고, 그다음에 다시 전통과 적절하게 콜라보가 되는 이런 지점을 많은 실험과 도전을 통해 찾아가는 과정 안에 있는 거죠.”


봉황이 알을 품은 곳이라는 전설을 가진 봉은마을, 청자, 내소사 당산, 띠뱃놀이까지 아직도 다루지 못한, 앞으로 다룰 소재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의 목표는 퍼레이드를 적어도 100m가 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민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지역민들이 퍼레이드 안에서 손만 흔들고 있어도 공연이 되게끔 만들기 위해 지금도 연출에 대한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고 있다.



세대 간의 통합이 지역문화 계승의 키워드





우리 것의 가치를 알아보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즐기고 후대로 이어내는 것. 누구나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여전히 전통은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전통과 현대라는 이름으로 이분화되어 점점 사장되고 있는 문화도 많다.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문화라도 이을 사람이 없어 앞으로 10-20년 후에도 유지가 될지 대부분의 전통 단체들의 고민이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도 폐쇄적으로 가면 한계에 닿는다. 예로부터 전통 놀이에는 젊음이 있었다. 줄다리기나 씨름, 고싸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젊은 세대가 힙합 문화에 지배되어 있다는 것과 함께 앞선 세대가 우리 문화의 가치에 대해 젊은 세대에 더 많이 어필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로 꼽았다. 


“예술과 지역성을 떠나서 젊은 세대에 대한 관심이 1번이지 않을까 해요. 또 그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의 소멸 위기와 전통의 소멸 문제는 어쩌면 같은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대 간의 단절과 갈등을 넘어 통합을 이루는 것.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 속에서 지역의 발전과 전통 계승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바른 길을 찾기 위한 고민과 새로운 시도들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란다.


글 김하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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