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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 | 연재 [윤지용의 튀르키예 기행]
해가 뜨는 땅 아나톨리아
윤지용 편집위원(2023-01-15 01:08:22)

윤지용의 튀르키예 기행 3

해가 뜨는 땅 아나톨리아


글·사진 윤지용 편집위원





역사보다 오래된 땅

튀르키예 영토의 97%를 차지하는 아나톨리아반도는 아시아대륙의 서쪽 끝이다. ‘반도(半島)’라는 말 그대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흑해,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고 서쪽으로는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발칸반도와 마주 보고 있다. 동남쪽으로는 인류 최초의 농경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메소포타미아 평원으로 연결된다. 아나톨리아의 어원은 ‘해가 뜨는 곳, 동방’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아나톨레’다. 서쪽 발칸반도에 있는 그리스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튀르키예어로는 ‘아나돌루(Anadolu)’다.


아나톨리아에서 발견된 고대 유적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차탈회위크였다. 9천 년 전 신석기시대의 거주지다. 그런데 얼마 후 더 오래된 유적이 발굴되었다. 1만2천 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괴베클리테페다. 발굴 결과 괴베클리테페는 거주시설이 아니고 일종의 종교시설로 밝혀졌다. 그 시기에 이미 ‘신앙’이나 ‘제의(祭儀)’가 존재했다는 것이니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됐을 것이다.


아나톨리아는 여러 제국들의 터전이었다. 수천 년 동안 많은 민족들과 문명들이 충돌하고 교류하고 융합했던 곳이다. 인류 최초로 철기문명인 히타이트제국이 기원전 17세기에 이곳에 터를 잡았고,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제국, 그리스인들의 헬레니즘제국, 로마제국이 뒤를 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아나톨리아를 ‘아시아’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을 통해 아시아라는 땅이 동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알게 됐다. 아시아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광대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리스인들은 아나톨리아를 아시아의 작은 일부라는 뜻으로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불렀다.



튀르키예의 수호자 가지안테프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 동지중해 일대를 제패하고 중부유럽까지 진출했던 오스만제국은 18세기 이후 서서히 기울었다.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부강해진 유럽 열강들에게 많은 영토를 내주고 쇠락해갔다. 마지막 결정타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오스만제국은 줄을 잘못 섰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동맹에 가담해서 패전국이 되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 승전국들의 강요로 1920년에 ‘세브르조약’이 맺어졌다. 오스만제국은 영토의 대부분을 잃고 아나톨리아 북부지역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아나톨리아반도의 서쪽은 그리스에게 뺏겼고 아나톨리아 동부와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민족들은 유럽 열강들의 후견으로 독립해나갔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인공인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실존 인물이었다. 영국군 정보장교였던 그가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베두인 유목민들의 독립을 도운 것은 그다지 숭고한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스만제국 시절에 아나톨리아의 남동부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튀르키예인들 이외에도 시리아계 아랍인,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제국의 체제 안에서 공존했었다. 이 중 아르메니아인들은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도였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합법화한 것이 서기 313년이고 국교로 삼은 것은 392년이었다. 아르메니아는 신생 종교인 기독교가 아직 로마제국의 탄압을 받고 있던 서기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아르메니아 남동부를 침공한 프랑스군은 오스만제국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기독교도인 아르메니아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프랑스군과 손잡고 튀르키예인들을 공격했다.


아나톨리아 남동부의 도시 가지안테프는 시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다. 본래 이름은 ‘안테프’였다. 아라비아반도 북부의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를 연결하는 요충지로서 유프라테스강 상류 근처에 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고 고대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기도 했다. 16세기에 3천 개가 넘는 상점들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묵었던 호텔도 옛날에 카라반사라이(실크로드 대상들의 숙소)였다고 한다.





안테프 일대에도 아랍인,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1920년 봄 프랑스군이 아르메니아인들과 함께 안테프를 공격했다. 안테프의 민병 300명이 11개월 동안 항전하면서 요새를 지켜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주도로 1923년에 수립된 튀르키예공화국 정부는 이 항전을 기려 안테프에 ‘가지(Gazi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도시 전체가 일종의 영웅 칭호를 받은 셈이다. 튀르키예 국기가 높이 펄럭이고 있는 가지안테프 요새에 들러 당시의 항전을 기리는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요새의 성벽에는 당시의 총탄 자국들이 선명했다.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

가지안테프는 우리나라 전주처럼 유네스코가 정한 ‘음식창의도시(City of Gastronomy)’이기도 하다. 다양한 튀르키예 전통 음식들과 디저트들이 이곳에서 발달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음식문화가 발달한 곳들은 대개 물산이 풍부하고 부유했던 곳들이다. 가지안테프도 그럴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지대에 속해 있었고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였으며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했던 지역이라서 음식문화가 발달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음식이 다양하고 싸고 맛있었다. 전세계의 여행자들이 ‘미식의 도시’라며 찾아오는 이유를 알 만했다.


가지안테프 시내에서 일행들이 전통시장을 구경하고 물건을 사는 동안 나는 근처의 식당에 앉아 있었다. 튀르키예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즐겨 마시는 홍차 ‘차이’를 마셨다. 찻잔을 비우기 무섭게 계속 다시 따라줘서 여러 잔을 마셨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계속 리필해주고 나서 여러 잔 값을 받으려는 건가?’ 의심하면서도 워낙 물가가 싼 곳이라서 개의치 않았다. 일행들이 쇼핑을 마치고 돌아왔길래 찻값을 내고 나오려고 했더니 주인이 극구 사양하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이곳은 찻집이 아니라 식당입니다. 차는 우리 식당을 찾은 손님에게 당연히 그냥 대접하는 것입니다.” 결국 찻값을 내는 데 실패했다.


미안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해서 일행들과 함께 그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착한 가격이었고 깔끔하고 푸짐했다. 식당 안쪽 벽에는 “If the world was a home, Gaziantep would be its kitchen.(이 세상이 집이라면 가지안테프는 그 집의 주방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가지안테프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사실 문법적으로는 틀린 표현이다. 가정법과거 문장에서는 ‘was’가 아니라 ‘were’가 맞다.)



제우그마의 집시 소녀

가지안테프 시내에 제우그마(Zeugma) 모자이크박물관이 있다. 유명 관광지들에 흔한 공예품전시관쯤으로 오해해서 하마터면 빼먹을 뻔했다. 가보기 잘했다. 가지안테프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이었다.


제우그마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으로 세워진 헬레니즘제국 시대의 고대 도시다. 이후 로마제국 시절까지 번성했다가 지진으로 무너져 잊혀졌다고 한다. 1960년대에 유프라테스강에 댐을 건설하던 중에 발굴되었다. 이 유적지의 주거지와 공공시설들의 잔해에서 수많은 모자이크들이 발견되었다. 작은 세라믹 타일 수만 조각을 이어붙여 만든 벽화들로 건물 내부의 벽면과 바닥을 장식했던 것이다. 주로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모티브로 한 벽화들인데,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화려한 색채를 유지하고 있다. 제우그마 모자이크 박물관은 이 유적에서 발굴된 모자이크 벽화들을 통째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는 대규모 박물관이다.





전세계의 많은 유적들이 그랬듯이 제우그마도 튀르키예 정부의 공식 발굴이 시작되기 전에 도굴꾼들이 먼저 다녀갔다. 도굴꾼들이 해외로 팔아넘긴 유물들 중에 ‘집시 소녀’ 모자이크가 있었다. 실제 집시 소녀를 묘사한 것은 아니고 누군가가 붙인 별명이다. 이 모자이크는 1960년대에 도굴되어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튀르키예 정부의 강력한 요구로 2018년에 반환되어 제우그마 박물관의 깊숙한 암실에 전시되고 있다. 이 모자이크가 제우그마를 대표하는 유물이 된 것은 신비로운 눈매 때문이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벽화 속 소녀의 시선이 관람자의 시선을 마주 본다고 한다. 나도 벽화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더니 약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미리 읽은 설명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가지안테프에서 더 동쪽으로 가서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이 살았다는 샨르우르파와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시리아 접경 도시 마르딘까지 가보고 싶었다. 그렇나 일정이 빠듯하기도 했고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여행위험지역’으로 선정한 곳에 일행들과 함께 가는 게 조심스러워서 포기했다. 아쉬움을 참고 지중해의 옛 항구도시 안탈리아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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