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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행복은 오는 게 아니라 다가가는 것이다
김민식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이휘현(2017-09-19 11:12:40)



할 일은 많은데, 읽어야 할 책 또한 왜 이리 많은가!
숙제처럼 쌓인 책들을 해치우고 나면 약간의 성취감과 함께 또 다시 조바심이 몰려든다. 한 권 격파하고 나와 보니 눈앞에 또 수 십 권의 책들이 빙벽처럼 쌓여있다. 영원한 목마름에 괴로워해야 하는 탄탈로스나 끊임없이 불바퀴를 굴려야 하는 익시온의 천형(天刑)처럼, 나는 책의 굴레 속에서 매번 갈증을 느낀다.
소로우의 200주기를 맞아 <월든>을 읽어야겠는데, 올해 20주기를 맞이한 김소진의 이른 죽음이 여러 소설과 에세이로 나를 부르고 있다. 지난 해 2월에 돌아가신 움베르토 에코 선생의 여러 책들이 1년 넘게 대기 중인 와중에, 공포 장르의 어르신 스티븐 킹 옹은 ‘빌 호지스’ 하드보일드 3부작의 완결편을 벌써 선보였다. 두 번째 시리즈를 읽은 게 겨우 한 달 전인데 발 빠르게 세 번째 시리즈가 시중에 깔렸다.
이 뿐인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고전들이 또 내 필독 목록에 빽빽하다.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 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헤밍웨이 등이 책장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그런데, 이 벅찬 독서 스케줄의 와중에 나는 며칠 전 엉뚱하게도 이런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설마 영어공부의 노하우를 설파하는 책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오산이다. 그런 책 맞다. 이 책은 오랜 시간 영어병에 시달려온 그 흔하디흔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한 줌의 위안과 또 한 줌 의지의 불꽃을 전하는, 정말 그렇고 그런 영어 처세서 중 하나다.
나도 오랜 시간 영어병에 시달려왔다. 중고교시절 다른 과목에 비하면 영어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유창한 영어는 여전히 언감생심이다. 일 년에 두어 번 영어완전정복을 외치며 마음을 다 잡아도 작심삼일로 그친 지 십 수 년째다. 나 같은 고질병 환자들에게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는 현실적인 처방전을 내놓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초회화 영어책 한 권을 한 번 통째로 외워보라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세기말까지 대유행했던 ‘암기 위주의 교육법’이 영어 정복에 주효하다는 게 저자의 현실적인 처방전이다.
이 주장의 바탕에는 저자의 인생 경험이 재밌게 포진되어있다. 유학 경험이 전무한 경상도 사나이는 어떻게 영어의 귀재가 되었는가. 경쾌한 필치로 선보이는 그의 인생 스토리는 이 단순 무식해 보이는 영어 교습법에 현실감을 주입한다. 나도 한 번 영어책 통째로 외워볼까? 그까이꺼~ 작심삼일일망정 오늘 당장 시작해보자!
그런데 사실, 내가 서점에서 이 책을 구해 읽은 이유는 단순히 영어 울렁증 때문은 아니었다. 몇 주 전 SNS에 떠도는 영상을 하나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세상을 바꾸는 15분>이라고 일명 ‘세바시’라 불리는 꽤 유명한 강연 프로그램이 그것이었다. 내가 본 영상에는 마른 몸매의 중년 남성이 나와 유쾌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고 있었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의 저자 김민식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대학시절 공학도였는데 영어에 흥미를 느껴 통역대학원에 진학했고, 영어공부를 위해 미국 드라마 <프렌즈> 시리즈를 열심히 시청하다가 시트콤의 매력에 빠져 방송국 PD가 된 사람. MBC의 히트작인 <뉴 논스톱>과 <내조의 여왕>을 연출한 김민식 PD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의 짧은 강연에서 내 기억에 남는 말을 하나 꼽자면 이것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입니다!”


행복에 관한 일상적인 해답 중 이보다 더 명쾌한 것이 있을까? 새삼스런 깨우침으로 약간의 전율이 전해져 왔다. 이 단순한 해법을 그 동안 나는 왜 찾지 못했던 것일까. 안타까움과 한심스러움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인생 뭐 별거 있나? 자그마한 행복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담다보면 제법 묵직한 행복감으로 포개지는 거지!!’.
못났다고 좌절하지 말고, 똑똑하지 않다고 주눅 들지 말자. 돈 없다고 고개 숙일 필요도 없다. 잘 돌아보면 나도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게 한 둘은 있지 않은가. 스무 살의 김민식은 영어공부로 행복을 찾았고, 이십대 중반에는 쟁쟁한 스펙의 통역대학원 동기들 사이에서 영어로 진검 승부가 버거워지자 MT 자리에서 춤을 추어 재간둥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십대 후반에는 “너 같은 날라리는 통역사 하지 말고 PD나 되라”는 동기들 덕담(?)에 <프렌즈> 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어보겠다며 방송사 예능국에 입사했다. 그렇게 행복의 부스러기를 주워가다가 그는 어느 새 나름 유명한 스타 연출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어학 공부를 즐기고, 대학시절 다짐했던 ‘1년에 한 번씩 무조건 해외여행’ 계획을 꼬박꼬박 실행하는 40대 후반의 김민식 PD.
그런데…, 그는 요즘도 정말 행복할까?
얼마 전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 언론시사회 현장 소식에서 김민식 PD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인터넷에 뜬 기사 속 사진에서 그는 울고 있었다. 힘겹게 암 투병 중인 동료직원 이용마(MBC 해직기자)를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흘린 것이다. 해직당한 동료 선후배들에게 너무 죄송하다고, 자신은 비겁하게 오늘도 방송국에서 몸 비비며 살아간다고, 그러니까 자신도 결국은 공범자라며 엉엉 울어댄 것이다. 그는 정말 요즘도 행복할까?
영화 <공범자들>은 이명박 정부 이후 처참하게 무너진 공영방송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다. 그리고 그 진통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 또한 소용돌이의 말석에서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을 휩쓸려 왔다. 다만 용기가 없어 오늘도 별다른 무리 없이 녹을 먹고 살아간다.
김민식 PD는 다르다. 사실 그는 지난 10년의 ‘공영방송 잔혹사’ 속 피해자 중 한 명이다. 2012년 MBC 파업 때 사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그 후 수 년 째 비(非)제작부서에서 유배 중이기 때문이다. 멋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고 싶어 입사한 회사에서, 저 위의 높으신 분들은 그에게 몇 년 째 일을 주지 않고 있다. 그런 그가 과연 지금 행복하달 수 있을까?
분명, 지금의 그는 별로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까지 던져버린 것 같지는 않다. 프로그램 연출에 대한 목마름은, SNS를 통한 대중과의 활발한 소통을 통해 어느 정도 해갈 중이니 말이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도 이러한 SNS 소통의 산물이다. 역시, 행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지런히 다가가야 하는 게 아닐까. 주변의 여러 가지 불행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외친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입니다!”라고.
김민식이라는 한 명의 자연인이 아득바득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행복이 차곡차곡 쌓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공범자라며 엉엉 우는 날들은 빨리 갔으면 좋겠다. 그런 후에 그가 만든 재밌는 로맨틱 코미디 신작을 보며 나도 조금은 더 행복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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