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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 | 연재 [수요포럼]
신화를 통해 인간을 배우다
신화 이야기
이동혁(2018-02-07 16:42:57)



풍성한 저녁 만찬과도 같았던...
그날 강연을 떠올리면, 어째서인지 무척 배가 불렀다는 생각이다. 참석한 당일, 위가 텅텅 빈 공복이었음에도 돌아갈 때까지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강연 내내 유자차 한 잔을 홀짝인 게 전부였는데도, 왠지 배가 불렀더랬다.
이상한 일도 다 있네. 그날 빈속에도 허기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김원익 한국그리스학연구소 부소장의 강연이 저녁 만찬처럼 풍성했기 때문일까?
이를테면, 파스타. 오징어며 새우, 모시조개, 홍합 등이 들어간 해물 파스타다. 재료는 아마 지중해 연안에서 갓 건져 올린 것들을 사용했을 테고, 그리스 본토의 올리브유로 풍미를 더했을 것이다. 또, 파스타를 담은 접시 테두리엔 월계수 잎이 양각으로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 먹음직스런 파스타를 저녁으로 대접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특이한 건 포크 대신 젓가락을 쥐어준 점일까. 손대기조차 아까운 지중해풍 파스타를 젓가락으로 후루룩 먹었다는 생각이다.
"그리스 신화를 공부할 때 가장 어려워들 하시는 게 바로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게 하루아침에 느는 게 아니에요. 꾸준히 매일 보면서 익히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거보다 더 중요한 건 이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겁니다. 사실 이름이 뭐가 중요해요. 이름이 10자다 그러면 2자 정도로 줄여서 불러도 돼요."
그저 한결같이 암기만을 강요하지 않아서, 낯선 포크보다 익숙한 젓가락을 쥐어줄 줄 아는 분이라서 더욱 즐거웠던 이번 수요포럼. '상표와 로고 속 신화 이야기'란 주제로 김원익 부소장의 그리스 신화 이야기에 빠져보았다.


아는 만큼 재미있어지는!
신화 전문가라는 소개에 "전문가는 아니고요, 연구가입니다"라는 겸손한 인사로 강연의 물꼬를 튼 김원익 부소장. 곧바로 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스 신화 같은 경우는 한 신에 대해서 세 가지 이름이 있어요. 그래서 더욱더 어려운데, 왜 이렇게 되었냐 하면, 그리스 신화가 로마 시대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그렇습니다. 내용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신들의 이름이 달라진 거죠. 그리고 로마식 이름에서 영어식 이름도 나오게 된 겁니다."
즉,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름은 그리스식, 로마식, 영어식,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는 것. 이처럼 세 가지 이름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가 생소한 사람은 그 이름들 각각을 다른 신으로 생각해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단다. 그래서 익숙지 않은 이름에 지레 겁을 먹고 신화 읽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고. 이에 대해 김원익 부소장은 아주 명쾌한 대답을 내놓는다.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름은 그냥 이름입니다. A, B, C로 생각하고 넘어가시고, 전체적인 내용이 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그가 말하는 전체적인 내용이란 각각의 신과 인물들이 가진 속성을 파악하라는 것. 예컨대, 책이나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라는 단어. 이 단어들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 각각 어원을 두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신들의 편에 서서 싸웠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생물을 창조하고 각각의 생물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역할을 맡았다. 매에게는 멀리 볼 수 있는 시력을, 말에게는 오래 달릴 수 있는 튼튼한 폐를 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각이 짧았던 동생 에피메테우스가 선물을 남발한 바람에 마지막 인간의 차례가 됐을 때는 줄 선물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인간을 불쌍히 여긴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아무튼 이 이야기에서 보여지는 에피메테우스의 속성은 나중에 생각하고 후회하는 사람이다. 에필로그가 소설이나 연극의 맺음 부분을 가리키니 나중이라는 의미에서 뜻이 통한다. 마찬가지로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속성을 가진 프로메테우스는 이야기의 시작을 의미하는 프롤로그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존 그레이의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아는가? 제목만이라면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남자는 화성에서,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고 표현했을까? 의문스럽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화성의 영어식 이름은 마즈(Mars)다. 마즈는 로마의 전쟁의 신 마르스의 영어식 발음이고, 그리스 신화에선 아레스라 불렸다. 전쟁을 관장했으니 강인한 남성성을 지녔을 테고, 때문에 화성에서 온 남자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반면에 금성은 영어로 비너스(Venus), 로마식으론 베누스다. 베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로,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미와 사랑의 여신이다. 이런 속성 덕분에 그레이는 여성을 금성인에 비유한 것이다. 게다가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심볼, ♂, ♀은 각각 아레스의 창과 아프로디테의 거울을 의미해 어느 모로 보나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그날 강연에서 줄곧 흥미로웠던 것이 바로 이런 부분들이다. 마치 오래 전에 풀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던, 딱히 맘에 담아둔 적도 없고 평소에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문제가 어느 날 갑자기 스르륵 풀려버린 기분. 아하, 맞아, 그랬어,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될 때의 쾌감. 딱딱, 절로 맞아떨어지는 아귀에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문득 깨닫는다. 알지 못해도 살아가는 데에 지장은 없지만, 알고 있으면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게 바로 교양이란 사실을.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던 스타벅스의 로고가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던 세이렌이었다든가, 네이버의 날개 달린 모자 로고가 신들의 전령이었던 헤르메스의 모자였다든가. 모르면 모르는 대로 괜찮지만, 알고 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사물에 색깔이 입혀진다. 아마도 교양이란 그런 것일 터다.



신화, 인간을 말하다
강연이 중반에 다다랐을 즈음, 그가 신화를 읽는 또 다른 방법을 소개했다. 바로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그려진 명화들을 통해 각 신화 속 인물들의 성격을 읽는 것. 여기에는 화가 자신의 해석도 곁들여져 있어, 그런 화가의 의도를 읽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승리자 에로스라는 그림이 있어요. 까라바조가 그린 그림인데요. 에로스한텐 날개가 달렸다는 특징이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은 움직이는 거니까. 그리고 활과 화살을 들고 다니는데, 여기저기 화살을 날리는 거예요. 그런데 화살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납 화살이구요, 하나는 황금 화살이에요. 황금 화살을 맞으면 처음 본 사람에게 불같은 사랑을 느끼고요, 납 화살을 맞으면 처음 본 사람에게 증오의 마음을 품어요. 아무튼 그림을 보면 악보도 있고, 투구도 있고, 무구도 있는데 전부 에로스의 발밑에 있어요. 결국 사랑 앞에서 그런 것들은 다 소용없다는 거죠."
어느 시대건 사랑의 가치는 위대한 법! 남녀의 불타는 사랑은 이미 만국공통의 진리나 다름없다. 간절한 그리움에 잠 못 이루던 밤이 누군들 없었을까. 어떤 소중한 것도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2순위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런 사랑조차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있어요.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K로 시작되는 크로노스(Kronos)고,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는 Ch입니다. 그래서 연대기(Chronicle)를 뜻하는 단어와 비슷하죠. 그림을 보면, 낫을 든 노인이 아이의 날개를 자르고 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에로스입니다. 노인은 시간의 신 크로노스이고요. 결국 무슨 얘기냐, 사랑도 시간만큼은 이길 수 없다, 그런 말입니다."
깜짝 놀랄 만큼 직관적인 그림이다. 시간 앞에서는 사랑도 식을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아키모프는 크로노스와 에로스의 속성을 이용해 절묘하게 표현했다. 작품을 그린 화가 이반 아키모프의 직관과 위트에 박수를! 김원익 부소장의 말처럼 아주 대단한 알레고리(은유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 양식)다.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들어보셨죠?" 강연 도중 모처럼 알고 있던 단어가 들려 저도 모르게 귀가 쫑긋 선다.
"천재 조각가였던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사람이었는데, 이 키프로스는 아프로디테가 태어나 두 번째로 온 섬이었기 때문에 아프로디테 신앙이 매우 강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여자들이 문란했다고도 하죠. 피그말리온은 여자를 멀리했는데, 거기에는 아마 문란했던 섬의 분위기도 한몫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기만의 이상적인 여자를 만들어야겠다, 결심하고 상아로 아주 아리따운 여인상을 만들어냈대요. 그리고 같이 지내는 사이 사랑에 빠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허망했겠어요.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 차디찬 조각상에 불과했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아프로디테 신전을 찾아가 기도를 합니다. 문자 그대로 피를 말리면서. 그리고 집에 와보니 이미 아프로디테 여신이 다녀간 뒤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된 상아처녀에게 갈라테이아란 이름을 주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동화 같은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아주 친숙한 메시지와 대면하기도 한다.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 너무나 당연해 잊고 지내기 십상이지만, 사실 2002년과 지난해 우리는 간절한 바람의 힘을 목격했다. 붉은 악마와 촛불의 기적. 사람의 바람은 때로 드라마보다 더욱 드라마 같은 기적을 일으키곤 한다.
김원익 부소장은 신화를 가리켜 '인간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인간의 문제와 인간 원형을 다룬 이야기라고. 신화라 부르지만, 사실 신화 속 신들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하며, 때론 실수도 한다. 그야말로 인간미가 넘친다.
 "결국 신화가 우리 행동과 의식의 원형이 아닐까,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돼서 책 이름도 <신화, 인간을 말하다>라 짓게 됐습니다."
신화를 통해 인간을 배우다. 우리가 신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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