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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정신승리에도 기술은 필요하다
강준만 『평온의 기술』
이휘현(2018-07-13 14:42:55)



내 고관절의 연골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나는 올해 1월에 알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한 쪽이 아니라 양쪽 다 망가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첨단의료기기에 입체적으로 찍힌 영상을 보니 그야말로 양쪽 연골이 모두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오랜 시간 무자비하게 혹사당해 온 내 양쪽 고관절 연골에 미안할 새도 없이 나는 곧바로 수술 준비에 착수했다.
양쪽을 동시에 치료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내려져 우선 더 망가져 있는 왼쪽 고관절 연골을 복구하기로 했다. 설 연휴를 앞두고 나는 큰 병원에 입원을 했고, 생애 처음으로 수술실이라는 곳에 실려 들어갔다.
전신마취에 3시간 남짓 소요되는 제법 큰 수술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좀 나았을까? 수술 후 몽롱한 상태로 회복실에 들어와서는 만 하루 동안 진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건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공격하는 모호한 고통이었다. 그렇게 비몽사몽의 정신상태로 버틴 처음 몇 시간 동안 나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무의식적인 고해성사를 허공을 향해 연신 해대었던 기억이 있다.
그 고해성사는 내 망가진 연골을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 몸 관리를 타박해대던 담당 의사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내 가족? 혹은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모르겠다. 다만 수술 후 두 달 반가량 병가를 내고 쉴 수 있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내 팍팍한 삶에 나의 망가진 연골이 선사한 일종의 안식년이 되어주었다.
입사 후 지난 13년 동안 제대로 된 ‘쉼’의 시공간이 없었던 나에게 그 두 달 반의 시간은 꿀 같은 휴식의 자리였던 것이다. ‘이래서 안식년이라는 게 존재하는 구나…’
4월 말 회사로 복귀할 즈음, 내 정신과 육체는 오랜만에 다시 차오른 의욕과 활기로 넘쳐 있었다. ‘좋아! 멋진 회사생활을 위하여!! 가즈아~~’
그리고 또 두 달이 흘렀다. 수술 전 보다 마음과 몸이 더 망가진 채 집에 들어와 드러누운 며칠 전 밤, 나는 허공을 향해 이렇게 뇌까리고 있었다.


“아… 사는 게 지옥이다. 귀신도 악마도 없는, 그야말로 사람 지옥…”


내 가여운 고관절 연골보다도 더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나는 귀갓길에 품에 안고 들어온 책 한 권을 펴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 좀 평온해질 수 있을까….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가 펴낸 <평온의 기술>이라는 책을 보고 의외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는 꽤 많다.
만 20년 동안 근거리에서 때로는 비교적 멀리 떨어져서 그의 삶의 궤적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나는 강준만 교수가 펴낸 이 일종의 ‘힐링 지침서’가 의외라기보다는 하나의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평온의 기술>이라는 신간 이전에도 그의 손끝을 통해 지난 몇 년 간 이미 ‘사람의 마음’을 분석하고 정리한 책들이 꾸준히 나왔다는 사실을 적어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준만’이라는 고유명사와 ‘평온’이라는 단어 사이의 연결고리가 그의 이름을 오랜 시간 알아온 사람들에게 쉽사리 작동하지 않는 건, 여전히 그를 ‘논객’으로 여기는 스테레오타입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스테레오타입이 온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 그는 여전히 ‘논객’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논객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1990년대 중후반에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언론, 서울대를 정점에 둔 학벌주의, 전라도 차별과 혐오라는 정서 등을 구체적인 타겟으로 삼았던 반면, 2000년대 중반 이후 그가 논객으로서 삼은 타겟은 좀 더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보수와 진보의 진영논리를 떠나 증오와 차별이라는 비교적 모호한 대상을 향한 일갈. 그것은 조선일보나 서울대 문제로 불 지폈던 명쾌한 논점으로부터의 급격한 전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구체적인 대상들로부터 좀 더 포괄적인 대상들을 품어 고민하게 된 일종의 ‘확장’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는 논객으로서의 강준만 교수가 쓴 <평온의 기술>을 읽는다.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부여잡고, 결국 정신승리에도 기술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우리 사회의 성역과 금기에 도전해 온 우리 시대 논객의 체험과 이론의 결과물에 의탁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평온의 핵심은 ‘나를 위한 삶’이다. 누구는 ‘나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남들의 눈치를 보고, 남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리치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갖거나 누리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남들을 의식하는 삶을 진정 ‘나를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나를 위한 것 같지만, 실은 ‘남을 위한 삶’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11쪽)


이 책은 다양한 지점에서 평온의 기술을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체념’ ‘둔감’ 등의 단어가 선입견이 걷힌 채 평온을 위한 테크닉으로 수용되고 있으며, ‘아모르 파티’ ‘그런 척 하기 원칙’ 등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고민되어 온 평온의 방법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 다양한 방법론의 밑바탕에는 ‘개인주의’가 깔려 있다는 게 독자로서 갖게 된 나의 판단이다. 물론 여기서의 개인주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기주의와는 결이 다른 것을 말한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이 어느 책에서 “태초에 개인이 있었다”라고 선언한 바 있듯이, 서구 근대의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개인’이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압축 근대화의 길을 달려왔던 우리나라에서는 이 개인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철학적 맥락은 빠진 채 하나의 양태로서만 받아들여진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그리고 개인주의가 나와 내 공동체 안에서 제대로 된 개념으로 체화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평온’이라는 목적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공동체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또 남의 평가로부터 상처받지 않고 오롯이 나를 위해서 사는 삶’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체념하자. 물질적 탐욕만 탐욕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 말을 듣겠다니, 그건 물질적 탐욕보다 더한 탐욕이다.(49쪽-50쪽)


부담되지 않은 분량이면서도 ‘평온한 삶을 위한 지침서’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은 당신의 마음을(혹은 나의 마음을) 잠시나마 위무해 주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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