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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 | 연재 [이하연의 귀촌이야기⑨]
이래저래 심란한 가을, 밤 주우러 갈까
이하연(2018-10-31 12:36:19)



밤이 제철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 동네는 밤 생산량이 많다. 옛날부터 전국에서 밤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라는데, 마케팅을 하지 않아서 유명세가 없을 뿐이다. 맛있기로 유명한 동글동글한 옥광밤이나 대호도 있고, 애기 주먹만한 알밤도 온 사방 산에 굴러다닌다. 며칠 전에는 이웃 동네 젊은 커플이 밤을 주워 와서 삶아다 주었는데, 암만 가까이 있어도 갖다 먹어야 먹는 거지 올해 첫 밤을 이제야 먹다니 뭘 하고 사는가 싶다.


귀농한 첫 해에는 몇 개월을 무수입으로 살았다. 동네 산책하고 일 없이 땅이나 파고 살다가 9월 밤 철에 농협에서 불러주어 꼬박 한 달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밤 선별 일을 하였다. 혼자서는 별 재미도 없었겠지만, 그때 같은 집 살던 친구들 셋과 함께라 매일 힘든 일하며 서로 동변상련 토닥토닥하는 재미가 있었다. 밤을 선별하는 일은 이렇다. 동네 여기저기 농가에서 밤을 주워다 자루에 담아 오면 밤 선별 기계에 우르르 쏟아 넣는다. 남자들은 40키로 쯤 되는 무거운 밤 자루는 들어서 옮기는 일을 주로 하고 여자들은 기계의 컨베이어를 지나가는 밤들을 매의 눈으로 살펴 닭 모이 먹듯 벌레 먹고 상하고 흠집 난 밤들을 골라내는 것이다. 어떤 농가는 밤을 주울 때부터 좋은 밤들을 골라오기 때문에 선별할 것이 거의 없지만, 어떤 농가는 절반은 다 주워내야 할 정도로 상한 것이 많을 때도 있다. 눈에 띌 만큼 구멍 나고 갈라진 것들이야 골라내기가 쉽지만, 속에 벌레가 들어가서 까무잡잡한 것들은 밤색인지 벌레가 든 것인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악착 같이 골라내면 밤을 들고 온 농민들이 도끼눈을 뜨고 슬렁슬렁 골라내면 책임자가 달려와서 야단을 친다. 초록색 컨베이어 위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붉은 빛 밤들을 하루 종일 노려보고 있다 보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기도 하고, 계속 구부정히 작업을 하니 허리도 아프고 나중에는 단순반복 골라내는 작업 탓에 어깨관절과 팔꿈치에 탈이 났다. 단순노동인 것 같지마는 초보자들은 무엇을 골라내야할지 몰라 10년씩이나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언니들에게 민폐나 끼치기 일쑤이다. 나도 한 달을 꼬박 일하고 나서야 드디어 슬쩍만 봐도 손이 자동으로 상한 밤을 골라내는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해 봐야 일당 6만원 주는 일이었다. 농촌의 인건비가 비싸다고들 하지만, 놉을 파는 입장이 되고 보면 이거 받자고 일을 해야 하나 싶어진다. 그나마 흔한 것이 여성의 노동인지, 만만한 것인지, 남자들은 12만원 씩 주면서 여자의 일은 딱 그 반값. 나 역시 첫해에는 그거라도 감지덕지 일거리가 있는 게 어딘가 하고 일을 했지만, 왠지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단순히 저렴한 일당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첫해 하고 그만두었고, 새로 들어오는 친구들에게도 그리 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매일 퇴근하고 나면 함께 밥을 해 먹고 흠집 난 밤들을 들고 와서 깎아 먹고 삶아 먹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밤조림을 하겠다며 쉴새없이 밤 껍질을 까곤 했던 그 시절이 또 가끔은 그립기도.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부딪히는 일이 얼마나 다른지. 밤이 풍부한 지역이니까 밤을 가공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을 해서 팔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남들이 다 안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손은 얼마나 많이 가는지, 시간은 얼마나 또 많이 걸리는지, 몇 번을 해보다가 두손두발 다 들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해를 끝으로 밤조림은 지긋지긋해졌다고.


무엇이든 내 손으로 생산을 해보면 귀함을 안다. 베란다에서 방울토마토를 키웠다는 내 친구는 딱 6알이 열려서 쌍둥이 아들 두 개씩 먹고 남은 두 개를 부부가 나눠먹었단다. 1년을 고이 키운 정성 담긴 방울토마토 한 알 값은 대체 얼마일까. 얼마 전에는 순창의 청년로망시험포라는 협업농장에 일하는 청년들이 올해 첫 생산한 밀로 밀가루를 빻아왔다. 나름 같은 작물을 생산하는지라 얼마에 팔아야하냐고 물어 오길래 밀가루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얘기해주었다. 시중의 우리밀이 3천원쯤 하겠지만, 5천원쯤 받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오늘 아침에 물어보니 빻아온 밀가루를 다 팔았단다. 밀을 심어 수확하고 씻어서 말리고 가루로 빻아내는 모든 수고를 계산하면 얼마를 받았어야 할까. 사는 입장과 파는 입장의 간격은 얼마나 큰 것일까. 아마 이 친구들이 판 것은 밀가루의 다른 이름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오글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그 희망 덕에 산다. 며칠 전 뉴스에서 작년 우리밀 재고가 창고에 가득 쌓여 올해 수확한 밀은 수매조차 어렵다는 심각한 상황을 전했다. 사 주는 이가 적어서 차고 넘치는 우리밀, 또 파종을 하는 게 현명한 짓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씨앗을 심겠다는 마음을 뉴스의 댓글들은 무참히 짓밟고 있다. 이래저래 심난한 가을이다.


밤을 주우러 가볼까. 돈이야 안 되겠지만, 속껍질 안 다치게 겉껍질 하나하나 까고 쓴물 빠지라고 소다 물에 하룻밤 재워놨다가 설탕 넣어 끓이고 졸여내어 달달한 밤조림 만들어서 이런 건 구경도 못하는 바쁜 도시인 친구들에게 보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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