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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 | 기획 [우리 음악의 꽃, 산조]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애달프게 수많은 삶에 울리는 소리
이동혁, 김하람(2019-10-15 14:00:41)



허튼 가락, 산조
산조란 한국 민속음악에 속하는 기악독주곡 중의 하나다. 산조는 그 한자를 풀어 '허튼 가락', '흩은 가락'이라고도 부르는데, 가락이 완벽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져 있다는 본질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가락 자유분방하다고 해서 아무 형식도 없이 즉흥적인 것은 아니다. 산조의 또 다른 맛은 철저히 틀을 유지하는 장단에 있다. 즉 산조의 산은 흩어진 가락이고, 조는 이 흩어진 가락을 모아 놓은 장단이다. 산조에서 장단은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정형화된 틀을 유지한다. 반면 가락은 장단의 틀 속에서 최대한의 흐트러짐을 찾는다. 정형화와 즉흥이라는 상반된 형식을 가진 장단과 가락의 조화야말로 산조의 아름다움이다.
담기는 내용이 자유로운 만큼 연주하는 악기도 특정한 것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반음보다 좁은 음을 낼 수 있는 전통 악기 대부분엔 각각의 산조가 있다. 토속농요나 농악 등과 같은 민속음악은 우리나라 어느 곳이든 고루 발달해 있는 음악이며 특별히 오랜 기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음악적 재능이 있다면 쉽게 익힐 수 있지만, 산조는 전문 예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음악인 만큼 음악적 구성이나 내용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산조는 좋은 스승 밑에서 오랜 기간 동안 학습하고 스스로 수 없이 반복하며 갈고 닦는 독공이라는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음악이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산조의 연주자로서 인정받게 된다.


무속음악과 판소리에 뿌리를 두다
산조는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남부 지역의 무속음악과 관련이 있는 시나위와 봉장취 같은 기악합주곡에서 출발한 것을 본다. 계면조를 중심으로 한 시나위에서 벗어나 우조, 평조, 경조, 강산제 등 여러 조를 사용하는데, 이는 다양한 종류의 장단을 쓰는 판소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산조를 '말 없는 판소리'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가야금산조 명인 김창조(1865~1929)가 처음 산조를 창제했다고 전해지지만, 같은 시기 김창조와 동년배인 한숙구(1897~1910), 충청지역의 심창래(?~1895)와 박팔괘(1882~1940)도 산조를 연주했던 것으로 보아 이미 널리 즐기던 음악이었으며, 김창조는 산조의 틀을 짜서 오늘날의 산조 체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거문고산조는 백낙준(1876~1930)에 의해 1896년 처음 연주되었다고 하며, 대금산조는 박종기(1880~1947), 해금산조는 지용구(1857~1938), 피리산조는 최응래, 아쟁산조는 한일섭(1929~1973)이 가장 옛 명인으로 전해진다.
 

흐트러짐 속에 형식을 담다
산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설 없는 판소리'라 일컬어질 정도로 섬세한 감정을 드러내는 성음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성음의 변화란 같은 선율, 장단이라도 농현(왼손으로 줄을 짚고 본래의 음 이외에 여러 가지 음을 내는 수법)이나 시김새(음을 꾸며내는 모양새)에 따라 음악이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뜻한다. 봉황의 다정함, 비 오는 소리, 말 뛰는 장면, 청상과부가 담 모퉁이를 돌아서는 장면 등 다양한 모습을 악기의 농현으로 풍부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현재의 산조 연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형식미도 산조의 특징으로 꼽힌다. 산조에는 선율, 형식, 장단에 있어서 일정한 틀이 있다. 질서 정연한 논리 구조가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서는 긴장과 이완의 대비, 양과 음의 조화라는 음악적 형식이 필요하다.
선율은 청자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슬픈 느낌의 계면조 음악에 바탕을 두고, 웅장하고 화평한 느낌의 우조, 편안하고 담담하며 차분한 느낌의 평조 이 세 가지 음조직 내에서 구성된다. 또한 산조에서는 반드시 첫 악장을 시작하기 전에 '다스름'을 연주하는데, 다스름은 판소리로 치면 본격적인 판을 벌이기 전에 소리꾼이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부르는 단가 같은 것이다. 좋은 연주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악기의 성능을 점검하고 조율하는 기능적 측면이 있다.
산조의 장단은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의 3대 형식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첫 악장을 느린 진양조로 시작해 중모리ㆍ중중모리ㆍ자진모리로 점차 빠르게 진행하며, 가장 빠른 장단인 휘모리(세산조시, 단모리)로 끝나야 한다. 각 장단형의 처음 한두 장단은 복잡한 선율보다는 기본 장단을 알려주기 때문에 여러 장단의 구별이 쉽다.
선율, 형식, 장단에 틀을 두고 연주되는 산조지만, 흩은 가락이라는 그 이름처럼 즉흥성 역시 산조를 산조답게 꾸미는 중요한 지점 중 하나다. 연주자는 정형적인 장단 속에서 즉흥적인 장식음이나 잔가락을 다양하게 구사함으로써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한다. 이러한 특징은 유파를 형성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산조는 다른 사람의 선율 일부에 자신의 독창적인 선율을 넣어 자신만의 유파를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자신만의 선율을 넣는 것을 '짠다'고 한다.
거문고 산조 명인 한갑득은 "요새는 문화재 지정이니 뭐니 해가지고, 선생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여. 선생한테는 기본 가락을 배우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지 재주껏 편곡도 허고 창작도 해서 타야 좋지. 밤낮 배운 대로만 허면 그건 밥만 먹고 똥만 싸는 꼴이지. 즉흥적인 멋이 있어야 허니 한 음 켜놓고 그 다음에 동으로 갈지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서로 갈지 몰라. 그래서 산조가 어려운 거고, 그래서 산조가 좋은 거여"라며 산조의 즉흥성에 담긴 멋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전통 악기와 함께 꽃피운 우리 산조

- 가야금
가야금은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 현악기 가운데 하나로 손가락으로 줄을 뜯어서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부드럽고 아름답다. 여러 기악 산조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발달했고, 그 유파도 제일 많다. 전남 영암 출신 김창조가 시나위가락에 판소리가락을 도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가야금산조의 틀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연주되는 기악 산조들 가운데 음악 구조적 변화가 가장 다양하며, 빠른 악장에서 보여 주는 정교하고 세밀한 기교적 전개도 돋보인다. 가야금산조는 오른손으로 현을 뜯거나 튕기는 숙련된 연주 기교와 왼손으로 줄을 강하게 떨거나, 흘려 내리고, 밀어 올리는 등의 농현을 통해 특유의 생동감을 표현한다.
오늘날 연주되는 가야금산조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산조는 성금연류, 김죽파류, 그리고 최옥산류를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강태홍류, 김윤덕류, 김병호류, 서공철류, 정남희제 황병기류 등의 산조도 자주 연주되고 있으며, 기타 전승되는 가야금산조로는 신관용류, 유대봉류가 있다.


- 거문고
거문고는 조선시대의 궁중 음악과 선비들의 여가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악기였다. 따라서 민간의 세속 음악인 산조를 연주하는 악기로 사용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거문고 연주자들이 좀 더 개방적인 태도를 갖게 된 20세기 말에야 비로소 거문고 연주가인 백낙준에 의해 처음 연주되었다. 그는 20세 때에 아버지 백선달의 구음을 모방하여 산조를 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거문고산조는 한 세대 먼저 발달했던 가야금산조의 양식을 모방하며 발전했다. 그러나 거문고산조는 처음부터 가야금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 거문고 악기의 개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가야금산조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표현법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문현법, 청현법, 괘법, 술대법, 지법 등은 거문고산조가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거문고산조는 현재로서는 거문고로 구현될 수 있는 음악적 기교와 가능성을 가장 다채롭게 보여준다. 저음역에서부터 고음역까지의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선율도 변화무쌍하다. 거문고산조가 거침없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거문고 특유의 청현(괘상청, 괘하청)과 문현을 사용함으로써 거문고의 악기적 무게감과 음색이 잘 표현되고, 술대법을 통해 대점과 소점을 분명히 구별함으로써 음악의 역동성을 폭넓게 보여준다. 백낙준이 효시를 이룬 거문고산조는 김종기, 박석기, 신쾌동에게 전승됐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거문고산조는 크게 신쾌동류, 한갑득류, 김윤덕류로 나눌 수 있다.


- 대금
20세기 초에 박종기에 의하여 처음 연주됐다. 대금 소리의 묘미는 취구 바로 옆에 있는 청공에 있다. 갈대 속청을 붙인 청공은 작은 입김에도 반응하며 오묘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데, 힘껏 불 때는 강렬한 소리가, 은근히 불 때는 청울림 소리가 여러 조의 독특한 분위기와 잘 어울려 깊은 맛을 준다. 현을 튕겨 연주하는 가야금 산조나 거문고 산조는 농현으로 감정을 표현하지만, 대금 산조는 음이 지속되는 관악기이기 때문에 현악 산조보다 더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음을 창조할 수 있다. '다루친다'라고 불리는 대금산조의 연주 기법은 다양한 장식음으로 사용되며, 음을 끌어내리는 글리산도나 스타카토 기법은 선율 진행에서 긴장감과 활기를 불어넣어 음을 더욱 풍부히 표현한다.
대금산조는 관악기 산조들 가운데 가장 다양한 기교를 구사하며, 연주자의 개성을 세밀하게 드러내는 고도의 예술음악으로 평가된다. 대금산조의 시조로 꼽히는 박종기는 대금으로 새소리를 내어 산속의 새들을 불러 모았고, 한주환은 대금 한 곡조로 좌중을 울렸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대금의 음색은 슬프면서 화려하고 장쾌하다. 현재 박종기 산조는 한주환을 거쳐 이생강, 서용석에게, 강백천의 산조는 김동진을 거쳐 김동표 등에게 계승되었다.


- 해금
해금은 가늘면서도 강한 소리와 폭넓은 농현, 섬세한 주법 등이 조화를 이루어 경쾌한 한편 은은한 느낌을 준다. 해금산조는 경기지방의 무속 음악인이자 해금의 명인인 지용구에 의해 창시됐으며, 오늘날과 같은 틀을 짠 사람은 지영희와 한범수이다.
해금산조는 해금이라는 악기의 독주 악기로서의 개성을 충분히 보여 주는 음악이다. 찰현 악기의 음색과 줄을 당겨 연주하는 역안법 그리고 손의 빠른 움직임을 통해 구현되는 유연한 청의 이동은 다른 산조와 구별되는 해금산조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금이나 거문고 등의 현악기에 비해 늦게 구성된 해금산조는 현재는 가장 널리 연주되는 산조이다. 가야금•거문고•대금산조 등이 남도 출신 음악가들이 주도하여 발전한 것과 달리 해금산조는 경기•충청 명인들의 기여가 상대적으로 크다. 지용구는 경기도 수원 출신이고, 지영희 역시 경기도 출신 음악가이다. 음악가의 출신은 산조의 음악 구조에도 반영되어 있다. 해금산조는 육자배기토리권의 장단과 조성을 활용하지만, 경기도 음악의 특징인 굿거리장단이나 남부경토리의 비중이 다른 악기 산조에 비해 높다. 특히 지영희는 경기민요의 구조를 산조에 반영할 만큼 경기도 음악을 폭넓게 산조 구조 속에 융해시켰다.


- 아쟁
아쟁은 울림통이 가야고보다 크고 현이 굵어 나지막하고 어두운 소리를 내는데, 보통 음량이 크고 지속음을 낼 수 있으므로 궁중 음악 연주에서 저음부를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마치 도도하게 흐르는 강줄기처럼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이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아쟁 산조는 다른 악기의 산조에 비해 청 바뀜이나 음계 이동이 제한된 편인데다 활로 문질러 연주하므로 음색의 변화가 다채롭지 못하다. 그러나 음량이 크고 지속적인 음을 내므로 감성적이며 표현력이 강하다.
현재 아쟁산조는 전국 어느 시•도에서도 지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특히 부산에 근거를 둔 박용태의 산조는 저변인구의 부족으로 전수 희망자가 매우 적다. 게다가 경제적, 학습상의 어려움 때문에 청소년의 조기 전수 등 효과적인 전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보존이 위기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 피리
19세기에 유행하던 독주곡 형식의 기악곡인 심방곡에서 유래된 기악곡이다. 조선 후기 최응래에 의해서 연주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피리산조는 다른 산조에 비해 비교적 늦게 형성된 산조이다. 그 이유는 악기 연주가 매우 까다로우며, 겹서(리드)를 무는 입술의 강도라든지 입김을 조절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정확한 음정을 내거나 오랜 시간 연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다란 피리의 음량, 독특한 음색, 겹서를 활용한 율동적인 표현을 통한 감정 전달에 있어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 기타 산조
단소, 철가야고, 퉁소 등의 악기로도 산조를 연주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들어보기 어렵다. 특히 단소는 음색이 맑고 부드러우며 서정적인 소리를 내서 대중적인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단소 산조를 만든 전용선이 타계한 뒤에는 듣기 어렵게 됐다.


우리 지역 산조의 현실, 과거에 부끄럽지 않은가
전라북도의 산조는 전 지역에서 고르게 발달하지 않고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성장했다. 전라북도의 산조 역시 다른 지역의 산조와 마찬가지로 전주, 군산, 익산, 정읍, 김제, 남원 등과 같이 농경사회의 중심이었거나 도시화가 진행된 지역을 중심으로 산조가 발생하고 유포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이러한 특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전라북도는 판소리가 발생하고 성장한 본거지였으며 좌우도 농악의 본산이었다. 또한 완제시조는 전라북도에서 만들어져서 전국을 평정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전라북도의 줄풍류(거문고, 가야금, 해금 등의 현악기가 중심이 되는 풍류)는 우리나라 민간풍류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러한 전라북도의 풍부한 음악 유산을 기반으로 산조 역시 많은 명인들이 배출되었으며 전라북도제라고 불릴만한 새로운 산조를 만들어 유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 달리 산조만큼은 오늘날 그 평가도 인색하고 전승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신관용류 가야금산조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실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전주시청의 도문화재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설명에는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는 전북제 중 이영체제에서 신관용으로 이어져 강순영에게 전승되었다…'라고 하여 신관용류 가야금산조가 전북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영채, 신관용이 전북출신이며 더군다나 이 산조의 보유자로 지정된 강순영은 전북남원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관용류 가야금 산조는 2002년 8월 14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강백천류 대금산조를 포함하여, 전추산류 단소산조, 신관용류와 김종기류 가야금산조에 이르기까지 전라북도제 산조에 대해 그 본거지인 전라북도에서는 단 한 가지도 문화재로 지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스스로 전라북도 산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고 또한 그에 합당한 예우도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 지정은 단지 산조명인에 대한 대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멸위기에 처한 무형문화예술의 판도를 바꾸고, 이후로 보존하고 전승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오늘날 학교 교육에서 사용되는 산조는 국가 지정문화재 등이 대부분이어서 앞으로 연주 종목에서 문화재 지정 종목에 대한 편향은 시간이 갈수록 가속화될 전망이며 이러한 현상은 사회 교육의 현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전라북도제 산조 문화재 지정에서 외면받고 그 연장선 위에서 학교 교육과 사회 교육에서도 외면받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한 앞으로 언젠가 전라북도제 산조는 그 명맥이 완전히 끊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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