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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 | 특집 [오래된 오늘]
꽃과 꽃이 손을 잡고 춤춘다
이동혁 (2019-11-15 10:02:14)



문고리에 닿기 전 문살에 아로새겨진 꽃 문양의 신비로움에 멈칫 손이 멎는다. 아득한 세월에도 변치 않는 영원의 꽃. 이것이 극락의 문이로구나. 한국 불교 예술의 정수라 표현되는 사찰의 꽃살문, 그중에서도 부안 내소사의 꽃살문은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한때 화려함을 자랑했을 색색의 단청도 천년의 시간과 함께 그 빛깔을 잃었지만, 무얼, 오히려 색의 욕심을 버린 맨살의 자태에서 꾸밈없는 근본의 아름다움을 본다. 바깥의 꾸밈을 지우고 한결 편안해진 그 모습은 이미 어둔 밤 홀로 깬 촛불처럼 고요하고 의연하다.
문살이 발달한 동양에서도 우리나라의 꽃살문은 매우 독특한 모습을 보여 준다. 중국의 문살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과 장식이 풍부하여 우선 그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에 놀라게 되지만, 눈에 익으면 금세 식상해지고 만다. 일본의 문살은 격자의 간결한 의장에 세련된 선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문살이 예리하고 엄격해 신경질적인 면이 부각된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의 꽃살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갖게 한다.
이에 비해 우리의 꽃살문은 오래 접해도 도무지 실증이 나지 않는다. 담담하고 편안하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의 아름다움과 단아함이 문살 속에 살아 있다. 편안한 가운데 돋보이는 아름다움, 부처가 사는 극락 세계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17세에 처음 소목 일에 뛰어들어 평생을 나무와 함께한 김재중 명장(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9호 소목장 보유자)은 전통 창호 제작에 50년 넘게 종사하며 창호 기법의 전수와 보존에 기여하고, 궁궐, 사찰, 서원 등 전통 건축물의 창호 제작 및 원형 보존에 남다른 노력을 펼쳐 온 장인이다. 특히, 꽃살무늬 제작에 관해선 국내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실력을 자랑하며, 그 솜씨를 바탕으로 재현된 작품들 역시 일일이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다. 대표적으로 김제 금산사, 고창 선운사, 잠실롯데월드 3층에 있는 민속관의 창호도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들이다.
꽃살무늬 조각은 연필로 표시한 선에서 형태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육각의 모양 자체가 깨지기 때문에 그야말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고난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창호는 작품성도 중요하지만 균형의 미가 기본이고, 건축물과의 조화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시야와 안목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김 명장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온 이 기술들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 기법을 전수할 후계자가 없기 때문이다. 전통 창호 기법이란 옛 선조들이 사용했던 기법을 일체 변형시키지 않고 재현하는 것이 생명인데, 요즘 젊은 창호 제작자들은 오려된 송판을 아교로 붙이며 전통보다 편의를 쫓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세태의 변화에도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이어 가며 전통의 멋을 살리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그는 이 시대에 몇 남지 않은 진정한 장인이다. 그의 내면에서 아직도 굳건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옛 조상들의 빼어난 얼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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