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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 | 연재 [임안자의 굼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①
3년간 의 간호학교 생활, 홀로서기를 배우다
임안자(2020-01-15 10:12:58)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혹은 더 넓은 세상을 보고자 반세기 전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한국 여성들이 있었다. 1960~70년대 한국을 떠나 머나먼 나라, 독일에서 새 삶을 일군 한국 간호 여성들이다. 비록 장소는 달랐지만, 임안자 영화평론가 역시 간호사로서 먼 이국 땅에서 숱한 어려움과 외로움을 겪으며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왔다.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에 교환 간호사로 미국을 거쳐 스위스 바젤에 가 영화평론가로 이름을 알리기까지 그가 걸어왔던 삶의 발자취를 연재한다. 그 시대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더욱 가슴에 아련히 와닿으리라. 생생한 전달을 위해 본문의 구어체 문장도 그대로 담았다.


3년간의 간호학교 생활, 홀로서기를 배우다

글 임안자 영화평론가


내가 스위스에 들어온 시기는 1969년이었다. 그 해 7월 29일 한여름에 나는 3년을 살았던 시카고를 뒤로하고 스위스로 가는 먼 여행길에 올랐다. 대서양을 건너 아홉여 시간이 지난 뒤 취리히 공항에 내린 다음 공항 바로 밑에서 목적지인 바젤로 이어지는 기차에 올라타고 한 시간이 좀 지나 바젤 기차역에 닿았다. 긴 여행으로 녹초가 되어 출구로 나가려는데 내 친구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우리는 반가움에 넘쳐 어깨동무를 하고는 택시를 잡아타고 바젤 시립병원에 딸린 간호사들의 기숙사 쪽으로 갔다. 친구가 나를 위해 마련한 방은 1층에 있었는데 병원의 정원을 마주하고 있어 나름 운치가 있었고, 무엇보다 친구의 방이 바로 옆에 있어 든든했다. 친구는 2층으로 지어진 기숙사에 20여 명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셋이 한국인 간호사들이라서 그런대로 외롭지 않을 거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전주 예수간호고등기술학교(예수간호대학교 전신) 출신으로 졸업 후에도 한동안 같이 예수병원에서 일하다가 1966년 초봄에 친구가 독일로 가는 바람에 갑자기 헤어졌다. 알다시피 지난 세기의 60년대 중반에 한국정부는 독일정부의 경제협조에 대한 보답으로 노동력 수출 차원에서 상당수의 간호사들과 광부들을 독일에 파견했다. 친구도 첫 파독 간호사의 한 명으로 베를린에서 일하다가 3년 계약이 끝남과 함께 바젤로 일자리를 옮긴 것이다. 사실 내가 바젤로 온 것도 전적으로 친구 때문이었다. 원래는 시카고 계약이 끝나면 선배 언니 하나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몬트리올로 갈 생각이었으나 친구는 바젤로 오라며, 바젤에 와서 1년쯤 일하다가 유럽을 한 바퀴 여행한 다음에 한국으로 같이 돌아가자고 끈덕지게 졸라댔다. 결국 나는 친구의 환상적인 여행 기획에 끌려 방향을 바젤로 바꾸었고 친구의 도움으로 또 독일 말을 하지 못해도 이비인후과 병동에 쉽사리 일자리까지 얻을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내 소원은 문학가가 되는 거였다. 그럼에도 간호학교를 택했던 데는 순전히 우리 집안의 가난 때문이었다. 대대로 양반집의 자손이었던 아버지는 선비로서 한때는 서예에 능숙하고 시조도 잘 읊던 유유자적한 한량이셨다. 그러던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 웬일로 갑자기 노름에 빠지면서 대농가였던 집안은 얼마 가지 못해 빈털터리가 됐다. 그 결과 가족의 수입이래야 기껏 국민학교 선생이었던 오빠의 월급 정도였고, 어쩌다 운이 좋아 아버지의 노름판에서 승자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논밭이 조금 남아있어 거기서 거두는 농산물로 열세 명 식구가 가까스로 가난을 배겨났다. 오빠는 고만고만한 여덟 명 애들의 아버지였다. 사실 오빠에게 전주 같은 도시의 학교로 승진할 기회가 없지 않아 여러 번 주어졌지만 외아들인 그는 부모에 대한 효심과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나중에는 모정리 초등학교의 교장으로 1974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곁을 지키다가 2001년 용담 댐이 생기면서 어쩔 수 없이 전주로 삶터를 옮겼다. 오빠는 나보다 열여덟 살이 많았다. 아버지의 둘째 부인한테서 태어난 나 또한 외동딸로서 아버지가 노름을 시작할 무렵에 국민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스물두 살에 첫 남편을 잃은 뒤 두 아들과 어렵게 살던 어머니는 마흔에 나를 낳았는데 오래가지 않아 아버지를 떠나고 용담에서 혼자 조그만 포목상을 차려 밥벌이를 했다. 아버지가 내 몫으로 어머니에게 넘겨준 논밭이 조금 있긴 했지만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왜 아버지와 헤어졌는지를 직접 말한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노름 때문이었을 거라고 나는 믿었다. 독립성이 아주 강했던 어머니는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한국의 어머니들이 그랬듯이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을 만큼 어려운 형편에서도 힘껏 나를 키우셨다.


진학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던 무렵에 나는 우연히 국민학교 선배 언니를 만나는 자리에서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시기에 전주에서 예수간호고등기술학교를 다니던 선배는 우리 집안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내 말을 듣고는 서슴없이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들어오라고 권하면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언니는 “첫 학기의 학비만 내면 나머지는 모두 무료다. 그리고 2학년부터 병원 실습이 시작되며 실습의 대가로 병원에서 매달 돈까지 받는다”고 했는데, 한마디로 간호학교 수업에서 기숙사 체류까지 거의 공짜라는 소리였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진 나는 선배의 말에 따르기로 마음먹고는 어머니에게 들은 대로 전했다. 내 학교 문제 때문에 근심이 떠날 날이 없던 어머니는 아주 잘 됐다는 듯이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말고 어서 입학시험을 치르라”며 용기를 북돋아줬다. 입학시험은 1959년 3월에 있었다. 시험장에는 20명을 뽑는데 120명이 접수를 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솔직히 겁이 났지만 며칠 뒤 합격자 발표문에 내 이름이 두 번째로 올라있었다. 내 이름을 읽는 순간 너무나 가슴이 북받쳐 나는 어린애처럼 울어버렸다. 그러자 내 옆에 서있던 어머니는 쏟아지는 내 눈물을 닦아주면서 자랑스러운 듯 내 등을 다독거리며 환히 웃으셨다.



간호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기숙사 생활이 시작됐다. 전주예수병원의 맞은편에 세워진 예쁘장한 기숙사에는 전교생 60명이 들어와 있었다. 방 하나에 세 명이 나눠 썼는데, 첫해에는 우리 학급의 1, 2, 3등짜리들이 같은 방에서 살았다. 그러자니 시험 때만 되면 방안의 분위기는 긴장으로 팽팽했으나 그 때문에 우리 사이가 나빠진 적은 없었다. 원래 사귐성이 얕아서 친구도 별로 없었던 나에게 처음 기숙사 생활은 너무나 낯설었고 힘겨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의 삶에 조금씩 익숙해져갔고 외톨이었던 나에게도 친구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과거의 외롭고 울적하던 날들이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특히 2학년에 들면서부터 병원실습으로 번 돈으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살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고, 3학년 때는 문화부를 맡게 되어 학교의 자그만 도서실의 책장을 이름난 작가들의 책으로 채우는 일도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그리고 3학년이 끝날 무렵엔 나는 문학에 관심 있는 일곱 명의 학생들과 처음으로 교지 1호를 만들었다. ‘푸른 동산’으로 이름 지어진 얄팍한 교지에 처음으로 나는 외로움을 주제로 단편소설을 썼는데 반응이 의외로 아주 긍정적이어서 가슴이 벅찰 정도로 한동안 행복했다. 심지어 몇몇 친구는 나더러 간호사 직업을 그만두고 문학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었던가! 오히려 그쯤 해서 나는 싫든 좋든 내 운명은 간호사가 되는 거라고 믿었기에 한순간 나를 황홀하게 했던 단편의 조그만 에피소드 하나로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그보다는 코앞에 다가온 졸업시험과 그 뒤에 잇따를 직장 문제에 더 신경이 써졌다. 어느덧 3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전주의 다가산 언덕 위의 아담한 간호학교와 그 안의 기숙사, 나는 그 속에서 3년 동안 배곯지 않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편하게 살면서 조금씩 홀로서기를 배웠다. 그리고 1961년 3월 졸업과 함께 그처럼 아늑했던 푸른 동산의 보금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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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안자 영화평론가는 제영화제 심사위원, 한국영화 해외 회고전 프로젝트 기획자다. 1942년에 태어나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에서 신문학과 영화사를 전공했다. 스위스의 영화전문지인 ‘Zoom’ ‘Film Bulletin’ ‘Vorwarts’와 한국의 ‘영화예술’ ‘씨네21’ ‘문화저널’ 등에 영화에 대한 글을 기고했으며, 칸영화제 등 유럽과 국내 일곱 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스위스 및 체코 등지에서 한국영화 회고전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한국영화를 유럽에 알리는 최초의 한국영화인으로 활동했으며, 1996~2003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 고문을, 2004~2008년에는 전주국제영화제의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해외증진 공로상’,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 표창장, 제10회 전주영화제 공로패를 받았고, 현재 의사인 남편 페터 플루바허와 스위스 바젤에서 살고 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영화Land der Morgenstille Filme aus Sudkorea』, 『임권택Im Kwon Taek』, 『영화제 전문가 임안자의 내가 만난 한국영화』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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