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20.5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극사실주의를 넘어 서로의 진심을 향한 사실주의로
작은 빛
김경태(2020-05-12 19:33:57)

보는 영화 읽는 영화 | 작은 빛

극사실주의를 넘어
서로의 진심을 향한 사실주의로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진무(곽진무)’는 기억상실을 유발할 수 있는 뇌 수술을 앞두고, 어머니가 홀로 살고 있는 고향집으로 간다. 그는 캠코더로 어머니 ‘숙녀(변중희)’와 형 ‘정도(신문성)’, 이혼한 누나 ‘현(곽현)’과 조카, 그리고 자신의 모습까지 담는다. 더불어 오래전에 죽은 아버지의 유품과 그의 무덤을 파고든 나무뿌리는 아버지에 대한 묵혀둔 기억까지 끄집어낸다. 관객들은 그들의 일상과 대화를 통해 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긴 깊은 상처와 마주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가난과 불행에 대해 연민과 동정이라는 익숙한 정동으로 향하는 것을 거부한다. 어디에도 정제된 슬픔을 환기시키는 미학은 부재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편하게 슬퍼할 만큼 충분히 아름답지 않다.

카메라 역시 가난한 공간을 견딜만한 심미적 공간으로 미화할 의도가 없다. 어머니가 홀로 살고 있는 허름한 고향집의 벽지는 빗물과 곰팡이로 심하게 얼룩져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요소는 그 벽지처럼 보일 정도다. 가족들 중 아무도 이처럼 가난이 배어있는 집에 대해 수치스러워하거나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곳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이 되어온 공간이기에 그들에게는 친숙한 풍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는 공간에 대한 (재)개발주의에 길들여진 편견 어린 시선을 되받아친다. 깨끗한 벽지가 단란한 가족의 행복을 대리할 수는 없다. 가족애는 그들이 사는 공간의 물질적 가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무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 거대한 얼룩이 아니라 작은 소주 광고 포스터 속 여인이라는 낯선 차이뿐이다.

인물들의 대화는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롱테이크로 촬영된다. 배우들은 정해진 각본이 없는 듯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간다. 등장인물들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지도 않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가족들이 진무의 수술 소식을 처음 접하게 되는 극적인 순간조차 모호하게 처리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뜻밖의 격앙된 반응을 통해 그 여운을 희미하게 감지할 뿐이다. 사건은 그렇게 인물의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형식적으로 봤을 때, 영화의 연속성 원리에 기반한 쇼트와 역쇼트라는 익숙한 촬영기법은 배제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들을 가만히, 그리고 무심하게 응시할 뿐이다. 흡사,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는 관찰자적 양식의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서로에 대한 친밀한 수행적인 개입은 등장인물들에 손에 쥐여진 캠코더를 통해서 이뤄진다. 인물의 얼굴을 향해 클로즈업으로 친밀하게 다가가는 카메라는 모두 흔들리는 캠코더이다. 그렇게 재현의 서로 다른 층위를 구축한다. 마치 극사실주의적 재현만으로는 가족의 진정한 삶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듯이, 그들의 삶의 본질은 어떠한 정제된 스타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말 걸기에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저화질의 흔들리는 영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비록 초점이 맞지 않고 인물 뒤쪽의 콘센트를 무의미하게 줌인을 하더라도, 그 행위에는 적어도 인물들 간의 숨결이 담겨있기에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극사실주의를 넘어선 상호 주관적인 사실주의에 다름없다.



캠코더를 든 이가 내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앞에 선 이는 깊은 속내를 드러낸다. 평소 무뚝뚝한 성격의 정도는 진무의 부탁으로 마지못한 척 춤을 추기도 한다. 어머니는 녹화된 영상을 통해 정도의 뜻밖에 모습에 신기해하고, 현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비로소 확인하며 슬퍼한다. 정도는 어머니의 짧은 머리와 몰라볼 정도로 커버린 조카를 보고 놀란다. 현은 포기해버린 지난 꿈에 대해서 회상하고, 어머니는 애써 행복했던 날들을 떠올려본다. 진무는 아버지의 죽음과 얽힌 오랜 트라우마를 털어놓는다. 서로의 진심이 담긴 영상은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이다. 나아가 죽은 아버지는 뒤늦게 뜻하지 않았던 모습과 방식으로 가족들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마침내 가족들은 서로에게 한 발짝씩 더 다가간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