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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 | 특집 [이휘현의 책이야기]
그래서, 도박빚은 다 갚았나요?
도스또예프스끼 <노름꾼>
이휘현(2020-08-12 10:51:44)

이휘현의 책이야기 | 도스또예프스끼 <노름꾼>


그래서, 도박빚은 다 갚았나요?
글 이휘현 KBS전주 PD



지은이 도스또예프스끼
출판사 열린책들


역사학자 E.H.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에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만, 소설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생애는 파란만장 그 자체다. 불우한 환경은 둘째치고, 신경질적이고 유약한 심성에 생활력도 무능했던 그의 인생은, 대신 다양한 작품 속에서 여러 페르소나로 꽃을 피웠다.


그의 작품들이 인간 마음속 가장 어두운 면들을 지독하리만큼 깊이 파헤쳤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이름값에 비해 실제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몇 편의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었다는 사람을 주변에서 만나기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라 불리는 사람을 둘러싼 우리의 독서 환경일 것이다.


내가 도스또예프스끼의 모든 작품을 읽어내기로 마음먹은 건, 어쩌면 그런 기이한 환경에 어떠한 균열을 내야겠다는 바람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군다나 내년이면 작가 탄생 2백 년 되는 해가 아니던가! 여하튼 2년 전부터 큰맘 먹고 시작된 도스또예프스끼 장거리 경주는 이번 <노름꾼> 읽기를 통해 힘겹게 반환점을 돈 느낌이다(좀 더뎠지만, 수고했다. 토닥토닥).


중편소설 <노름꾼>은 도스또예프스끼의 40년에 육박하는 창작 이력 중 거의 중간 지점에 속해있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데뷔작으로 러시아 문단의 벼락스타가 된 도스또예프스끼의 이후 삶은 끝없는 내리막길이었다. 지독한 가난, 시베리아 유형과 사형수로 죽음의 바로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후 이어진 고된 군대 생활, 주변 사람들과의 끝없는 불화, 빚더미, 그리고 외도 등등. 그 중에서도 그를 불행의 막장으로 몰아갔던 것의 으뜸을 꼽자면 단연 ‘도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노름꾼>은 도스또예프스끼가 도박 중독으로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자전적 색채가 유독 짙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 자체가 도박빚을 갚기 위함이었다는 것! 그는 불과 27일 만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훗날 그의 인생을 목도하는 객관적 시점에서 보자면 빚 독촉에 시달리며 써 내려간 <노름꾼>은 도스또예프스끼 인생을 크게 전환시켜 준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나중에 얘기해보도록 하자.


청년 백수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도박으로 유명한 독일의 도시 룰레텐부르크에 도착한다. 일행 중엔 퇴역한 장군과 그의 어린 자식들 그리고 수양딸 뽈리나 알렉산드로브나가 있다. 주인공 알렉세이는 뽈리나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냉담하다. 더구나 그녀 주변에는 프랑스 남작 드 그리외와 영국 신사 미스터 에이슬리가 있다. 알렉세이는 뽈리나의 환심을 사고 싶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하다. 그가 모시는 장군도 말만 장군이지 사실은 경제적으로 무능해 러시아에 있는 돈 많은 친척 아주머니의 부고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장군에게는 큰 유산이 상속될 것이기에. 이 답답한 상황에서 그들의 탈출구가 되는 것은 도박장이다. 하지만 푼돈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장군의 친척 아주머니가 룰레텐부르크에 등장한다. 그녀는 호기심에 도박장에 들렀다가 첫날 큰돈을 딴다. 하지만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우리 선조들의 훌륭한 말씀이 있지 않던가. 다음 날부터 돈을 잃기 시작한 친척 아주머니는 빈털터리가 되고 나서야 허망한 마음 붙잡고 룰레텐부르크를 떠난다. 자신이 상속받아야 할 유산이 도박장에서 몽땅 날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장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런 장군의 곁에 승냥이처럼 붙어있던 프랑스 남작 드 그리외의 심정은 어떠하고(나중에 드러나지만 드 그리외는 사기꾼이다!).


이 허허로운 풍경을 모두 목도한 알렉세이는 우연히 쥐게 된 푼돈을 들고 자신 또한 도박장으로 향한다. 그날 그는 어마어마한 돈을 딴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사실을 이미 장군의 친척 아주머니 사례를 통해 학습한 알렉세이는 다시 도박장으로 향하지 않는다. 대신 일확천금을 들고 그가 꿈꾸었던 도시 파리로 블랑슈라는 이름의 프랑스 여자와 함께 떠난다.


19세기의 파리는 누구나 동경하던 도시였다. 그곳에서 풍요로운 일상을 즐기는 알렉세이.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뽈리나 마저 잊고 산다. 아, 하지만 쉽게 들어온 돈은 또 쉽게 나가는 법. 블랑슈에게 홀려 흥청망청 써대던 알렉세이의 주머니는 몇 주 만에 금세 바닥나고 만다. 그나마 남은 돈마저 블랑슈가 다 빨아 먹는다.


졸지에 빈털터리가 된 알렉세이. 부랑자가 되어 떠돌던 그는 우연히 옛 친구였던 영국 신사 미스터 에이슬리를 만난다. 알렉세이는 에이슬리를 통해 뽈리나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전해 듣게 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미스터 에이슬리가 건넨 돈 몇 푼을 손에 쥐고 거리에 선 알렉세이. 그가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중편소설 <노름꾼>이 도스또예프스끼의 대표작은 아니다. 당대 수많은 평론가들로부터도 ‘허점투성이’라는 지적을 많이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빚을 갚기 위해 서둘러 썼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도박장이라는 공간 그리고 도박행위 자체에 대한 심리 묘사는 무척이나 탁월하다. 특히 장군의 친척 아주머니가 룰렛 도박에 베팅하는 장면은 그 어떤 도박영화나 드라마보다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다 읽고 나면 ‘도박은 인생의 독약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떠오르니 꽤 교훈적이기도 하다. 아울러 오해와 질투로 어긋나버린 알렉세이와 뽈리나의 사랑은 독자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비록 도스또예프스끼의 걸출한 대표작은 아니라 해도, <노름꾼>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도박소설이자 연애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소설을 쓰는 와중에 그의 두 번째 부인 안나를 만난다. 그녀는 채무에 시달리며 급박하게 써야 했던 이 소설의 속기사로 채용되었다. 20여 년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은 둘의 사랑은 이후 도스또예프스끼의 그 유명한 대작들을 통해(<죄와 벌> <악령> <백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더욱 아름답게 피어난다. 당연한 얘기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중독도 안나와의 결혼을 통해 극복되었다.


<노름꾼>이 도스또예프스키의 걸작은 아니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인생과 작품세계는 분명 이 소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여 도스또예프스끼에 본격 입문하고픈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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