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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 | 연재 [로마의 향기, 바티칸의 숨결]
교황청의 기적 심사
이백만(2022-06-10 13:10:13)



가톨릭에는 성인(聖人, Saint)이 있습니다. 13억 전 세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의 모범으로 공경하고 따르는 ‘최고의 그리스도교 신앙인’입니다. 한국에는 현재 103위의 성인이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대표적인 한국 성인입니다. 가톨릭에는 복자(福者, Blessed)도 있습니다. 한국의 복자는 현재 124위입니다. 신해박해 때 진산사건으로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된 윤지충 바오로가 대표적인 한국 복자입니다. 윤 바오로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이기도 합니다. 복자는 준(準)성인으로, 성인이 되기 전의 단계입니다. 윤 바오로는 수년 안에 성인품에 오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톨릭에서 성인이나 복자로 칭송받는다는 것은 가장 은혜롭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누가 복자나 성인이 될 수 있나요?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가능합니다. 교황청의 시성성에서 그 임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시성성에는 복자나 성인으로 선포해 달라는 민원 서류가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한국에서 심사 청구를 해 놓은 것만도 100건이 넘습니다. 서류 분량이 한 건당 보통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입니다.


성인으로 인정받으려면 최소 2건의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복자가 되려면 1건 이상, 다시 성인이 되려면 1건 이상의 기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황청 시성성에는 기적심사위원회가 있습니다. 이 위원회에는 ‘저명한 의사’가 반드시 2명 이상 참여하게 되어있습니다. 시성성의 기적 심사는 엄격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합니다. 한국 가톨릭은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복자품과 성인품에 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그늘에 가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 가톨릭에서는 김대건 신부 못지않은 사제였습니다. 동갑내기인 김 신부와 최 신부는 1836년 함께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갔었지요. 사제 서품은 김 신부가 먼저 받았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는 성인 반열에 올라 있고, 최 신부는 복자에도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 차이는? 김대건 신부는 순교 당했고, 최양업 신부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황청은 순교자에 대해서는 기적 심사를 면제해 줍니다. 순교 자체를 기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청 시성성의 기적 심사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고 할 경우, 치유 전과 후의 CT, MRI 사진 등 의학적 자료를 꼼꼼히 따져 의사들이 최종 판정을 내립니다. 신비적 요소와 과학적 요소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기적으로 인정됩니다. 즉 치유 내용이 당대 의학 기술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스러워야 하고(신비적 요소), 치유되었다는 사실과 재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과학적 요소)는 의미입니다. 최 신부의 경우, 1차 심사에서 안타깝게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는 최 신부의 기적 사례를 다시 수집하여 교황청에 재심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가족은 순교자 집안입니다.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984년 성인이 되었고,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복자품에 올랐을 정도입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서품 후 1년 만에 순교했지만, 최양업 신부는 40세에 질병으로 선종할 때까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목 활동을 펼쳤습니다. ‘길 위의 목자’였습니다. 그는 1861년 여느 때처럼 영남 지역 교우촌을 방문하러 가던 길에 탈진하여 쓰러졌고 고열에 시달리다 병사했습니다.

교황청 대사로 일하고 있던 3년(2018~2020) 동안 최양업 신부의 기적 심사 통과를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교황청의 주무부처인 시성성 장관을 여러 번 면담했습니다. 당시 장관이었던 아마토 추기경을 처음 면담했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국의 천주교 박해 역사와 최양업 신부의 삶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최 신부는 혹독한 박해 시절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주로 산길을 찾아 걸어 다녔지요. 변변한 신발도 없어서 짚신을 신고서 말입니다. 발바닥이 닳아 새살이 돋고, 또 닳고 또 돋고…, 그렇게 12년 동안 3만 6천km를 걸었답니다. 이탈리아 A1 고속도로의 47배 거리입니다. 40세에 괴질에 걸려 길 위에서 선종하셨습니다. 최 신부의 삶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는 한국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추기경이 한국의 짚신을 알 턱이 없지요.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주로 가죽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이냐시오 성인의 유품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에는 가죽신이 있습니다. 지금 보아도 튼튼해 보입니다. 추기경에게 짚신을 설명해 드렸더니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밀라노와 나폴리를 잇는 A1 고속도로(760Km)는 한국의 경부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의 대동맥입니다. 짚신을 신고 이 고속도로의 47배 거리를 걸었다고 하니 놀랄만한 일이지 않습니까. 최양업 신부는 충북 제천 배론성지에 묻혀있습니다.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 대사, 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이번호로 ‘로마의 향기, 바티칸의 숨결’ 연재는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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