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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 | 연재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소설가 이정환, <까치房> 그리고 <샛江>
이휘현 KBS전주 PD(2022-12-13 14:01:45)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12 이정환, <까치방> 그리고 <샛강>

소설가 이정환, <까치房> 그리고 <샛江>


글 이휘현 KBS전주 PD




소설가 이정환(李貞桓). 1930년 전주 生, 1984년 卒. 우리 나이 55세로 마감한 작가의 삶에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음영이 짙게 드리워있다. 

전주농업학교 재학 중 발발한 한국전쟁에 자원입대했으나 포항전투에서 인민군에 붙들려 포로생활 시작. 이후 극적으로 탈출 성공. 다시 입대했다가 휴가 중 몸져누운 어머니를 돌보느라 귀대 날짜를 어겨 탈영병 신세로 전락.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옥살이 중 무기징역으로 감형. 감옥 생활 7년 만인 1958년 출소. 하지만 파란만장한 이정환의 인생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출소 후 나이 서른을 앞둔 그는 가업인 책방을 이어받아 운영했다. 그렇게 10년쯤 지난 1969년 한 문예지에 단편 <영기(令旗)>가 입선되어 이정환이라는 이름 뒤에 작가라는 직함이 붙게 되었다. 이후 여러 지면에 단편소설을 연이어 발표하며 그는 왕성한 창작열을 선보였다. 

그리고 불혹의 나이에 데뷔한 늦깎이 신인으로는 제법 빠르게, 한국 문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책벌레이자 또한 작가이기를 열망했던 이정환에겐 더없이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의 운명은 평탄치 못했다. 병마가 작가를 덮친 것이다. 1980년 당뇨병 망막증으로 실명하는 불행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환은 작가로서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칸이 보이지 않는 원고지에 자를 대고 글을 써서 발표하거나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가족에게 자신이 구술한 내용을 받아적게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으니, 결국 1984년 55세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1970년대 한국 문단에 축복과도 같았던 그의 존재는 그렇게 사그라졌다. 야속한 게 세월이라고 했던가. 세상은 그를 빨리 잊어갔다. 살아생전 제법 인기를 누리던 이정환의 소설들은 인쇄가 잦아들더니 끝내 절판으로 이어졌다. 그의 대표작 <까치방>과 <샛강>마저 이제는 웬만한 중고서점이나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극강의 희귀템이 되어버렸다. 

잊힌 이름 이정환!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순리일까. 몰랐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 하나 그의 진가를 이미 맛본 나로서는 이 지면 ‘숨은 책 좋은 책’을 통해서라도 작가의 흔적을, 그의 무늬를, 슬쩍 새겨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명의식에 사로잡힌다. 내가 <까치방>과 <샛강>을 꺼내 드는 이유일 것이다.


197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한 이정환의 첫 소설집 <까치방>은 총 열아홉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독보 꿈> <까치방> <호각소리> 등 자신의 감옥 체험을 허구와 잘 버무려낸 것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실존적 배고픔과 추위, 이념의 폭력과 만연한 부정부패, ‘악령’으로 표현되는 사형수들의 죽음에의 공포. 도무지 인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듯한 1950년대 대한민국 교도소의 비참함이 이 소설들 속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현장이 또한 직접 경험했을 법한 상황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그 서늘한 핍진성에 진저리치게 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정환 소설 특유의 유머와 해학이 따뜻하게 녹아있기도 하다. 사실주의에 경도된 듯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 그 리얼리티의 콘크리트 틈새 사이로 동화적 상상이 나래를 편다. 끔찍한 현실과 나른한 몽상. 이 이질적인 것들이 마구 충돌하면서 묘한 정서를 유발한다. 바로 이 대목이 그 누구의 문학도 쌓아 올리지 못한 ‘이정환 월드’의 시작을 선포한 지점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또 하나는 떠돌이 남사당패의 이야기를 담은 <영기(令旗)> 그리고 <점례>. 

개인적인 느낌을 밝히자면, <영기>는 내가 최근 몇 년간 읽은 단편소설 중 가장 강렬한 감동을 안긴 작품이었다. 읽다가 내 심장이 뜨거워지고 끝내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거칠기 짝이 없는 저잣거리 두 남자의 사랑이 이리도 애절할 수 있다니! 나중에 혹여 내게 시나리오 작업을 할 기회가 찾아온다면 꼭 극영화로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 작품이 바로 <영기>가 아닐까 싶다.

나머지는 작가가 자신의 서울 생활을 자전적으로 풀어낸 <기계> <보관소>. 이농 현상이 심화하던 1970년대 서울 변두리 상암동을 배경으로 ‘산업화 디아스포라’가 된 부박한 인생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번째 부류는 훗날 이정환 문학의 진경을 펼쳐 보여줄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흘러들게 되는데, <샛江>이 바로 그것이다.

이정환은 1975년부터 이듬해까지 총 4회에 걸쳐 장편소설 하나를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했다. 평단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이에 호응하듯 두 권의 장편으로 묶여 나온 이 작품이 <샛강>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이정환의 <샛강>을 1970년대 한국 문학이 얻은 크나큰 성취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시대적 맥락으로서가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매우 빼어난 작품이라는 것이 이 장편소설에 대한 내 평이다. 

서울 변두리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나가는 다양한 떠돌이 군상들의 만화경. 각각의 캐릭터에는 작가 이정환이 무엇 하나 겹치지 않는 고유의 색깔들을 따로따로 입혀주었으니, 그 공력에는 숭고함마저 느낀다. 무슨 대단한 사건 사고가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페이지를 술술 넘기게 되는 건, 이토록 누구 하나 버릴 것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넘쳐나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은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끝자락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생의 의지와, 실낱같은 희망마저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특유의 낙관과 고집이 엿보인다.

<까치방>의 초기 단편들을 통해 이정환 문학이 보여주고자 했던 원초적 생명력이, 이후 <샛강>을 통해 만개한 느낌이 든다. 초라하나 화려하고, 비었으나 꽉 찼다. 비참함의 두엄 위에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들. 이정환 문학이 가진 힘일 것이다.


이미 얘기했듯 <까치방>과 <샛강>은 이제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숨은 책’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난 2020년 이정환의 문학세계를 재조명하고자 그를 기리는 이들과 가족이 나서 문학 전집을 발간한 일일 것이다. 총 10권으로 구성된 이 문집에는 <까치방> <샛강> 같은 대표작뿐만 아니라, 그간 어디서도 발표된 적 없는 작가의 다양한 원고들도 담겨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다만 부담스러운 것은 4십만 원이라는 책값일 것이다. 소설가 이정환의 훌륭한 작품들이 각각의 단행본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일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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