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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 | 특집 [도시의 유산]
장수의 가야문화, 고대사의 바로미터를 다시 세우다 ②
봉화왕국 장수가야, 그 결정적 증거는?
신동하 기자(2023-02-14 12:44:19)



봉화왕국 장수가야,
그 결정적 증거는?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에는 장수가야가 있다. 진안고원의 장수군에 지역적 기반을 둔 장수가야는 가야영역의 서북쪽 경계로 줄곧 백제와 국경을 맞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에서 유일하게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한 가야 왕국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장수가야의 흔적은 아직도 장수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봉화 왕국임을 증명하다
장수 오성리 봉화



지금까지 발견된 가야의 봉화는 120여개소. 이들을 지도상에서 선으로 연결한 결과 8개의 봉화로가 복원되었다. 이 봉화로가 모두 교차되는 곳은 장수의 장계분지이다. 학자들은 봉화로를 따라 실어온 정보들을 장수의 삼봉리 산성에서 하나로 취합하여 산성 북쪽에 위치한 왕궁터로 보고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금강과 섬진강 수계권이 한 눈에 보이는 대성고원에 ‘장수 오성리 봉화’가 있다. 봉화봉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어 ‘봉화봉 봉화’라고도 불리운다. 이곳은 2022년 6월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따끈따끈한 문화재이다. 이곳은 발견부터 발굴까지 고고학의 정석대로 이루어졌다. 해당 봉화는 복원된 봉화로 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봉화봉’이란 지명을 통해 이곳에 봉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고, 지표조사를 통해 실제로 그것을 찾아냈다.

그 후 발굴조사를 실시하자 의미있는 유물들이 쏟아졌다. 봉화대 정상부에 있는 봉화시설에서 숯이 검출되었고, 봉화대를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 평탄지에서는 봉화를 관리하던 병사들의 주거공간이 발견되었으며 북쪽에서는 불을 일으키는 데 쓰인 부싯돌이 수습되었다. 또한 다른 국가들의 토기는 전혀 없고 가야계 토기편만 출토되었다. 전북 동부지역의 봉화들이 가야의 것이라고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지붕 없는 가야 박물관이 되다
장수의 가야계 고총들



여태껏 백제문화권이라고만 인식되었던 호남지방에서 가야계 고총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은 장수가 처음이다. 가야계 고총이란 봉분의 직경이 20m 내외되는 대형무덤으로 그 주인공이 지배자 혹은 지배층으로 추정된다. 가야고총은 대체로 사방에서 한 눈에 보이는 산줄기 정상부에 입지를 두었다. 봉분을 산봉우리처럼 크게 보이게 하여 무덤 주인의 권위와 신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는 삼국과 구별되는 가야만 가진 풍습이다. 그 중에서도 반파국의 경우 봉분 가장자리에 호석을 두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총 240 여기의 고총이 발견되었으며, 삼봉리 가야고분군과 동촌리 고분군, 장계리 고분군의 경우 역사성을 인정받았기에 더욱 뜻깊다.

삼봉리 가야고분군은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의 백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두 차례의 조사를 통해 다양한 가야토기와 철제마구, 꺽쇠, 교구 등이 출퇴되었다. 이는 무덤의 주인이 매우 높은 계급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유물들이다. 이는 전북가야가 실존했으며, 그 세력이 다른 가야 소국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가야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말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남겼다. 2019년 장수군 최초로 국가 사적에 등록된 동촌리 고분군도 그와 관련이 깊다. 이곳에서 말발굽과 말뼈, 말편자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말편자는 말의 발톱에 대갈을 박아 붙인 것으로 당대 철의 생산부터 가공기술이 응축된 주조기술의 집약체다. 여러차례의 도굴로 인해 유물의 양은 많지 않으나 가야계 고총에서는 처음 발견되어 의미가 있다.

2020년 장수군 장계리 고분군에서는 단야구가 일괄로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단야구란 철광석을 녹여 철제품을 만들 때 필요한 도구들을 가리킨다. 해당 고분군에서는 망치와 모루, 집게가 세트로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장수가야는 참된 철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가야문화를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선 장수군민들
지난 2021년 2월 특별한 시상식이 열렸다. 장수군이 장수가야 연구의 초석을 다지는 데 앞장선 주민 세 명에게 감사패를 수여한 것이다. 상은 동가야마을의 백정관씨, 남산마을의 양만용씨, 사곡마을의 송상원씨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동촌리 고분군’과 ‘삼봉리 고분군’ ‘침령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마을의 전·현직 이장들이다. 특히 백정관 씨는 주민들을 설득하여 마을의 이름을 동촌리에서 동가야마을로 바꾸었다고. 이들은 장수가야 지킴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하며, 자발적으로 마을 주민을 모아 장수가야 유적들을 정비하고 있다.

어울리지 협동조합에서는 장수군과 함께 ‘가야 공감 현장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가야공감 현장 체험’은 장수군민들이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유적지에 방문하여 직접 가야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4년이 넘게 진행되어 온 행사인 만큼 성과도 냈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계북면의 김영섭 씨는 자신의 텃밭에서 슬래그와 삼국시대 토기편, 청자편 등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지붕 없는 가야 박물관이 되다
장수의 가야계 고총들



고고학적으로 추론했을 때, 장수에 가야소국이 있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가야 수장층 혹은 지배층 무덤으로 평가받고 있는 가야 중대형 고총과 왕궁터가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가야 고총에서 위세품, 위신재, 꺽쇠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야 한다. 또 가야 고총군 부근에 규모가 큰 산성이 배치돼 있어야 한다. 이때 장수 삼봉리 산성은 그 역할을 수행한다.

장수 삼봉리 산성은 봉화로에서 실어온 변방의 정보를 하나로 취합하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700여 개소 봉수의 정보를 마지막으로 합치는 서울 목멱산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백두대간과 금호남정맥에서 갈라진 산줄기는 장계분지 사방을 병풍처럼 감싼다. 그 산줄기 위에 오성리 봉화를 포함한 8개소의 봉화가 장계분지를 철통같이 조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장수 삼봉리 산성이 위치한다. 이 산성의 서쪽에 장계리 고분군이, 북쪽에는 추정 왕궁터인 삼봉리 탑동마을이 있어 입지의 중요도를 더한다.

2019년 장수 삼봉리 산성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조사가 시작됐다. 가야 봉화대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 내 산봉우리 정상부를 대상으로 한 차례 발굴조사가 있었고, 산성과 전북 동부지역 봉화대가 비슷한 축조기법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삼국시대 축성기술을 살필 수 있는 '전북의 고대 성곽 전'





장수의 산성 유적들에서는 삼국시대 축성기술의 발전을 잘 살펴볼 수 있다. 풍수적으로 입지가 좋아 모두가 탐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삼봉리산성은 가야가 멸망한 이후 통일신라의 무덤이 들어섰고, 후백제 때에는 정상부에 누정이 지어졌다.

합미산성과 침령산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합미산성은 해발 800m의 산능성 정상에 자리하고 있어 장수와 남원을 통과하는 길목을 훤히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성돌이 전주 동고산성의 것과 똑같아 그동안 후백제 대에 축조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에서 후백제의 유물과 함께 가야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에 학자들은 장수가야가 처음 터를 닦고 후백제 견훤왕에 의해 다시 한 번 증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침령산성은 백두대간 육십령을 넘어 전주 방면으로 이어진 옛길이 통과하는 방아다리재 근처에 위치한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아올려져 후백제 때 성이 확장되었다가 후백제가 고려에 흡수되면서 자연스럽게 폐성되었다.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여러 차례 다시 지어진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시대별 측정 기법을 살펴보기 좋다. 이곳은 2006년부터 2020년까지 7차례에 걸쳐 집중 발굴되었다. 그 결과 많은 양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후백제시대의 유물이 발견돼 당해 7월에 전라북도 기념물로 등록될 수 있었다.

마침 국립익산박물관에서 관련된 전시가 진행 중이다. 특별전 ‘전북의 고대 성곽’이 그것이다. 국립익산박물관,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가 함께 주관한 전시는 전북 지역에 분포하는 200여기의 성곽과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전시는 5월 28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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