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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 | 칼럼·시평 [문화칼럼]
저작권 뒤에 ‘사람’ 있습니다
문화예술 분야의 저작권 활용이 나아가야 할 길
백세희 변호사·작가(2023-09-08 09:49:39)


저작권 뒤에 ‘사람’ 있습니다


─ 문화예술 분야의 저작권 활용이 나아가야 할 길


백세희 변호사·작가



우리 사회는 정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을까? 적어도 권리 보호 측면에서는 그런 것 같다. 온라인 사이트에 가입하거나 결제를 할 때, 프로그램은 거듭 묻는다. 개인정보 제공에 ‘동의’하시냐고. 오프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뷰를 할 때 제작자는 출연자에게 촬영과 방송에 동의하는지 먼저 묻는다. 원칙적으로 ‘사전동의’를 해야 비로소 방송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잡지에 톱스타의 주민등록번호나 주소가 게재되던 시절을 살아온 필자로서는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발전적인 변화는 아무래도 분야별로 그 속도가 제각각인 것 같다. 일사불란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정보 제공에 대한 동의와는 달리, 창작물의 활용에 대한 권리자의 동의는 이제 막 그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21세기도 무려 사반세기가 지나가는 이 시점에 아직도 일방적인 ‘사후통보’에 머무르곤 하는 영역이 바로 창작 분야이다. 일종의 ‘권리자 패싱(passing)’인 셈이다.


최근엔 이런 일이 있었다. 지난 12월 손원평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인 『아몬드』가 원작자인 손 작가의 사전동의 없이 연극으로 제작돼 공연된 사실이 알려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세 차례 무대에 오를 때까지는 저작권 활용에 대해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네 번째 공연으로 제작되는 과정에서 권리자의 동의가 빠진 것이다. 


문제는 극단이 권리자의 허락을 얻지 않은 상태로 연극을 기획하고 제작에 들어가며 시작됐다. 손 작가의 저작권을 중개하던 출판사는 10월 17일 해당 지역문화재단의 보도자료를 통해 비로소 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출판사는 급히 항의하고 거래를 이어나갔지만, 이 과정에서 근본적인 것을 놓쳤다. 2차적 저작물 작성권자인 원작자를 배제하고 업무를 진행하다 연극이 무대에 오르기 불과 4일 전에 손 작가에게 모든 사실을 알린 것이다. 손 작가는 SNS에 “이틀간 상영될 공연을 중지시키는 것이 순수한 마음으로 무대를 준비했을 스태프들과 배우들, 그리고 극장을 찾을 관객에 대한 예의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떠밀리듯 상연에 동의했다”고 토로했다.


여기에 손 작가의 권리를 침해하려고 작정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극단도 ‘이미 세 차례나 연극화되었는데 우리도 한 번 해보자’며 추진하고, 지역문화재단도 ‘별 탈 없는 공연이겠지’ 짐작했을 테다. 출판사도 ‘어서 해결하자’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의 추측일 뿐이긴 하다. 그렇지만 변호사인 필자를 찾아오는 많은 이가 별생각 없이 닥친 일만 해결하다가 ‘저작권 침해’라는 문제를 맞닥뜨리곤 한다.


이렇게 너도나도 별일 아닌 듯 취급하는 권리자 패싱 사건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원작인 『아몬드』가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이다. 왜 자꾸 권리자를 - 중요한 사람인데 - 잊는 걸까? 콘텐츠 IP(지식재산)를 활용하는 일이 점차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 되는 과정에서 ‘사람’의 존재가 희미해지기 때문은 아닐까?


아쉽게도 유명하지 않은 창작자는 더더욱 희미한 존재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나의 첫 단행본인 『선녀와 인어공주가 변호사를 만난다면』이 오디오북으로도 출시되었다는 사실은 내 손으로 포털 검색창에 ‘백세희 변호사’를 입력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아니, 출판권설정계약서에는 종이책과 전자책만 정하고 있는데? 황당했지만 까다롭다는 평판은 얻고 싶지 않은 데다 여전히 출판사를 신뢰하기 때문에 항의하지 않았다. 내 오디오북은 원칙적으로는 ‘사전동의’를 받았어야 했다.


콘텐츠 IP를 다루는 변호사가 이런저런 핑계로 시대에 뒤떨어진 관행을 묵과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손원평 작가는 위 사건에서 분명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희미하고 불건강하게 자리 잡는 일에 방관하며 창작자의 영혼이 아무렇지도 않게 증발하는 데 일조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리게 됐다”라고 말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발언이다. 


극단과 출판사도 잘못을 인정하고 손 작가에게 사과했다. 이 사건에는 악당도 악한 의도도 없다. 그렇지만 잘못이 잘못인 줄 모르고 권리자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지식재산권이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와 화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돈이 오가고 계약서가 오가는 와중에도 잊지 말자. 창작자가 있다는 걸. 이렇게 9월 4일 지식재산의 날을 기념하며 법률상·계약상 개념인 ‘사전동의’에 인간적인 맥락을 부여해 본다.


백세희   

디케이엘파트너스 법률사무소 변호사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문화예술, 저작권, 콘텐츠IP 분야의 법률 이슈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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