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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 | 인터뷰 [문화를 짓는 사람들]
묵향으로 인간의 길을 열다
서예가 김두경
문신 시인˙편집위원(2023-10-13 09:46:03)


묵향으로 인간의 길을 열다

서예가 김두경

문신 시인˙편집위원

사진 고다인 기자




세계는 인간 본성의 연장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대체로 수긍할 수 있다. 마음 상태에 따라 세계를 다르게 받아들였던 경험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인간은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른바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이 언뜻 무책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 본성을 객관 세계와 연계하려는 시도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객관과 주관의 소통과 합일을 추구해 온 역사는 예술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게 서정의 세계다. 서정은 주객일치를 기본 모티프로 삼고 있으며, 객관 세계의 주관화 및 주관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창작의 기본 원리로 제안해왔다.


이것이 김두경 서예가를 만나면서 마음에 새겨졌던 말들이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졌던 9월 중순이었다. 김두경 서예가의 작업실 문자향에는 먹 향을 머금은 커피 향으로 차분했다. 그러나 사실은 김두경 서예가의 표정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람의 표정에도 향기가 있다면 꼭 그러할 법했다. 맞다, 표정의 향. 창을 가린 블라인드를 채운 김두경 서예가의 필법에서 자연스럽게 사람의 표정이 보였고, 그 표정에서 마음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바로 그 순간 내가 세계를 주관화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을 드러내는 방법

알다시피 오랫동안 글을 쓰는 도구는 붓이었다. 그러던 게 펜이 보급되면서 붓은 쓸모를 다한 것처럼 생각되었고, 이제는 개인용 컴퓨터 등을 활용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글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문자를 표현하는 도구가 달라졌다는 건 도구를 사용하는 우리의 삶이 변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에 서예를 이야기하는 건 어쩌면 시대착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지금 우리는 착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게 아닐까? 삶이 어긋나도 제대로 어긋나버린 그런 시대 말이다.


“다른 취미가 따로 없으니 맨날 글씨 쓰고 놀아요. 음악 듣고 글씨 쓰는 것만 할 줄 알죠. 다른 건 못하니까. 그런데 작품 활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는 일은 생각만 해도 비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쳐왔는데, 어느 순간 서예가 아니라 학원처럼 되더라고요. 그래서 학생들 가르치는 걸 그만두었어요. 그리고는 내 공부나 하자 생각해 폐교를 하나 구했어요. 거기에서 서예를 통해 인성교육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런데 관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요. 지금도 매일 예초기 들고 풀 베고 있습니다. 그게 서예와 둘이 아니라는 걸 알아가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풀을 베는 일도 마음을 평정하게 다스리는 일을 닮았다. 무성했던 잡초를 정갈하게 다듬고 나면 마음도 저절로 단정하고 가지런해진다. 마음 다스리는 일이 세계와 가깝게 맞닿아 있어서다. 어쩌면 그것이 김두경 서예가가 우리 시대를 견뎌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날로 각박해지고 헝클어지는 삶에 숨통을 틔우고, 그 숨결로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주는 것. 서예는 그런 점에서 예술이나 기예를 넘어 인문학의 총화일지도 모른다. 인간 본성이 세계를 향해 자기를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힘찬 방식으로 드러내는 방식 말이다. 그것이 김두경 서예가의 글씨이고, 글의 씨앗이다.


“씨앗이라는 개념이 글씨에는 있어요. 마음의 씨앗, 생명의 씨앗, 그런 게 없으면 글씨 또한 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결국은 그게 세계와 나 사이를 통하게 하지 않는가 생각해요. 30대 때부터 누군가 내 글씨를 보고 행복을 느낀다거나,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늘 고민했었죠. 내 글씨가 누군가의 생각 씨앗이 단초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재작년에 kbs 갤러리 초대전을 했는데, 그때 제목을 ‘신나’라고 붙였어요. 신난다, 라고 표현하잖아요.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신이 되었다, 신으로서의 나 자신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이 작품의 창조주다, 내 안에서 나오는 것, 누구 것도 아닌 순수하게 내가 살아온 것의 총화로서 내 마음대로 창작한 거다, 라는 의미가 있더라고요.”




창조,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

창조적 상상력은 언제나 텅 빈 세계를 채워나가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김두경 서예가가 ‘신나’의 미학을 펼쳐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텅 빈 백지에 처음으로 붓을 놓을 때,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백지에 그려진 세계는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만, 사실은 그 세계를 창조한 사람의 의도와 의지를 실현하는 유니버스이다. 그러므로 서예가에게 백지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그 세계에는 형식과 규칙보다는 마음의 자유가 먼저 주어진다. 김두경 서예가의 작품에서 붓끝의 유연하고 분방한 몰아침을 보았다면, 그건 필시 그의 내면이 글자의 획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셨지만, 유학자로서 살았죠. 한약은 생활의 도구였을 뿐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만 해도 저희집에 기숙하는 제자들이 20여 명 정도 되었어요. 사랑채에서 매일 글 읽는 소리가 즐거웠어요. 예닐곱 살부터 안방이 아니라 아버지 제자들과 함께 서당에서 지냈어요. 그러다 보니 주워듣는 게 있었고,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글씨를 쓰는데도 아버지는 엄격했어요. 붓을 들고 낙서를 하거나 하면 여지없이 회초리로 맞았어요. 그래서 그게 싫었을 법도 한데, 학교에 갔다 오면 자연스럽게 서예를 했던 것 같아요.”


김두경 서예가는 그렇게 서예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서예는 붓에 있고 사람의 마음에 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인생의 예를 터득한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가 서예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서예가 저절로 그의 삶에 스며들었는지도 모른다.


사람과 온몸으로 마주하면서 서예를 익혀온 김두경 서예가에게 서예는 예술이 아니라 인문학이다. 규칙과 법칙 같은 기능을 익혀서는 절대 진정한 창작, 진정한 신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예는 그동안 인간이 만들어 온 역사, 철학, 시적 감흥, 음악 등이 하나가 되어 번개처럼 순식간에 속을 드러내는 삶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업이나 기법 같은 말을 서예에서 걷어냈다. 다른 예술이 덧칠하고 퇴고하면서 반복적으로 다듬어가는 장르라고 한다면, 서예는 창조적인 인격 속에 모든 것이 고스란히 녹아든 장르이기 때문이다. 한 번에 붓끝에서 터져 나오는 통찰은 덧칠하거나 거듭 다듬어 낼 수 없다. 서예는 그렇게 인간 내면의 응축된 윤리와 사상 그리고 감흥 같은 게 동시에 균형 잡힌 힘으로 표출된다.




“강암 선생님이 제 외종조부세요. 어머니의 작은아버지. 대학을 다닐 때 강암 선생님 댁에서 심부름도 하고 먹을 갈면서 보고 듣는 게 많았어요. 강암 선생님께서는 오후가 되면 한벽루까지 산책을 갔다 오세요. 어느 날, 산책하고 돌아오시는 모습을 우연히 봤는데, 그 걸음이 너무 반듯하신 거예요. 한 자락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어요. 얼마나 삶을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면 저렇듯 반듯하고 꼿꼿하실까. 옆을 곁눈질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든 거예요. 아마도 서예를 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했어요. 저 반듯한 삶을 본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이렇듯 서예는 인격과 인품의 자세를 만들어간다. 굳건하게 선 획에서 흔들림 없는 마음의 길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삶과 서예가 서로를 구속해서는 안 된다는 게 김두경 서예가의 생각이다. 삶을 누군가 정해놓은 형식에 맞출 수 없는 것처럼, 서예도 법도와 정형에 매몰되면 안 된다. 처음에는 법도를 따르지만, 오랜 수련을 거치면 저절로 나아가는 길을 찾게 된다. 걷는 대로 길이 되듯, 획을 긋는 대로 글씨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예는 글씨를 잘 쓰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정갈하게 드러내려는 노력이어야 한다.


김두경 서예가와 이야기하는 사이, 그와 나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길 하나가 놓였다. 그걸 붓의 길이라고 해도 좋고, 먹의 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중요한 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마음의 길이 트였다는 것. 마음의 붓이 긋고 간 획을 따라 성큼 가을이 들어서 있었다. 그렇게 계절은 지금 우리에게 스며드는 중이다. 김두경 서예가의 붓질이 백지에 길을 내듯이. 그가 자유분방하게 그려낸 길로 성큼 걸음을 내디뎌본다. 넓고 깊은 길이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그게 인간의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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