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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 | 인터뷰
새해에는 꼭 편지할게요
편지쓰기 가치 전하는 로컬브랜드 레디터
고다인 기자(2024-01-10 11:28:38)

인터뷰 ㅣ 편지쓰기 가치 전하는 로컬브랜드 ‘레디터’

새해에는 꼭 편지할게요



텅 빈 종이를 마주하면 일단 맨 위에 ‘To. 00에게’를 자신 있게 적는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인 기억, 한번쯤 있지 않은가. 편지는 그만큼 마음을 기울여야만 채울 수 있다. 단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쓰는 가장 낭만적인 글이기도 하다. 특별한 날을 축하하거나 열렬한 응원을 보내거나 고맙거나 미안한 마음을 전하거나, 혹은 별 이유 없이 안부를 물을 때도, 진심이 필요한 순간 편지는 최고의 무기가 된다. 그러나 이 다정한 무기를 꺼내드는 날들이 갈수록 줄고 있다.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로컬 브랜드 ‘레디터’는 편지쓰기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특별한 프로젝트를 벌인다. 함께 모여 편지를 쓰고, 편지가 어색한 이들에게는 일단 쓸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가이드가 된다. 기획자 이방글 씨는 2020년,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시기 마음의 거리라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자연스레 편지를 떠올렸다. 직장 동료였던 디자이너 고우리와 함께 ‘편지’를 매개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하며 레디터가 탄생했다. 자고로 편지란 혼자서 비밀스럽게 쓰는 글이라고 생각되지만 이들은 함께하는 과정 속에서 편지의 또 다른 의미를 찾았다.



왼쪽부터 이방글 기획자, 고우리 디자이너



‘나’에게 쓰는 편지

‘편지쓰기 리추얼 프로그램’을 통해 모인 소규모의 참여자들은 먼저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당장에 떠오르는 감정들을 그림과 다양한 단어들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이것을 토대로 자기 자신 혹은 소중한 사람에게 손편지를 쓴다. 쓰면서 느낀 감정들을 서로 공유하는 것까지가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다보면 자연스레 솔직한 감정들이 튀어나와 스스로 위로를 받기도 한다.

“한번은 본인이 쓴 편지를 낭독해주신 분이 계셨어요. 보통은 편지 내용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길 어려워하기 때문에 기억에 유독 남는데요. 이분은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나는 할 수 있다’ 응원을 건네신대요. 저는 일어나서 준비하기 바쁜데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마음가짐을 다잡게 되고 좋은 영향을 받게 돼요.”



레디터가 제작한 '편지 가이드북'


세상에 잘 쓴 편지, 못 쓴 편지는 따로 없다. 그럼에도 편지가 서툰 사람은 한 문장 쓰기도 막막할 때가 있다. 레디터는 이런 이들을 위해 일명 ‘편지 가이드북’을 제작했다. 편지가 ‘솔직한 마음’을 재료로 한다면 편지쓰기를 도울 좋은 레시피를 제시한다는 따뜻한 취지에서 출발한 일이다. 편지의 기본적인 구조부터 인사말과 끝인사, 마음을 전달하기 좋은 문장을 친절히 알려준다. 편지쓰기 좋은 장소와 시간, 편지와 관련된 음악 등도 소개하며 편지쓰기를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내용들은 실제 주변인들에게 자주 편지를 쓰며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일상에서 발견한 것들이다. 이방글 씨는 꼭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누군가에게 소소한 선물을 건넬 때면 편지를 늘 함께 넣는다.

편지를 통해 진심을 자주 내비치다보니 주변 친구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기분 좋은 칭찬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스스로는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들은 그들도 좋은 사람이니 좋은 시선을 갖고 바라봐 준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위해 숱하게 써온 편지들이 결국은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다고 말한다. 고우리 씨는 편지하면 떠오르는 특별한 추억이 있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 시절 주고받은 편지다.

“남편과 서로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쓰기로 약속했어요. 매번 공들여 쓰면서 미안한 일, 고마운 일들을 전했던 기억이 아직도 기분 좋게 남아있어요. 그때 쌓인 편지의 양이 꽤 많거든요. 그걸 보는 것만으로 괜히 흐믓한 기분도 들어요. 지금 꺼내보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런 기록들이 너무 소중한 경험이고, 서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고우리 디자이너가 결혼 전 남편에겍 받은 편지


이들은 편지를 통해 느낀 좋은 경험들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나누려한다. 지난해에는 ‘편지, 숲’이라는 뉴스레터를 발행해 금요일 오후마다 구독자에게 편지를 띄우듯 메일을 배달했다. 사랑, 이름, 가족, 응원, 휴식, 관계 등 익숙한 단어들을 레디터의 시선으로 재해석해 소개하고, 개인의 손편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코너도 만들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획자, 현직 작가, 평범한 대학생 등 12명의 에디터를 직접 섭외해 편지에 대한 각자의 잔상이 담긴 짧은 에세이를 싣기도 했다. 첫 시즌을 마치고 올해 시즌2를 계획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스트레터’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새로 개발해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헝겊을 뒤집어쓴 귀여운 캐릭터는 우리가 아는 유령의 모습과 닮아있다. 말보다는 글로 진심을 표현하는 게 편한 사람들의 특성을 녹여내 헝겊 안에 숨어있는 유령의 모습을 표현했다. 소심한 이 캐릭터가 친구들의 편지를 받고 서서히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나름의 스토리도 담았다. ‘고스트레터’를 활용한 엽서와 스티커, 머그잔 등의 굿즈를 제작하며 팝업스토어를 여는 등 레디터만의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경제적인 기반을 갖춰야 지금의 활동들을 지속성 있게 이어나갈 수 있기에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그 과정이 어려우면서도 즐겁다고 말한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낯선 이들과 종종 모여 또 편지를 쓰고, 공감하고, 감정을 나누고 싶은 바람이다.

“편지쓰기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할 땐 저희가 위로를 드리겠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사람이 살아가는 형태는 다 다르지만 크게 보면 삶이라는 건 비슷하잖아요. 40대 어머님과 20대의 젊은 청년 분이 일을 잠깐 쉬면서 저희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적이 있는데요.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을 똑같이 하더라고요. 저 또한 이런 고민을 자주 하거든요. 나이는 다르지만 이렇게 공감하고 연결되는걸 보면 이상하게 뭉클한 지점이 있어요.”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달, 새해 안부를 핑계 삼아 편지쓰기 좋은 날이다. 오늘은 마음에 드는 종이와 펜을 골라 문득 떠오르는 사람에게 고맙다, 보고싶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적어봐야겠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짧은 말풍선에 주고받는 인사보다는 훨씬 다정한 인사가 될 것이다.

고다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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