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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 | 칼럼·시평 [저널초점]
교사와 시인
이종민(2004-01-27 12:20:56)


-무엇이 우리를 진정으로 감동시키는 시의 아름다움인가


 지난 9월 9일 전동성당에서는 이색적(?)인 모임이 있었다.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가 주최한 “참교육 실현을 위한 전교조 지지 문학의 밤”이 그것이다. 문학은 우리의 구차한 일상적 삶과는 무관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며 그래서 문학의 밤은 마땅히 피곤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모임이어야 하는데, 이번 모임은 제목부터가 이러한 통념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접시꽃당신”의 시인이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소식에 실망했던 가슴은, 그가 구속 기소되어 옥중에서 썼다는 “알몸 위에 흰 수의를 걸쳐도…”라는 시를 보고 안타까워했던 마음은, 또 다시 이 불온한 음모의 모임이 문학의 이름을 벌어 치루어지고 있는 현실에 혐오와 분노를 느꼈으리라! 덕을 중시하던 회람의 한 철인은 시인을 미치광이라 이르며 자신의 공화국에서 추방했다. 불란서 혁명기의 영국의 한 시인은 시인들의 이러한 광기야말로 오류의 현상에 가려있는 진실을 밝혀내기 위하여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고집이요 집념이라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시인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닌,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존재이다. 이 예언자적 시인은 기득권자들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거짓된 계명과 이념의 실상을 밝히겠다는 굳은 의지와, 이러한 거짓이, 밤의 어둠이 새벽이 올 때까지만 지속되듯,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지와 신념을 통하여 시인은 인류의 위대한 교사가 될 수 있다. 이 미치광이 시인은, 구약의 이사야, 에스겔, 셰익스피어, 크롬웰의 비서였던 밀톤 동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시인은 교사이어야 한다! ! 아니 과}는 시인이어야 한다! ! 참다운 교사는 예언자적 시인의 이러한 진실에의 신념과 의지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영원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검은 먹장을 하늘이라 여기는 체념으로는,‘쇠항아리’를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타협하는 굴종으로는, 참을 교육할 수 없다. 하여, 참다운 교사는 다시 구약의 선지자처럼 박해와 탄압을 받게 마련이다. 뒤틀리고 타락한 오류의 세계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다.“어둠이 짙을 수록 쇠창살이 더욱 또렷해”오는 역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몸 위에 흰 수의를 걸치고 살아도”“빼앗긴 세월을 반드시 돌려 받을 수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 해직된 교사시인들도 그랬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라는 어색한 미소의 질문에 그들의 답은 너무도 선선했다. 그것은 오만이 서려있지 않은 당당함이었다. 힘겨움을 애써 감추려는 치기 어린 영웅심 따위를 찾아 볼 수도 없었다. 하나같이 왜소한 몸매에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만이 예사인물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었다.
미친 사람들 ! 남들은 출세에,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스스로 밥그릇을 차버린 사람들 ! 밥그릇을 빼앗기고도 웃고 있는 사람들 ! 그들은 “그 옛날에 졸업한 아이가 출세하는 동안 해진 출석부 끼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봄을 기다리다 “홀로 뒷모습을 보여주며 떠나시던” 선배 교사의 모습을 보고도, 그 모습에 “까닭없이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면서도 선선히 “나도 저 무명의 찬란한 낄을 가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어느 때묻지 않은 손이 닦아놓은” 유리창의 티없는 마음으로… 경제교육을 받으러 가면서, “보충수업비 받은 것이 죄로 갈 일이라고” “반가운 대학 동창을 만나도 눈도 제대로 못 맞춘 채” “시장에서 물건 살 때 담는 비닐 씌워 밤목 묶어 들어”가는 자신들의 초라한 “몰골을” 아이들이 볼까 무서워하는, “시장가는 마누라가 볼까 두려”원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통해 이들은 우리 교육계 현실을 담담히 그려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출세한 제자에게 반말 지꺼리의 교육을 받고 눈물도 흘릴 수 없는, 피마저 말라버린 “재가 된 가슴”을 부여안으면서도 이들은 결코 절망을 노래하지는 않고 있다. 교육계의 뒤틀린 현실을, 버리고 피해버릴 더러운 ‘똥’으로가 아니라 썩을수록 기름질‘거름’으로 안으며 거듭남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바로 자신의 삶, 자신의 현실, 모든 진보의 터전으로’받아드리며 ‘뜨거운 열정과 매서운 비판이 하나가 된 태도로써 긍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이들은 “어떤 파렴치한 탄압도 가리지 않는/부정한 자의 발악과 같은/관중과 같은/줄기줄기 미친 비바람”을 “한 것의 한순간을 넘지 않는 것”이라 여기며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기로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콩나물 교실”과 “입시전쟁”으로 대변되는, “반민족, 반민주, 분단고착의 거짓교육”을 바로 잡으려는“금강석 같은 견결한 한마음”으로, 차가운 돌바닥 위에 앉아 졸음과 허기를 견디어내던 명동성당에서의 그 “지향’으로 그 “신섬”으로 스스로의 다짐을 새롭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그 모임을 통하여 우리는 참다운 시인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무엇이 진정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는 시의 아름다움인가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참을 거부하는 타락의 세상에서 왜 참다운 교사는 진실에의 희구와 집념으로 가득찬 시인과 선지자처럼 미치광이일 수밖에 없는가를, 또 왜 이러한 관중의 집착과 희구가 참다운 교육과 참다운 아름다움과 참다운 역사발전 을 위해 절실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문학은 결코 버거운 삶의 단순한 위안물이 아니다. 삶과 무관한 ‘순수한 아름다움’을 구현함으로써 잠시나마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삶의 뒤틀리고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우리로 하여금, 결코 절망하지 않은 채 그 질곡 자체를 사랑으로 부퉁켜 안으며 거듭나도록 간단없이 촉구하는 채찍이다. 그들이 낭송한, 자신의 구체적 삶에서 우러나온 시들이 그러했다. 시인은 성자가 아니다. 시인은 ‘타락되고 오염된 세상 가운데서 타락의 힘에 의지하여 진실에 이르려는 사람’이다. 왜곡을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왜곡을 인정하며 그 앞에 용감하게 맞서는 시인은, 그리하여 우리의 참다운 교사가 되는 것이다. 동료들의 시낭송에, 어느 제자의 편지낭송에 약해지는 마음을 다시 추스리는 해직된 교사시인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날 그 모임에 참여했던 우리 모두는 “저 무명의 찬란한 길을 가리라”는 우리 교사시인들의 소박한 소망마저 짖밟고 있는 이 폭력이 하루 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이 처참한 뒤틀림을 바로잡는 싸움에 너나없이 동참하리라는 결의를 힘찬 박수와 함성으로 한데 모았다. 이것이 단순히 시인들 혹은 교사들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끝으로 출범이후 너무도 오랜 세월, 때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가 이러한 실천적 모임을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 문학운동의 참다운 주체로 설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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