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89.11 | 칼럼·시평 [문화저널]
소설의 인물은 실제 인물인가
우한용(2004-01-27 13:59:01)


 우리들은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가에게 무언가 들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을 좋게 말해 인생의 실감을 자아낸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가지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내밀한 부분을 들키는 데에는 그다지 너그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비밀을 들키기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작가와 연출가들이 골머리를 앓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생겨난다. 종교인을 소재로 극을 만들면 종단에서 난리를 친다. 경찰의 비리를 무대에 올리면 당장 치우라는 압력이 들어온다. 대학교수, 목사, 승려, 비구니 할 것 없이, 예술 영역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며 느긋하게 구경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작가들은 힘없고 제 소리 할 줄 모르는 시골 농사꾼들이나 식모, 파출부, 상인, 죄인같은 인물을 다루어 스스로 소재를 제한하게 된다. 일찍이 김동인과 염상섭 사이에 스캔들을 만들었던 〈발가락이 닮았다〉사건이라든지,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대해 대학교수 모씨가 항의를 제기하는 바람에 연재를 중단하게 되었던 사건 등을 우리는 기억한다. 얼마전에는 神父가 아이를 둔 소재의 연극이 문제되었던 적도 있다. 소설이 곧 허구라고 귀가 아프도록 읽고 왼 이들이 소설 속의 인물을 그렇게 우직스럽게 인식하는 데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인물이 실재 인물이 아니라는 점은 소설가들이 작중인물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소설가들은 자신이 특히 아끼는 인물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이는 다른 영역과 현저히 다른 자기모순의 면모이다. 다른 영역에서는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의 윤리에 최대한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한다. 윤리교사는 윤리적인 인물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소설가는 자신이 그리는 소설적인 인물을 닮고자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소설적인 인물을 비난하거나 비애의 감정으로 바라본다. 이는 현대소설에서 특히 그러하며, 현대소설의 결말이 행복한 결말이 되지 못하는 일반적인 규칙과 관련된다. 어떤 인물이 이렇게 이렇게 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의 결말은 고소설이라면 몰라도 잘 쓰여진 현대소설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현대가 유독 비극적인 세계라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있는 시대를 문제적인 시대로 바라보는 데서 생의 비극적 감각은 생겨난다. 이러한 감각이 소젤에 형상화되는 방식은 주인공이 어떤 일을 완전히 성취하도록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취의 문턱에서 소설을 멈춤으로써 독자들의 상상력을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소설가는 있지도 않은 행복을 만들어서 독자를 속이려들지 않는다. 또 생을 안이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문학 일반이 그렇듯이 소설에서는 어떻게 하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깨인 의식을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관심이 집중된다. 결과나 해답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이 문제이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하는가 하는 데에 관심이 가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은 우회적인 통로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회적인 통로는 성취의 완결성을 거부한다. 현실에서는 피나는 노력을 해도 일이 될까말까 한데 소설속에서 어떤 인물의 빛나는 성취를 보여주면 그 자체가 허위가 되기 쉬우며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아프게 반성하는 대신에 못된 의미의 소설적 환상에 빠져 일상의 질곡에서 발을 빼고 현실을 외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문학을 위안의 문학이라 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데는 욕구의 충족과 위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성취와 위안은 땀흘려 일한 뒤에 오는 위안이라야 한다. 만일 마약성의 위안에 매몰되어 준엄한 현실을 망각한다든지 현실에서 도피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전혀 상반된 방향이 된다. 양질의 문학은 독자의 이러한 중독현상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소설의 인물이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단계에서 머무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독자를 위장된 행복으로 이끌어 눈멀게 하는 모든 소설은 소설이라는 이름을 떼버려야 한다. 이러한 감사기능을 하는 것은 독자들의 문학의식이다. 소설을 발표하고 나면 그 주인공이 모델이 있느냐 아니면 전혀 상상으로만들어 낸 인물이냐 하는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平賽塊〉을 발표한 때는 아파트투기가 한풀 꺾일 무렵이었다. 부동산업자들이 명당을 찾아 팔아먹는 신종 부동산업으로 사업형태를 달리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떤 독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우선생 소설을 보니까 명당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던데, 혹시 그런 친구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면 우선생이 땅 사러 다닌 경험을 소재로 쓴 겁니까?”땅에 대해 잘 아는 친구가 있으면 소개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부동산에 손을 댄다면 지나가던 강아지가 웃을 거라면서 대답을 비키고 말았지만, 소설의 인물이 곧 실재의 인물인 양 생각하는 그 독자의 소설 인식 방법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들이 받은 문학교육이 소설의 인물을 실재의 인물인 것처럼 그렇게 해석하고 그 인물의 생경한 도덕성에 대해 강변하는 식으로 되어왔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인물은 주제를 전달하는 매개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다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소설적인 자유’는 무의미하게 된다. 소설의 인물과 실재 인물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 인물의 몇 가지 속성을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우선 소설의 인물은 한편으로 작가의 심리적인 가면 역할을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마스크 역할을‘하기도 한다. 나의 소설집 〈불바람〉에 들어 있는 〈무서운 숲〉은 6월 민주화항쟁의 열기가 한참 고조되어 있을 무렵, 거의 매일 시내가 최루가스로 가득 차곤 하던 때에 쓰여진 것이다. 우리 집안의 인적구성을 대중 아는 이들은 거기 나오는 인물들이 실재 인물을 소설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소년 영덕, 삼촌, 이모 그런 인물들은 우리 집안 아이들과 형제들 그리고 아이들의 이모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와 그 주변의 지형을 조금 아는 이들은 혹시 실제 있었던 일을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볼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무서운 숲〉을 통해 던지는 질문이 심리적인 것인가 사회적인 것인가 하는 데는 다소 망설여질 것이다. ‘소설은 개인의 전기이자 사회적 연대기’라는 골드만 류의 명제는 유보해 두고 구체적인 체험을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당시 우리 아이들의 소설 쓰는 아버지에 대한 요청은 제발 동화를 써서 자기들도 읽을 수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웃에 사는 김여울 선생의 아들 웅이를 대단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아이들은 이미 김여울선생의 동화를 여러 편 읽은 뒤였다. 아이들은 동화와 소설을 어떻게 구분하는게 소설가로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항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했다. 나는 자신도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아이들에게 묻곤 했다.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도 대학에 가면 데모를 하려느냐, 만일 아버지나 어머니가 너희들을 괴롭힌다면 너희들은 어떻게 할 테냐 등등 아이들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의외로 아이들의 대답은 단호하다 할만큼 분명한 것이었다. 데모할 일이 었으면 해야 한다는 것과 집안에서도 노사분규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섬짓한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전투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숲도 보여주고 하늘의 구름도 보여주고 하면서 한참 걸었다.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했다. 마침 연못에 연잎이 무성하게 자라 올라오고 있었다. 연꽃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연은 흙이 썩은 시궁창에 뿌리를 박고 살지만 그 향기가 아름답고 꽃이 곱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별별 질문을 다해댔고 나는 궁색한 대답을 하다가 돌아왔다. .거기서 얻은 작은 결론은, 아이들은 질문을 하면서 자란다는 것이었다. 그 질문이 많고 엉뚱한 질문을 잘 하는 아이일 수록 깨달음이 빠르고 깊은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자기가 사는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어떠한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가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서운 활>은 일차적으로 아이들의 성장에 관한것, 혹은 심리적인 발달을 다뤄 보고 싶었던 작품이다. 아이들의 성장과 관련되둔·심리를 다루는 작품이 사회적인 의미를 띨 수 있게 된 것은 (독자들이 그렇게 읽어 줄 공산은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전동성당에서 코아백화점까지 이어졌던 카톨릭 사제단과신도들의 춧불행렬을 본 뒤의 일이다. 그날 보았던 춧불행렬은 스스로 환하게 타오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신성한 숲이었다. 개개인의 안에서 무르익은 민주화의 의지가 이룬 아름다운 숲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아름다움은 곧 무서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거리에서 거짓말 보태지 않고 눈물이 볼을 적셨다. 자정이 지나 돌아와서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에 마친 작품이다. 영덕이라는 아이의 심리만을 그렸다면 사회적인 연관을 갖는 작품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설의 인물은 독자를 홉인하여 同i視하려는 의욕을 보이는가 하면, 감상적으로 달려드는 독자를 모지락스럽게 떼어놓기도 한다. 독자가 소설의 인물과 똑같다는 느낌을 갖는 데서 공감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소설가에게 들켰다는 느낌이든지 참으로 현명하게도 남의 속사정을 잘도 안다는 그런 느낌이든지 상관없는 일이다. 독자가 소설의 인물을 실재 인물과 동일시한다고 작가가 그것을 뜯어말릴 권리는 없다. 오히려 작가는 그런 효과를 노리면서 소설을 쓴다고 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두 마디의 말을 위하여〉를 발표했을 때, 내가 직장에서 겪은 일과 감정을 그렇게도 여실히 써 주었느냐는 편지를 보내온 독자에게 고마웠던 것은 지금도 기억된다. 그러나 작가들은 혹여 그러한 자기재주에 속아 넘어 갈까보아 잠시도 걱정을 놓지 못하는 이들이다. 작가들이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은 선언한다. 지금 당신이 읽고 었는 것은 실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설입니다요, 하는 식으로 내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당신이 친구들과 하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고 당신 애인과 주고받던 그런 대화가 그대로 나온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제발 그런 생각은 버리시우. 당신은 지금 소설을 원고 있는 증거고 그것은 내가 꾸며서 만든 인물의 이야기란 말요 정 그래도 못 알아듣겠다면 한 자리에 앉아 혼자 계속 주절대는 인물을 보여 줄 테니 들어보시지요 아마 당신이 이야기하는 방식과는 다른 술수를 부리는 인물을 만나게 될 게요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어느 개의 靈魔이다. 그 작품 이전에 교육에 종사하는 인물을 내세운 소설이 몇 편 있어서 같은 이야기를 재탕하는 것도 미안한데 독자들이 응원까지 해대는 데는 질색이었다. 학교 이야기를 쓰되 독자를 좀 떼어놓고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는 방식을 태한 것이 그 작품이다. 독자를 작품의 상황으로 이끌어 들이지 않고 떼어놓는 방식이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독일의 서사극에서 이미 실험을 거친 것이고[문화저널 제19호 참고로 〈전락〉이란 작품에서 그 효과를 실증한 방법이다. 또 채만식 선생도 〈태명천하〉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존칭어미를 사용하면서 능청스런 톤을 만들어 보여주었던 터다. 그것을 좀 유식한(사실은 무식한) 말로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라고 하는 것인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낯설게하기 기법도 그 뿌리는 같은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소설의 인물은 실재 인물의 홉인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작중현실에서 분리하여 정신차리고 함께 고민하며 생각해 보도록 하는 구실도 하는 것이다. 실제 인물이라는 환상과 오해를 불러오는 것을 작가들은 그렇게 막아내면서 소설이 예술적인 속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갖은 애를 다 쓴다. 소설의 인물은 모델이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의 예술적인 의도에 따라 과장과 축소를 하기도 하는 것이며, 어떠한 국면을 특히 부각시키거나 어느 면은 아예 거론을 하지도 않는 것이다. 소설의 인물은 작가에 의해 재창조된 인물이다. 소설을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거슬린다면 막연히 소설적인 의도에 따라 그러한 작업을 한다고 해도 탈이 없을 것이다. 결국 소설의 인물은 실재 인물이 아니라 허구적으로 재구성된 인물이다. 소설 속에 나와 똑같은 인물이 나와 주접을 떤다고 해서 소설가에게 치부를 들킨 것도 아니고, 출세가도를 달린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소설의 인물은 소설이라는 자기 세계를 사는 인물이다. 


 허구,  소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