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89.11 | 연재 [사람과사람]
恨의 추구에서 찾고자 한 이땅에의 헌신천이두
문화저널(2004-01-27 14:14:33)


 남원골 태생인 하남 (何南)천이두(千二斗)선생은 1929년 9월26일에 출생했다. 그러니까 하남선생은 올해로서 꼭 60세이고 이순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대개의 대학 교수들이 그렇듯이 하남선생도 제자들로부터 희갑논총을 봉정받는 의식을 코아호텔에서 가졌다. 그 자리에서 선생이 몸을 담고 있는 원광대의 김상룡 총장은 축하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선생의 인간적인 미덕을 말했다. 저는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우리 학교 천이두 선생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어려운 때, 시국이 혼란스럽고 학생들의 주장이 향상 우선하고 학교신문은 온통 그런 기사와 논설로 뒤덮혀 있을 때, 선생은 그 주간을 맡게 된 것입니다. 옳은 일은 학생보다 더 강하게 주장했고 그른 일은 어떤 압력에도 끝끝내 막았습니다. 선생이 학생들의 신뢰를 얻은 것은 최고 평론가나 교수, 그리고 고령자로서의 권위가 아니었고, 진실 그것과 오직
학생을 위하는 인정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차야할 때 한 없이 차고 따뜻해 야할 때 한없이 따뜻한 선생의 인간성, 저는 오히려 그것을 국내외에서 인정하는 선생의 학문적 업적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하남 선생의 학문적 업적보다는 인간적인 미덕을 평가하고 있는 김총장의 축하말씀은 대학의 총책임자로서 선생의 학내 역할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적 면모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느낌을 주지만, 기실은 그 바탕에 선생의 학문적인 성취를 이미 인정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총장의 축하의 말씀의 대체적인 줄거리는, 하남선생이 자신의 본령인 학문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일 뿔만 아니라 지성인으로서의 양심과 인간적인 미덕까지 아울러 갖춘 인격자였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남선생은 김총장의 점잖은 축사말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일 단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인간적인 멋”이라고 표현할수 있다. 하남선생의 지기(知己)중의 지기인 소설이 하근찬은 감히 실례를 무릅쓰고 선생의 희갑논총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바 우리는 이러한 면도 선생의 인간적인 또 다른 면모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주색잡기라고 하면 좀 실례가 되겠지만, 아물든 거의 못하는 것이 없다. 그의 특기 가운데 하나는 판소리인데 그는 술이 거나해지면 곧잘 판소리가락을 내뽑는다. 물론 여기서 주색잡기 운운한 것은 하남선생이 실제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생의 평생 반려자인 이옥순 여사의 표정이 늘상 주색잡기에 능한 남편과 더불어 산다는 느낌을 받기에는 얼토당토 않은 표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화명하고 잔잔한 여사의 미소는 순전히 여사 자신의 융숭한 부덕(編德)의 소치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상당 부분 선생의 도량에서 비저지기 때문이다. 하남선생의 재주의 다양함과 능란함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해야 만이 그 실상이 제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선생의 다재다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불가피했던 소설가의 비유쯤으로 치부해 둘 말이다. 그렇다면 주색잡기라는 이 말은 이 땅에서 정상의 소설가로 족히 지칭될 수 있는 하근찬이 실례를 무릅쓰고 동원할 수 밖에 없었던 비유적 언어로서, 하남선생의 인간적 면모의 또 다른 일면인 선생의 인간적인 멋과, 그 멋을 선생의 주위에 있는 모두에게 공유케 하는 능력-자신의 주위 사람 모두를 주색잡기의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재주를 함축하고 있는셈이다. 부인인이옥순 여사나 선생이 아끼는 제자인 우석대의 정량선생이 판소리 한대목 쯤 넉근히 뽑을 수 있음은 물론 그 오묘한 소리의 세계에 침잠하여 그윽한 예술적 향취에 젖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선생이기 때문이다. 하남선생의 인간적인 멋은 바로 자신의 멋을 자신만이 즐기지 않고, 그것을 주위에 있는 모두에게 더불어 즐길 수 있게 하는 능력까지를 포함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멋이라고 볼 수 었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하근찬이 강조해마지 않던 다재다능한 선생의 인간적 면모이기도 하다. 하남 선생이 〈한국현대소설론〉(1969)이라는 비중있는 저서로 학계에 그 면모를 보인 이래 〈종합에의 의지〉(1974), 〈한국소설의 관점〉(1980), 〈문학과 시대〉(1982), 〈한국문화과 한〉(1985) 그리고 〈판소리 명창 임방울〉(1986)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일련의 연구업적들은, 한 인간의 능력이 어느 만큼이고 그 한계는 과연 있는가를 의심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선생의 장기는 평론에 있다. 선생의 생애에 하나의 극점으로 세인의 관심을 집중케 했던 평론이, 미당시에 관한 논의인 ‘지옥과 열반’인 바 이 명론 하나만으로도 선생이 이 땅에서 정상의 명론가임을 의심치 않게 한다. “미당론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글”이라고 김화영 (〈미당서정주의 시에 대하여, (민음사, 1984, 27면)이극찬해 마지않던 이 글은, 도도하게 흐르는 문체와 예리한 감수성과 날카로운 예지가 번득이고 있다. 무한과 영원을 동경하면서도, 그 세계를 〈시늄해〉보는 정도가 고작인 덧없는 인간. 일찌기 〈노래가 낫찌는 그중 나아도/구륨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꽃밭의 獨白」)마는 것임을 터득했던 시인 徐廷柱는 〈매섭기〉는 하나별 수 없이 지상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한 마리 새의 모습에서‘오랜내자기 시와 구도(求道)의 한계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볼모(不毛)의〈동지섣달〉을 살면서, 그래도 천체의 운행을 시늉해 보는 한 마리 〈매서운새〉, ·그것은 정신과 물질에 있어서 아울러 불모인 시대를 살지 않으면 안되는 시인이요 구도자인 徐廷柱 자시의 탁월한 자화상인 것이다. 이리하여 이 작품에서 우리는 하나의 좌절, 그러나 위대한 좌절에 접하게 된다. 데먼과도 같은 자기 〈피〉의 회오리 바람 속에 지치고 시달리면서도, 그 피를 맘히고 가라앉히려는 줄기찬 노력을 쉬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피예 있음〉을 어쩔 수 없이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徐廷柱의 시의 생애는 마침내 인간 숙명의 극한점에 다다른 것이다.
선생은 이 명론에서 민감한 어휘선태을 통하여 미당시에 간직된 정서의 세부를 정교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선생은 이 명론에서 절제된 언어와 섬세하고 영롱한 언어감각을 바탕으로 미당시의 가치를 한 차원 높여 놓고 있다. 따라서 선생의 평론을 통하여 베푼 언어의 성찬은 한국명론사의 중요한 영광의 하나로 기록되기에 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후대 평론가들의 전범이 될 만하다. 피의 이율배반 속에서 시달리면서,
도 그 이율배반이 빚어내는 회오리바람을 뜨거운 육성의 음악으로 이룩할 수 있었던 시인, 나르시시즘의 절정에서 피의 근원인 고향을 터득할 수 있었던 시인, 설움(恨)의 긴 오열을 거쳐, 부모형제가 사는 건강한 일상의 대지로 돌아왔다가 다시금 신라의 꿈을 찾아 영혼의 나그넷 길에 들어섰던 시인, 이승과 저승을 동시공(同時空) 위에서 살아 보려던 교묘한 술객(術客)과도 같은 시인, 술객의 재간으로도 극복할 수 없었던 인간 숙명에 부딪친 시인, 그리고 술객과도 같은 채간이 있었기에 그 극한 점을 터득할 수 있었던 시인의, 줄기찬 시의 생애를 더틈어 보았다. 정신과 물질에 있어서 아울러〈동지섣달〉인 불모의 시대를 살면서도, 끝내 〈매서운 새〉의 에스프리를 간직하며 살아 온 구도적인 예술의 생애가 거기에는 있었다.
누군가가 세계적인 문학이론의 대가인 웰렉을 가리켜 우둔한 이론의 천재(실제로 웰렉은 그의 이론비평에 버금갈 실천비명의 예를 보여주지 못했다라고 비아냥거렸다면 그것은 선생과 같은 명론가의 직관과 예지를 능가할 수 없는 이론의 한계성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에서 쓰여지고 있는 적지 않은 문학관계를 다룬 글들이 문학의 예술성과 그 감동을 얼마나포착 해 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선생의 작업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미당의 시 그 자체보다도 뛰어난, 아니 미당시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이 명론은, 한국평론의 최고의 정점에 서있는 글을 대표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하남선생은 명론을 문학의 차원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예술적 성취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도전을 그만 둔 것 같다. 〈한국소설의 관점〉 이후 선생은 정교한 어휘구사와 감수성이 날카롭게 빛을 발하는 예술적 형상화의 의지를 감추고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무사하면서 논리와 이론 쪽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두는 글을 써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선생의 글의 스타일의 변화가 단순히 교수로서의 의무논문이 부과되었던 한 시대의 부초려한 관행의 반명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부조리한 관행이 선생같은 탁월한 평론가의 작업에 은연중 부담을 주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제자를 비롯한 후학들의 아쉬움을 자아내는 대목이지만, 어쩔 수 없다. 왜 그럴까? 마침내 또 다른 하나의 예술품을 연상시키는 평설을 선생은 왜 그만두고자 하는가? 선생을 가까이 모셨던 필자로서는 이 점이 늘 의문이었다. 최근에야 필자는 왜 선생이 명론의 정상의 세계에의 정진을 거부하고 논리의 세계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선생은 희갑기념 논문정식에서 보기 드물게 감격해 했고 그리고 자신이 끝끝내 찾고자 했던 아니 자신의 삶에 끈질기게 매달려 있던 문제를 답사에서 울먹이며 혹은 말을 잇지 못할만큼 목이 메여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이야기했다 사람은 누구나 몇 권 쯤의 장편소설에 해당할 만한 자기 몫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고 어느 작가는 말한 바였옵니다만, 특히 제 연배의 이른바6·25세대들이야말로 이런 경위 해당하는 세대가 아닐까 합니다. 자아와 세계에 눈이 뜨이기 비롯하는 꿈 많은 소년기를 2차대전 말기의 암흑적인 식민통치 하에서, 철들어 가는 과정과 궤를 같이하여 서럽고 원통한 조국에의 그리움이 눈을 떳고, 개인과 사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정립해나가야 할 소중한 성년기를 동족상잔의 6·25 가운데 치르면서 암담한 민족사 앞에 절망 먼저 배워야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불우한 조건 속에서 이런 고난을 치러내야 하였던 제 삶의 궤적은 유달리 많은 상처로 얼룩진 것이었고, 그런 상처는 빼묵은 고질이 되어 때로는 잔잔한 일상의 흐름을 난폭하게 뒤흔들어 놓기도 하고 때로는 명화로운 꿈자리를 사납게 어지럽히기도 하였습니다. 꿈을 버리고 서러운 그히움으로 그리고 희망보다는 절망으로 자신의 삶이 이끌 수밖에 없었던 그러한 시대를 선생은 산 것이다. 때문에 선생은 광기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을 허망하게 그 광기의 시대에 함몰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선생이 가끔씩 그럴듯한 술좌석으로 어우러지면 곧잘 부르는 판소리가 왜 하필 ‘쑥대머리’와‘서름타령’이어야 했던가를 선생은 이 대목에서 암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제 삶의 궤적을 돌이켜 볼 때, 그 구심점은 결국 이 해묵은 상처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이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의 의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비틀거리며, 도피하는 나날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방황의 나날을 보내는 과정에서 한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영혼에 새겨진 화인(火印)과도 같은 이 한망각할 수도 도피할 수도 없는 이 한을 초극하는 길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저는 때로 문단이나 학계의 말석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판소리의 둘레를 어정거리기도 하면서, 어느새 나이만 채웠을 뿐입니다 선생은 이 땅에서 불행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사람들의 삶을 자신의 삶의 환전형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묵은 시대를 떨쳐버리고 새로운 시대의 창조를 위한 마지막 헌신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선언적 성격이 짙은 답사를 하고있다. 선생은 이 땅에의 헌신을‘한의 추구’에서 찾고자 한다. 세계의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될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삶의 그늘에 드리워진 한을 선생은 흥이 나선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마침내 안 것이다. 예리한 직관에 의하여 포착된 한국적 ‘한’의 ‘그 무엇’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적절히 논리화할 이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한을 모색하기 시작한 셈이다. 천재적인 직관은 타고난 것이지만, 삶의 예지는 삶을 살지 않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원숙한 삶의 정상에 서 있는 선생은 천재적인 직관에다 삶의 그늘속에서 익혀 온 예지를 중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생각이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 육십이 되면 한번쯤 자신의 생의 뒤안을 돌아보게끔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 적절한 나이에 선생은 아마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학문적인 삶의 모두를 던져버릴 각오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선생은 하늘색 같기도 하고 사막에 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기도 하고 가을하늘에 울고 가는 기러기 같기도 하고 설한풍에 앙상히 매달려 있는 낙엽 같기도 한우리 한국인의 근원적인 삶의 그늘에 서려있는 ‘한’의 정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제 소망은, 도피할수도 망각할수도 없는 것이 한이라고 할 때, 그 한과 익숙해지면서, 그 한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한국인으로서의 자아를 정립하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선생의 삶의 이면에 깊숙이 간직된, 그래서 떨쳐버리고 싶지만 차마 떨칠 수 없는 그런 문제를 선생은 한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 드리워지는 그늘같은 것, 상실과 좌절 그리고 원망과 한탄의 삭임 속에서 아련하게 피어나는 아지랑이 같은 것, 그것을 선생은 잡고 싶고 이야기하고 짚어한다. 선생은 태백, 백두한라의 산상에 우뚝 솟은 영봉의 안개처럼 우리 한국인의 삶을 지배해 온 ‘한의 정체’를 현현해 내고자한다. 따라서 원통하고 기막힌 일들을 기막히게 풀어내 줄 수 있는 한의 미학을 찾아나선 선생의 도정은 마침내 장엄하고 차라리 신성해 보이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다시는 이 땅에서 한그 자체를 그자신의 삶으로 살을 수 있는 인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끝내 그것이 선생에 의하여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가장 즐거워야할 성찬의 자리에서, 느긋한 평안과 안일한 여유의 자리에서 분연한 결의의 울먹임으로 남은 생의 마지막 작업을 끝내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선생의 언사에서 우리는 선생의 분연한 결행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