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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8 | 연재 [문화저널]
한국자수로의 이순(耳順)
이병천 본지편집위원(2004-01-27 15:28:26)

동학농민전쟁에 있어서 손화중이라는 인물의 비중은 그가 단순히 전봉준의 오른팔이었다는 의미로써 뿐만이 아니라 당시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인물, 그래서 고창의 홍덕, 무장의 백성들을 함께 봉기시킬 수 있었던 지도자로 의미 깊다. 전봉준이 혁명의 기치를 높이기 전에 몇 번씩이나 손화중을 찾았던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었다.
삼국지의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만큼이나 역사적으로 극적인 전봉준의 손화중 방문은 여기서는 사실 얘기할 바가 아니로되, 그즘 손화중의 인기가 고창땅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케하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있듯이 옛적 우리네 남정네들도 골마리에는 어김없이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그랬기에 그즈음의 낭자들은 요즘 소녀애들이 남자애들에게 손수건을 선물하듯 자기가 손수 수를 놓아 만둔 비단주머니를 선사하곤 했던 모양이다.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비단주머니를 선사하고 도망치는 일은 그 당시로써는 다름 아닌 정열적인 프로포즈의 행위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손화중은 그런 비단주머니를 무슨 기념품이나 부적처럼 열 몇개씩 차고 다니며 꺼내보곤 했다는 것이다.
청실홍실로 색색이 수를 놓은 비단주머니로의 사랑 구하기 ! 옛적의 사랑에는 그런 간절함과 절절함이 있었던 모양이거니와,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호송하는 포졸과 함께 찍은 손화중의 사진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아닌게 아니라 그의 여유와 인기를 미루어 볼 수도 있게 된다.
그런 손화중이었기에 전봉준은 촉박한 거사의 날을 늦추면서까지 그를 설득하려고 애썼으며 끝내는, 그러지 않았어도 봉건시대의 한 시절을 미망의 중산층으로 잘 살아갔을 손화중이를 역사적으로 완성시킬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인연일까? 바로 그 손화중의 고창땅에, 아마도 한국자수 일인자로 일호(一戶)를 이미 이룬 최인순 여사가 살고 있다. 열 서너살 소학교 시절부터 자수를 해온 이래 60년을 수틀 앞에서 지냈다고 하니 그 자수의 무늬의 청지가 이순(耳順)에 이른 분이다. 소학교 때 처음 만들어본 작품이었던 매화무늬의 베갯니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만큼 담임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것인데 바로 그의 가문과 올케의 자수 작품에서 눈 동냥으로 배운 것이 시작이었으니, 그 스승의 스승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의 가뿐 스승중의 어느 낭자는 수놓은 비단주머니를 하도 잘 만들어서 청년 손화중의 눈길을 고창 홍덕 무장에서는 가장 그윽하게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수, 그것은 무엇인가.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 다음 한껏 뽑을 내어 입고 있는 옷을 잘 들어다 보면 가슴 깨에 색색으로 수를 놓은 부분이 눈에 띈다. 프랑스 왕실의 권위와 영광을 독특하게 표현한 이 문양은 그것이 나폴레옹의 가슴에서는 수예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위엄을 더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이 서양자수이다. 옷이며 패션으로 세계의 유행을 이끌고 있다는 프랑스이고 보면 그 옷에 하나하나 수를 놓는 자수가 어찌 뒤쳐질 수 있으랴싶고, 역사상의 행적이나 말솜씨나 옷맵시로 볼 때 멋쟁이중의 하나였던 나폴레옹이 황제의 어의에 그 빼어난 제 나라의 수예를 빠트릴리 없으니, 그로써도 한 나라의 문화를 엿볼 수 있지 않으랴.
그런데 나폴레옹의 가슴에 새겨진 그 독특한 문양이 그럭저럭 잘되고 아름답다면 옛적 우리 성상 어의의 흉배(뼈背)에 아로새긴 자수는 아름다운가하면 실용적이기도 했다.
임금뿐 아니라 정일 품과 정이품,종삼품과 종사품 동의 품계 구분이 적어도 관복상으로는 흉배의 무늬로 구분됐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한국 전통자수였다. 그리고 최인순
여사의 자수가 한국자수 임은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다.
열서너살때부터 시작한 최인순의 자수는 그 뒤로도 간단(間斷)없이 계속됐다. 때로는 당시에 조선일보기자였던 아버지의 눈올 피해 벽장 속으로 숨어 들어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받아가며 한땀한땀수를 놓기도 했으며, 결혼한 뒤에는 동경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큰 사업을 쫓느라고 일곱채나 되던 집을 하나씩 처분해야 했던 남편 박병환의 그늘 속으로 가정살림을 꾸리느라 눈앞이 어두워오는 바느질도 계속해야 했다.
아들과 딸들 모두도 수틀 아래에서 키웠다. 초저녁 즈음 아이들이 잠을 이루면서 올려다본 어머니의 수틀에는 늙은 소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을 뿔이지만, 그 아이들의 품속에서 고목은 점차 낙락장송으로 우거시고 아이들이 이윽고 새벽에 잠이 깰 즈음이면 그 낙락에 단정학이 내려와 깃을 틀고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딸들 다섯도 모두자수의 명인들로 자랐다. 광주에 사는 봉님, 고창에 사는 둘째 봉희, 그리고 화조와 동물 특히 송학(松轉)에 일가견이 있는 세째 성회, 산수 작품이나 족두리 흉배등의 소품에 능한 네째 미애, 서울에 살면서도 자기 문양에 두각을 보이고 있는 막내 성애가 모두 젖먹이 때부터 어머니의 수틀 밑에서 자랐기에 지금껏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며느리 복현까지 이제 새로운 일가를 이루어 신선도에 관한한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최인순이 한국자수 고창(高歐)문파 일호의 당주이며 중시조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최인순은, 지금도 꽃이피면 꽃을 보러간다. 그들녘에 백로왜가리라도 나타나면 구경하러 나선다. 방장산에 눈내리면 노송에 얹힌 눈을 살피러 나서기도 한다. 당신의 작품에 옮겨담을 수 있는 안목을 갖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게 창경궁의 모란을 살피기 위해 몇차례 서울 나들이를 하기도 했으며 또 새의 부리며 깃털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동물원을 여러차례 구경하기도 했다. 그런 일들은 아마도 마음으로부터 예술가가 아니라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자수작품들은 실제로 예술이라고 불리운다. 장인정신과 예술혼이 그대로 배인….그러기에 배울만큼 배우고 장성한 딸들이 평소에는 내가 어찌 어머니에 못 미치랴하고 생각하다가도, 몸 비틀며 펄펄 뛰어오르는 물고기의 생동감이나 꽃잎에 앉아 이슬을 따는 초충(草蟲)의 여유를 의욕만큼 표출해내지 못할때면, 어머니를 찾아와 자문을 구하고 그때마다 너무도 당연한 가르침에 존경과 사랑을 확인해가는 모양이다. 자수부문에 인간문화재가 없는게 아니고 딸들 모두 그런 인간문화재에게 배우지 않은 바 아니나 어머니 최인순은 아직도 딸들에게는 큰 스승이 되고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당연히 위대한 스승이 되는 것이지만 구체화의 길을 통해 참삶에 이르도록 한다면, 눈길에 발자국이 찍히듯 바늘을 곧이곧대로 따라가는 저 하얀 실의 행렬 ! … 좋은 스승이기도할 것이다.
지난 유월 하순과 칠월 상순에 이르는 기간동안 우리 고장의 공예품들이 미국에 선을보였다고 한다. 최인순의 일가에서도 족두리 흉배노리개 둥의 소품과 수예작품들을 모아 큰딸이 직접 미국에 다녀왔는데, 불행한 한반도 남쪽 지방의 공.
예품들 만큼은 그 땅에서도 크나큰 호응을 얻었던 모양이다. 최인순의 일가가 준비한 소품들은 전시 첫날에 이미 매진됐다고 했다. 하기야 아무리 만져보고 살펴봐도 환장할 만큼 병아리의 암수 구분을 못하는 저들 양코배기의 무신경으로 보면 우리의 수공품들은 그냥 신기(神技)라 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런 문화들을 너무 하찮게 여겼거나 잊고 지내왔다. 자수에 대한 향수는 아직도 남아 기계식자수나 왜색 문화라 할 일본자수가 크게 범람할 때에도 한국 전통자수는 서서히 전통을 잃어갔다. 그래서 최인순이 여생에 가지는 꿈과 소망은 우리가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인순의 꿈은 고창에 자수 연구소를 갖는 일이다. 작품을 그곳에 전시하기도 할뿐더러 한국 전통자수의 맥올 그로써 지켜갈 것이다. 아마도 어린 소녀들은 선배들의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기도 하겠지만 선배들이 다 못한 어떤 기법이며 소재를 새로운 비단에 수놓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자수는 인내심 많고 꼼꼼한 나라의 여인네에게서 발전을 거듭해 가겠지만, 아마도 확실한 것은 저 손화중의 비단주머니가 그렇듯 야 나라 소녀들의 사량이 조금은 더 영원한 것에다 맹세를 거듭하고, 그렇게 시작을 다시 한다면 한데 그러모은 손화중의 기운처럼, 이 나라 남정네들의 용씀도 또한 조금은 더 긴 역사에 부합되는 작심(作心)으로써 어찌 뭇을 못 펼치기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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