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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8 | 연재 [문화저널]
유수(유수)같은 세월
송영상 예총전북지회 상임부지회장(2004-01-27 15:30:42)

<향토작가의 향토장편〉이 그 동안의 작품들과 내용을 달리한 글을 싣게 되었다. 이 글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이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예술문화활동에 열정을 보이고 있는 송영상씨가 60 ·70년대와 전주 풍물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다. 필자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전주의 풍물은 앞으로 향토장편의 넉넉한 소재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고정난에 그대로 소개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잊혀진 이들 이야기가 적지 않은 독자들의 정감 어린 추억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라 본다. 〈편집자주〉

며철 전 우한용씨의 소설 「객사에 누가 머무는가」를 원어 가면서 재미에 푹 빠졌었다. 뭐 그렇다고해 서 아기자기 하다거나 짜릿 짜릿한 대목으로 줄거리가 이어져 갔다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홀딱 반해 버린대목을 조금만 그대로 옮겨 본다.
-전주에 온 그는 구(舊)자가 붙은 지명이 너무 많아 약간 어리벙했다.
구미원탑 사거리니 구형무소 구세무서 구전북일보 구한국은행 구케이비에스 구엠비시같은 것들은 그가 전주에 오기 이전에 이미 기억 속의 고유명사로 자리를 잡은 것들이었다. 그가 직장을 잡아 온 이후에 생긴 이름도 꽤 많은 편이었다.
구역 구시청 구대학병원 등등이 이제 막 기억 속으로 자리를 넘겨 주려는 그런 이름들이었다. 제법 사람들이 모여들 만한 공공건물에는 어디건 간에 구자가 덕지 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그 구, 구, 구하는 것이 이 도시골목 골목을 노리끼하고 매캐한 먼지로 가득채워 질식할 것 만같았다.
구지명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신지명(新地名)을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의미를 거느린 것이었다-두말하면 잔소리다. 한참 읽어내려 가더라도 이런 이야기로 줄줄이어졌다. 모처럼 신나게 읽었다.
내가 알기로 우한용씨는 이 고장 출신이 아닌데도 우리가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소재를 끄집어 냈다.
요즈음 텔레비전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중국의 연변 소식을 보면서 우리네의 지난 50년대를 회상해 봤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하는 달나라에까지 가서 돌 조각을 주어 가지고 온 세상이라면 엄청나게 변해버린 것이 현실인데 아직도 우마차가 버젓하게 오가는 연변거리를 볼 때 마다 우리는 적어도 50년은 확실하게 앞섰다는 희열을 맛보게 된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전주가 국제규모로 번듯하게 발전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물안 개구리 같은 나름대로의 자만에 빠질 수 있게 만든 것은 바로 연변거리였다.
서울의 한 모퉁이에도 비유할 수 없는 빈약한 전주의 팔달로이지만 전북에서는 가장 번화한 도심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뱅크 스트리트라고 명명할 정도로 은행이 밀집하고 교통체증이 극심해서 도시계획을 서둘러야된다는 팔달로변 이야기를 해 본다.
오늘날에 들어서 목욕이라면 피로를 푸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간에 남녀노소 누구나 그저 심심하면 목욕을 한다. 그러다보니 눈에 띄는 곳이 목욕탕이다.
옛날에는 물을 끓여 방안이나 부엌에서 몸을 씻었고 추석이나 설날이 닥치면 목욕탕에 가는 일이 무슨일보다 중요했다. 그것도 그냥가는 것이 아니고 비누며 수건이외에도 돌맹이까지 가지고가서 발 뒷굼치 부터 시작하여 온몸을 구석 구석 멀어댔고 뜨거운 탕속에 오래 앉아 때를 완전히 불리지 않았던가.
-하나에 둘이요, 둘이면 셋이요 셋이면 넷이요 넷이면 다섯이요---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탕속에 들어앉아 몇백까지 세던 일이 엇그제 같다.
이런 저런 일로 손발이 부르트도록 두어 시간이 넘도록 하여튼 오래 목욕올 했다. 그 당시 전주에는 목욕탕은 몇 군데 없었다. 지금 중앙국교 사거리 쯤에 비포장 팔달로가 확 막힌 자리에 고려탕이란 목욕탕이 있었다. 고려탕 옆 골목을 빠져나가면 전동성당이 나왔다. 빨간천에 남 ·녀 표지로 구분한 출입문을 들어설라치면 나도 목욕탕에 들어간다는 으쓱한 몸짓으로 좌우를 살피기까지 했다.
전북은행 본점 자리에는 오랜 기와집 건물이 있었는데 관찰사 작청이었던 바 시청별관으로 사용해 왔다. 당시의 시청건물과 맞붙은 산업은행은 명물이었다. 시청별관이었던 작청 앞마당에는 드럼통을 옆으로 잘 봐 밑에서 통나무 불로 아스팔트를 끓여 팔달로를 산뜻하게 포장했다. 아스팔트길은 전주에서나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아스팔트를 끓이는 것도 큰 구경거리였다. 지나는 사람마다 구경했다. 우마차가 팔달로를 누볐다. 우마차란 요즘 신식말이고 당시에는 말구루마, 소구루마라고 했다. 이따금 택시가 오가며 트럭도 다니던 팔달로는 완주농협 신축공사로 헐린 소방서에서부터 고려탕까지 오래걸려어 렵게 뚫렸는데, 지금은 전동성당 담 벽까지 뚫고 임실 남원선으로 전주교까지 이어졌을 그때 만해도 전주시가 전국의 6대 도시권으로 유명했다. 오늘날은 휴관중인 아카데미극장은 백도극장. 담장이라고 해야 제재소에서 헐값으로 팔린 편쪽으로 엉성하게 울타리를 쳤고 화장실이 붙어 있었으며 여름에는 극장 안이 무덥기 때문에 양철로 만든 문을 항상 열어놨다. 극장의 기도주임은 입장권을 내고 들어오는 관객보다 담장을 넘어오는 불청객을 지키느라고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으나 한눈 파는 사이에 담장을 넘어 들어가기도 했고 때로는 화장실 창문으로 기어올라 들어갔다. 들켜 붙잡히기만 하면 알밤은 얌전한 채벌이었다. 주먹으로 볼따구니를 맞았다. 그렇지만 극장 주변을 빙빙 돌다가 영화종료 시간을 앞두고 잠시 허술한 틈을 타서 도둑고양이처럼 슬쩍 들어가 구경을 했다.
지금의 문화촌이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봉리 방죽이었다. 그 방죽을 메워 공설운동장으로 만들었다. 덕진원두에 공설운동장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인봉리 공설운동장이 체육전북의 산실로 당시에 는전국에서도 몇 번째 빠지지 않는 규모였다. 전국체전 선발선수를 뽑는 전북대회가 열리기만 하면 꼭 전고와 공고, 아니면 전고와 사범학교학생들간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대체적으로 배구 종목이 싸옴의 불씨가 되었다. 전주여고생들은 무조건 전고생들을 응원했고 공고나 사범학교 선수에게 야유를 보냈으며 전고의 응원단장 몸짓이 두드러지게 씩씩하고 유연한 반면 공고나 사범의 응원단장 제스추어는 이에 미치지 못한데서 싸움이 벌어졌다. 돌맹이를 서로 던지고 힘깨나 쓰는 어깨들은 웃옷을 벗고 알통을 보이며 앞장서 싸움을 했다. 밤이 깊어간 시내 골목 골목에서 마주친 학생들끼리 싸웠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등교의 개천길에서 만나게 되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 서로 악수를 나누거나 심한 몸싸움을 한 학생들은 굳은 표정으로 비켜 가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일로 통학길의 개천길은 학생들간에 학창시절의 추억을 심어주었다. 전주역에서 중앙성당의 개천 양쪽은 비교적 넓은 개천길로 사람왕래가 많았으나 학생들은 잘 다니지 않았다. 개천 양쪽으로 홍등가가 있었다. 6 ·25를 겪은지 얼마되지 않은 학도병이나 의용군 출신이 복교한 학생들이었지만 순진해서 흥등가 출입은 없었다고 알고 있다. 60년대의 전주는 전국의 6대 도시권에서도 서울 ·부산 ·대구를 제외하고 선두 다툼을 하였는데 80년대에 들어서서는 10대 도시권으로 밀려 났으니 어찌된 일인가. 한때는 녹색의 고전 교육도시라는 닉네임을 받았던 전주였는데---.부래옥의 아이스케끼. 경기전의 당고빵, 새벽길을 누비는 두부장수, 밤늦은 골목길을 다니는 메밀묵장수, 남문성벽에 기대어 낮잠을 자던지게꾼, 한벽당 밑에서 목욕하던 시절, 어둑 어둑해지면 지금의 남천교가 있기 이전에 목욕하는 여인네들에게 돌팔매질하던 여름밤의 추억, 양잿물로 빨래를 삶아가며 빨래하던 여인네들의 방망이소리, 국극단이 들어오거나 영화상영을 알리는 소구루마의 깃발행렬, 가족회관자리에 자리잡은 바로크건물의미공보관에서 무료 상영하는 영화를 보기위해 우체국 사거리에 장사진 치던 인파. 시내버스가 없던 당시에 덕진 연못에 가서 몸을 씻고 머리를 감으려고 철길을 따라 긴 행렬의 꼬리를 분간 못한 단오절 때의 풍경을 볼 수 있었던 60년대는 분명히 전국의 6대도시권이었던 전주의 의욕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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