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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 | 연재 [저널초점]
다시 "지리산 옆에서 살기"
이종민 편집주간(2004-01-27 16:08:13)

산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지리산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지리산 옆에서”사는 사람 중에 지리산과 관련 된 추억거리 하나 없는 이도 흔치 않다. 백제기행이 아직 자리를 잡기 전에도 지리산을 찾아가는 기행에는 회원들이 예외 없이 몰렸던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 지리산이 갖는 의미의 무게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구체적 증거가 될 것이다. 지리산 산행에 부여하는 의미도 다양하다. 제13회 백제기행인 "『태백산백』"제에서 해설을 맡았던 소설가 박태순씨는 “우리 모두 ‘분단 모순의 집적지로서의 지리산이니, 민족문학의 빼어놓을 수 없는 텃밭이니’하며 이 기행에 거창한 의미들을 부여하려 하지만 사실은 다 놀러온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 해 기행자들을 당황케 했었다. 빨치산들이 처했었던 절실함과 비교해 볼 때 우리 기행은 물론 한가로운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의 모든 지리산행은 분명 일종의‘놀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놀음에도 나름으로의 의미를 부여한다. 어떤 이는 이 현상의 발자취를 더듬으려 낫을 들고 빗점골을 찾아 나섰다가 험한 고생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십 사연대의 김지희가 최후를 마쳤다는 “무슨 이상향 같은 이름을 가진”, “울림이 좋은” 동네를 찾아 나섰다가 ‘인실’을 ‘만나’ 『달궁』 연작을 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세상살이에 자신을 잃어갈 때 심신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 당일치기로 천왕봉에 도전하기도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남 다 가보는 지리산을 가보지 못한 것이 영 체면이 아니라며 서둘러 배낭을 꾸리기도 한다.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며 새해를 시작하려 섣달 그믐날 야간산행의 “째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는 손승호가 보았다는 그 황홀한 핏빛 노을을 확인하기 위해 노고단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 한신계곡 삼거리에서 닭을 잡아먹었다가2박 3일 동안 비만 맞고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며 산에서의 조심스러운 몸가짐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지리산 관통도로가 뚫린 이후에는 여기에 몇 가지 풍속이 더해진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 옛말이 되어 산행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하자 대형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음악감상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하는 음악광(?)들도 생기게 되었고, 먹지 못하고 죽은 빨치산귀신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인지 푸짐한 삼겹살회식을 하필 지리산 골짜기에 찾아와 하려는 굶주림에 한 맺힌(?) 사람들도 많아졌다. 굳이 대형 주차장을 피해 차를 도로변에 위태롭게 세워놓고 속내의 바람으로 ‘고스톱’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은 더욱 가관이다. 대자연이 누구의 소유가 아닌 한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할 수는 없다. 지리산이 몇몇 ‘산행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머무르는 것도 민주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누구나 즐겨 찾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입시지옥에서 몸부림하고있는 우리의 청소년들이 찾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하며 고된 산행을 통해 인내심을 기르고 호연지기를 배우며 서로 돕고 사는 지혜를 깨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잔혹한 생존경쟁의 틈바구니에 서남에게 뒤 처지지 않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불쌍한 가장’들이 찾아가 삶의 다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자식들과 가장들의 뒷바라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힘없는 우리의 어머니들은 물론, 험한 시대를 견디며 살아오느라 나무를 하러 가거나 피난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산을 찾아간 본적이 없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과도 함께 찾아가 보고 즐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지리산의 관통도로의 개통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물론 이로 인하여 많은 묘미를 상실하였지만, 산행을 위하여 많은 시간을 낼 수 없는 우리 대부분의 민초들을 생각한다면, 또 먹고살기에 바빠 산행 한번 즐기지 못한 채 늙어버려 이제는 쇠잔해버린 육신 때문에 힘든 산행은 할 수 없게 된 이 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이 정도의 회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박태순은 지리산 ‘수난3대’의 기구한 이력을 1) 45년8·l5부터 56년 지리산 평화제까지의 시기에 있었던 군사기지화 된 지리산의 수난 2) 관료와 업자 둥 ‘인간송충이’들의 야합에 의한 대대적인 남벌 도벌로 인한 황폐화의 수난 3) ‘관광개발’로 인한 황폐화와 이에 뒤따르는 환경오염, 관광공해에 의한 수난으로 정리했지만, 우리가 백제기행의 그 짧은 일정에서 노고단에 올라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이런 ‘개발’의 덕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지리산이 구천이와 별당아씨의 별천지로 언제까지나 남아있기를 바댈 수는 없다. 이상향의 청학동으로 머물러있기를 고집할 수도 없다. 개발은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개발이 돈벌이의 차원에서 이루어져는 안 된다. 세심하고 포괄적인 계획 없이 순간 순간의 편의적인 발상에 의해 진행되어서도 안 된다. 자연은 물론 거의 무한에 가까운 복원력을 갖고있지만 그 훼손의 정도가 지나쳤을 때에는 복구가 불가능해지거나 복구하는데 너무도 많은 시간을 요하게된다. 자연은 분명 인간을 위해 개발되어야 하지만 섣부른 개발은 오히려 재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요즈음 지리산을 찾은 사람이면 이를 실감했을 것이다. 끝없이 몰려드는 차량과 파렴치한 길가 주차로 인한 혼잡, 엄청난 양의 쓰레기, 소음 둥으로 수많은 빨치산들을 수년동안 먹여 살렸던 거대한 지리산조차도 드디어는 무너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환경문제 전문가들은 이것이 결코 기우만이 아님을 역설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산로의 부분적 폐쇄 안이 대두되기도 하고 일정기간 전등산로의 폐쇄도 제안되고있다. 그러나 인간의 걸음걸이로 인한 훼손 정도는 지리산이 견딜 수 있다. 문제는 차량이다. 자동차의 위력은 가위 혁명적이다. 이를 차단하거나 제한하지 않고는 아무런 기대도 할 수가 없다. 길을 뚫어놓고 완전 차단을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기왕 뚫린 길을 없애버린다는 것도 난처한 일이다. 관리비를 많이 징수하여 첨단의 관리장비와 관리인원을 확보한다는 것도 일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군관민 합동으로 벌이는 쓰레기 수거운동도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주차장을 늘리는 것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뿐이며, 이것마저도 더 많은 훼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모든 자가 차량들을 전면통제하고 영내 버스를 운영하는 것이다. 반선과 육모정파 화엄사나 천은사 에서부터 자가용 차량들의 진입을 전면 금지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건전한 산행문화가 정착되어야만이 궁극적인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도적 차원의 방안이 우선의 급한 불은 꿀 수가 있다. 또한 이러한 방안이고 된 땀흘림을 통해서만 정상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줌으로써 건전한 산행문화를 정착시키는 데에도 기여 할 것이다. 지리산 개발의 더욱 심각한 후유증은 사실,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주의와 편의지상주의의 조장일 수도 있다. 엄격한 차량통제를 통하여 어려움을 나누어 갖도록 하며 이를 통하여 우리 모두 함께 살고있다는 공동체 의식을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리산을 살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다. 그것이 바로 지리산에 산적한 엄청난 쓰레기더미나 식욕을 잃게 하는 수많은 왕파리 때보다도 더욱 가증스럽게 이 땅을 좀먹고 있는 이기주의와 편의주의를 극복하는 길이다. “지리산 옆에서 살기”가 가슴 뻐근한 일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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