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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 | 연재 [문화저널]
어느 술꾼의 사랑
박남준 시인(2004-01-27 16:18:55)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는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다 쉬어 넘는 동설령 고개라도 님 따라서 갈까부다” 그런 깊고 높은 고개였올까? 그 고개 마루에 조그마한 주막 하나 있었다네. 청산인들 그리 깊을까, 녹수인들 그리 맑을까, 그 주막에 곱디 고운 주모 하나 살았다네.
어느 날이었다. 그 주막에 사내하나가 찾아왔다. 남루한 사내 하나, 산인가 하면 물 같고 그런가 하면 알 수 없는 사내는 자리를 찾아 앉더니 말이 없고 주모는 술상을 정성스레 차려 사내 앞에 놓고 물러갔다. 한잔, 또 한잔 사내는 술을 마신다. 세상의 슬픔이 사내의 술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런가, 세상의 기쁨이 저런 것일까, 그런가, 사내는 술을 마신다. 술을 다 비웠는가,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는 누구인가? 어디에 사는 것인가? 이름은? 주모는 저만큼 노을에 젖는 산자락을 바라볼 뿐이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잘먹었다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인연, 사내의 이름은 여동빈, 여동빈은 한 삼년을 꼭 그렇게 주막을 찾아 들었고, 주모는 처음처럼 변함없는 정성으로 술상을 차려왔다.
봄날이었지. 이산 저산 진달래꽃 피어 곱기도 참히 고운 그런 봄날이었지. 여동빈은 주모에게 처음으로 말을 꺼낸다. “먼길을 가려하오. 동안의 고마움을 대신할 것 이 세상에 어찌 있으리오만” 깊은산 중 지필묵이 있었을리야. 여동빈은 진달래 꽃으로 붉어가는 주모의 얼굴을 바라보다가는 부엌의 술검탱을 필묵 삼아 주막의 한쪽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학이었다. 여동빈은 떠나갔다. 주막의 한쪽 벽에 학 한마리 남겨놓고, 언제 다시 오마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 꽃처럼 고운 노을이 주모의 얼굴에 일고있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떠나가고 부터 그 주막에 손님이 오면 벽에 그려 있는 학이 술상 앞으로 날아와서는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주막은 그야말로 문전 성시를 이루었다. 신선들의 술자리가 저러할까, 수많은 사람들이 학춤을 보며 술을 마시려 주막을 찾아 들었다.
꽃이 피고 꽃이 진다. 눈 내리는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가고 물처럼 흐르는 것이 세월이던가.
머언 먼 어린날 연을 날렸지. 가물가물 연은 저 아득한 하늘로 세월처럼 날았지. 그러다 가는둑 연줄은 끊어지고 찾을 수 없었지. 세월보다 더 아득한 곳, 그곳에 먼저 가서 바람 같은 당신을 기다릴까요.
한 삼년이련가,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리움이 흘렀다. 연줄 끊어지듯 소식이 없던 여동빈이 주막을 찾아들었다. 그 반가움이야 어찌했을까. 그 그리움이야, 여동빈은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주모는 처음처럼 술상을 고이 차려왔고 벽속의 학이 사뿐이 날아와 여동빈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한잔 또 한잔 여동빈의 술잔이 비어 가고 이윽고 그가 학위에 올라앉자 학은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아아 주모는 황망히 일어나 여동빈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학은 날아 오른다. 하놀 높이 날아 오른다. 당신 가시는 곳 지옥인들, 세월보다 더 아득한 곳인들 제가 어찌 마다 하겠어요. 꽃처럼 불은 노을이 그들이 날아간 하늘가에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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