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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0 | 연재 [저널초점]
"거대한 뿌리"를 찾아서
이종민·본지주간(2004-01-27 16:36:55)

창간 3주년을 한달 앞둔 지금, 우리 전북문화저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듯하여 반갑다. 그런데 그 관심이 주요내용이 이제까지의 작업성과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으로 되어있다는 데 우리는 주목한다. 그중 가장 골자가 되는 것은 문화저널이 지나치게 과거 지향적인 것이 아니냐 하는 지적이다. 사회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그에 따라 문화적 양태도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또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자꾸 과거의 것만을 파헤쳐서 되겠느냐는 비판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왕성하게 양산되고 있는 오늘의 문화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충고이다.
구체적으로, 「전북의 실학자」,「백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판소리란 무엇인가」,「전북의 민속놀이」등 비중 있는 기획 연재물의 대부분이 과거로의 여행의 산물이며, 현재의 문화에 대한 것으로는 「문화시평」을 제외한다면 무게가 실릴만한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특히나 역사변혁의 주체로서 스스로의 위상을 확인한 노동자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배려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표방하고 있는 우리들 작업의 목적 혹은 취지의 "전북지역의 찬란한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며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근거한 건강한 문화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건전한 문화풍토 조성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과거의 것을 창조적으로 이어 받겠다는 것이며, 문화주의적인 입장이 아니라 구체적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건강한 문화의 계발에 힘쓰겠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위의 비판들은, 목적의 전반부는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는데 그 후반부에는 많은 정력을 쏟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의 작업의 비중이 과거의 전통적 유산에 쏠려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편집위원 모두가 인정하는 고민거리이다. 그것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쉽게 백기를 들어버리는 것 같아 비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역량부족이다. 전임기자 한 명없이, 각자 직장 일로 분주한 편집위원들이 일을 꾸려나가다 보니 실제 발로 뛰어야 하는 작업을 하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과거의 것에 대한 조명은 그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자료도 어느 정도는 정리되어 있는 것이 있어 해나갈 수 있는데, 현재의 것은 정리된 자료도 없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마땅치가 않아 손수 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인 이유는 문화의 건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한 확신의 결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 문화적 양태들을 평가할 제대로 된 자(기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도 물론 우리의 역량부족과 관련된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닐 듯 싶다.
우리는 흔히 건강한 문화의 형태를 '민중적 내용'을 '민족적 형식'에 담은 것으로 규정하곤 한다. '민족적 내용'이라는 것만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겠지만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어떤 것이 과연 바람직한 '민족적 형식'이냐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두 가지가 서로 따로따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어려움을 더해준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을 한겨레신문 주최의 "겨례의 노래" 전국 순회 공연에서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분단의 이념적 벽을 넘고 계층적 갈등과 초월한, 이름하여 '한겨레'의 노래를 지향했지만, 그래서 민중적(대중적) 내용을 민족적(다시 대중적) 형식에 담으려 했지만 그 결과는 술에 물탄이 되고 말았다. 이념을 초월하려 서정성을 추구했지만 결국 축늘어져 맥빠진 노래가 되고 말았으며, 형식적 완결성을 확보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화려한 무대장치, 환상적인 조명 등)은 결국 청중들과의 위화감만을 조성하고 말았다. 어떤 이는 '겨레'라는 말이 함축하듯 '민중적 당파성'을 견지하지 못했음을 탓한다. 분명 한겨레 한민족이지만 엄연히 계급적 차별성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무시한 채, 기득권자들이 민족적 화합을 내세우듯, 온 겨레의 합창을 추구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얘기이다. 또 다른 이는 상업적 방송매체나 쇼비지니스들에 의해 정례화되어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대중적인 것이 되었다는, 그래서 오늘날에 있어서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공연형식을 택한 것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러한 형식은 함께 어울려 판을 이룬다는 우리 고유의 형식에 맞지 않은 것이며 이러한 판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이 지금 이 땅의 문화를 제대로 조명하는데 쏠리지 못하는 것은 실제 그러한 문화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업주의에 찌들어 있어 비판은커녕 관심을 갖는 것조차가 시간낭비일 경우가 허다하며, 어쩌다 방향을 바로 잡은 듯하여 환호했던 모임들조차도 황야에 단 한번의 고운 노래를 들려주고는 사라져 버려 우리의 의욕을 꺽어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살아남음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물론 욕된 살아남음까지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비굴한 타협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다. 이러한 작업(문화운동)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한순간의 문제제기는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건강한 문화의 보급과 건전한 문화적 풍토의 조성을 위해 어렵게 태어났던 많은 단체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우리의 열악한 여건이 우선은 한스럽지만, 그렇다고 비명처럼 잠시 머물렀다 이내 사라져버리고 마는 많은 모임들도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문화저널의 노력은 사실 아쉬움 속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과거에 대한 조명을 시도하는 우리의 노력의 의미를 우리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제의 삶과 문화는 마땅히 오늘의 입장에서 재해석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역사 안에서만 그 본연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란 역사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시점에서 끊임없이 재조명됨으로써 확인되는 것이며 또 확인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이러한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며 이러한 것은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민중적 내용을 담은 참된 민족적 형식의 문화를 가꾸어나가기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과거로의 무조건적인 함몰이 아니라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그것의 창조적 계승을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우리의 과거를, 그 유구한 전통을 제대로 조명하는 일은 오늘날과 같은 문화적 혼란기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리라. 그래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던, "버드 비숍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 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던 김수영 시인의 울부짖음이 우리에겐 위안인 동시에 자극인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좇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약방, 신전,…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는 시인의 절규가 우리를 채근하는 채찍이요 격려인 것이다.
우리는 시인이 말하는 그 "거대한 뿌리"를 규명하고 거기에 "좀벌레의 솜털"만큼의 살이라도 보태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창간 3주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거듭나려는 우리의 노력에 더욱 많은 관심과 애정어린 격려와 비판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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