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0.11 | 연재 [문화저널]
포스트 모더니즘과 한계상황
장 석 원·미술평론가(2004-01-27 16:41:53)

오늘의 문화구조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것 같다. 문화적 가치관이 색다른 견해들끼리 부딪치며 혼선을 빚는다. 그렇다고 이를 쉽게 교통 정리할만한 주견이 서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 편의주의에 맡겨버리게 되는 것이 일반적 추세이다. 그러므로 적절하게 조절 되지 않는 삶 가운데에 내던져진 대중들은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최근 자주 소개되는 포스트 모더니즘 역시 이러한 문화적 혼란 상태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일 뿐 특정한 가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모더니즘의 한계에 부딪친 나머지 이를 넘나드는 소용돌이 속에서 이상(異狀)증후군을 보이는 과도기적 상태로서 포스트 모더니즘, 그러나 세계의 문화적 추세로서 간과하기 어려운 병리현상(病理現狀)-이데올로기 문제가 와해되고 근대 이후의 산업사회를 지탱해왔던 사회제도, 합리성, 도덕, 가치관 등이 무력해지면서 개인이 사회와 제도에 대항하여 개인끼리의 총체적 합의에 도달하려는 기현상(奇現象)이 문화부문에서도 변화의 극대치를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컴퓨터 사회화가 추진되면서 개인의확대 욕구는 커져왔다. 이제 개인과 개인끼리의 제한된 관련성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개인은 곧 전체일 수 있고, 전체가 곧 개인으로 축약된다는 환상적 가능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제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개체가 되고자 하는 시도는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 곳곳에 나타나게 되었다. 과연 인간은 자유로운가? 자유롭다기 보다는 자유로운 상태를 원하고, 개체끼리의 고독과 소외와 무력감을 총체적인 것으로 확장시켜 제도 바깥의 자유롭고 뜨거운 문화를 열망하게 되었다는 편이 적절한 관측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기 모던이란 모던에 의해 표상될 수 없는 것을 표상 그 자체로 나타내는 것이며, 도달할 수 없는것에 대한 동경을 집단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좋은 형식의 즐거움이나 취미의 합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며,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상될 수 없는 것의 보다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표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기 모던 예술가는 철학자의 위치에 있다. (프랑소와 리오타르, 후디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現代美術論評 , 중앙일보사, 1987, p.177)

이와같은 언질은 모더니즘에 의해 길러진 각종의 이데올로기나 표상형식을 넘어서기 위한 강력한 제스츄어라는 것 이외에 적절히 정의하기 어려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그렇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그 대답은 포스트 모더니즘은 결코「무엇」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무엇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성격이 간명히 나타난다고 하겠다. 힐튼 크레이머가 신표현주의의 흐름을 지적해 「열정의 기호」라 언급하면서 말한 「형식적 완결에 의해 지배되든지 격렬함에 의해 지배되든지 간에-우리가 가장 가치를 두면서 가장 생생하게 조응하는 것은 그가 열정이나 사유의 기호라고 부른것이다」라고 한 그것, 「바로 지금 그것의 에네르기가 여전히 참신하면서 그 능력들이 확장일로에 있으며-그것이 열정의 기호에 있어 상당히 풍부하기 때문에 그 호소력은 대단한 매력을 갖는 것이다」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하여 포스트 모던의 들끓는 상황은 지속되는 것이라 하겠다.(이상인용부분은, 힐튼 크레이머, 열정의 기호, 시대정신, 미술문화원, 1985, p.39참조)
이렇게 봤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두갈래의 큰 실험을 보이고 있다고 간주된다. 하나는 형식적 완결성을 논리적으로 파괴하기 위한 측면과 또 하나는 자체의 격렬함으로 인하여 광화사적(狂畵師的)인 무제한의 자유를 실현하려는 것으로서이다. 형식과 표현이라는 문제는 모더니즘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져 온 내용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이 강요하는 틀 밖으로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예상을 뒤엎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주권(全州圈)에는 포스트 모던에 비유할 수 있는 좋은 작가가 있다. 이건용(李健鏞)과 유휴열(柳休烈)이다. 이건용이 최근 개인전에서 보여준, 연구실의 짐을 화랑으로 옮겨 마음대로 설치한 경우라든지, 오지 항아리에 머리를 감았다는 행위등은 화랑 시스템이 강요하는 문맥밖으로 벗어난, 철학자적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읽혀진다.
유휴열이 자주 보여온 화법(畵法),, 마음대로 뜯어붙이고 현란한 색채와 무제한적인 붓질 등은 광화사적인 작위를 통해서 순수 열정 상태를 지속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간주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 두 작가가 포스트 모더니즘을 살현하기 위하여 그렇게 작업을 벌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포스트 모더니즘 자체가 스스로 합목적성을 확정성의 과열 상태 속에서 예민하게 탈출구를 모색하는 시도로 봐야 할 것이다.
광화사적 입장에서든, 철학자적 입장에서든 오늘의 현대 문화는 차원을 달리해야 할 국면에 서있다. 과거의 중앙집권체제의 의한 지배는 갈수록 무력해지고 있으며 지역문화의 특수성이 목청을 높이게 되는 것도 특이한 상황을 반영한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90년대 한국미술의 상황이 꼭 포스트 모더니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80년대의 민중·민족미술의 대두와 함께 사회적, 역사적 리얼리즘이 거론되기도 하였지만, 90년대에 들어서서 대중주체의 문화가 형성되면서 민족적이고 또 국제적인 성격의 융합된 구조가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미술은 국제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띄어왔지만, 이제 국제주의에 끌려가지 않아도 될 만한 역량을 기르고 있으며, 주체적 시각에서 세계미술을 돌아봐야 할 입장이 중시되고 있다. 이점에서 통일 문제나 이데올로기 문제를 풀지못한 상태이되, 대립적 측면보다는 상호보완 및 완충적 차원에서 융합지점을 마련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한국의 대중주체의 문화는 미성숙 단계이다. 그러나 대중의 공감대 없이 그 어느 현대 문화도 뿌리내릴 수 없으며, 공감대의 증폭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실정이다. 한국미술이 서야 할 입장, 그 국제주의와 지역주의의 사이에서 주체적 시각이 열리게 될 때, 이데올로기간의 마찰은 소멸되리라 생각된다. 이 최소한의 가능성을 전제로 엄청난 혼돈의 시대를 경유해 가고 있는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