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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1 | 연재 [교사일기]
열악한 교육재정과 학생소외
윤 양 금·전교조 전북지부 총무부장(2004-01-27 16:49:41)

학생들은 답안지를 받자 즉시 답을 써내려갔다. 라디오를 틀자"다음의 질문을 잘듣고 맞는 답을 쓰시오"라는 소리와 함께 액센트가 다른 영어단어를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1-2분이나 지났을까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야, 이새끼야"하는 고성이 들렸다. 눈을 돌려보니 학생들은 이미 반수 이상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고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5번 문제가 유창한 발음으로 흘러나왔다. 귀를 세우고 있는 민구와 창현이가 보였고 답답한 듯 머리를 극적이는 몇몇 학생이 눈에 띄였다.
엎드려있는 학생곁으로 갔다.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답안지를 보니 끝번호까지 단정하게 1,2,3,4가 적혀 있다. 기가막힌 얼굴로 쳐다보는 내게 그 학생은 "다했어요 선생님, 이제 그만 걷고 한문공부나 하지요, 안들어도 다 알아요." 아주 지겨운 음성으로 툭 던진다. 이런 모양으로 영어듣기 능력 평가는 전국 동시에 강제적으로 20분간에 걸쳐 실시된다.
답안지를 걷고 나는 어제밤을 새우다시피 외워온 한자를 칠판에 차곡차곡 그려간다.(?) 틀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메모지를 흘끔흘끔 보며 시한수를 쓴다. 새삼 글귀가 학생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되길 기대하며 열을 내고 있는데 영호가 불쑥 일어나 "선생님, 저기 저것이 문자지요?" 한다.
그 한자는 사이간(間)이었다.
곧 종이 나고 부담스럽고 짜증스럽기만 한 교실을 급히 빠져나온다.
이 소설같은 한시간의 단편은 선발집단에서 소외된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우리나라 교육모순, 나아가 사회모순을 집약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산업구조의 파행적 진행에 따라 나타난 문제를 희석시키거나 가속화 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왔다. 일제때는 조선의 근대화를 막기위해 농림학교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조선인의 우민화를 꾀하였다. 이는 해방후 지속되다가 반민족적이고 외세의존적인 독점 자본가들이 싼임금의 노동력을 요구하면서 실업계 학생의 양성을 서둘러 실업계 고등학교 설립이 급증하였다. 그러나 학력간 임금의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지고 이에 따라 노동에 대한 사회적 가치가 절하되면서 실업계 학교의 지원율이 현격히 줄어들자 인문계 학교로 조정하여 심각한 재수생문제와 실업문제를 개인과 개개 학교로 떠넘겨 버렸다. 농업고등학교에서 종합고등학교로 이어서 인문계고등학교로 변신을 거듭한 이 학교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대졸자만이 사회적 진출이 보장되어 있고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뿌리깊은 인식은 問과 間을 구별하지 못하는 고2학년들의 학생들에게도 강제적으로 작용하여 알아듣지도 못하는 시험이라도 거짓으로 답을 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적을 올려 졸업장을 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학교현실은 곧 사회의 모습 그대로이다.
과다한 지식을 무차별하게 평균적으로 강요하면서 경쟁에서 뒤떨어진 자는 저임금을 감수하고 고등학력자의 특혜는 정당화시키는 제도적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즉 전문대학이나 지방대학 2백여명의 졸업자중 대여섯명이 진학하는 현실인데도 전교육과정은 철저히 대학입시 지향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평가받아야 될 축적된 지식이 없는 학생ㄷ르에게 똑같은 문제에 똑같은 답을 요하는 살인적인 시험제도가 학교에서 교사들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다. 인간다운 삶의 꿈을 철저히 파괴당하고 텅빈 우렁 가슴으로 졸업하는 우리의 미래는 갈등과 분노와 허무로 똘똘 뭉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년 동안의 재직기간 동안 나는 미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국어, 도덕, 사회, 세계사, 정치, 경제, 급기야 고등학교 2학년 한문까지 가르쳐야만 했다. 이는 재정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교원수를 확보하지 않은 것에 연유한다. 교원부족에 과밀학급, 시설불량은 곧 교육내용의 부실을 초래한다. 자신없는 교사가 참고서를 줄줄 외워대는 수업시간이 학생들에게 무슨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부족한 교육재정을 학부모에게 전가시키고 학교내의 부정부패를 눈감아 주어 학생의 학습으로부터 소외와 사회적 불평등의 악순환을 야기시킨다. 가정환경이 좋은 학생이 학력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것도 학교에서 담보하지 못하는 교육내용을 부모가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즉 아파트촌의 많은 학생들이 2-3개의 학원이나 과외지도를 받는 현상은 교육 재정의 열악하밍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6년 의무교육제와 공교육체제를 표방하는 국가가 과밀학급을 방치하고 과열입시제도를 고무하고 고등실업자를 계속 양산시키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현실을 어쩔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엔 교육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또한 위의 단편에 나타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다. 영어 교육의 무분별한 강조가 그것이다. 영어 듣기 평가가 있는 시간에는 그 시간이 국어이든 수학이든 한문이든 개의치 않고 실시된다. 이러한 교과정책은 미국의존적 경제구조와 정치 상황에서 비롯되며 미국의 장기적 한국지배 전략의 일환으로써 현재 국적 없는 문화가 학교에서 판을 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무국적화한 교과서와 지배이데올로기로 왜곡된 교과서로 우리나라의 장래를 의식화시키고 있는 두려운 현실이다.
나는 지금도 폭력조직에 관계된 용곤이가 절규하듯 던진말이 가슴 한켠에 아프게 자리하고 있다.
"선생님, 나는 그곳에 가야 살아있다고 느낍니다. 나를 인정해 준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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