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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 | 연재 [문화저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1)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부당성
-모든시대는 스스로의 현대성을 싫어한다. 모든 시대는 스스로보다는 그 이전의 시대를 선호한다.- -월터 맵
이 종 민 ․ 편집주간(2004-01-29 10:23:45)

틀림없이 오래전에 소진되어버렸어야 했을 논쟁에 끼어들기 위하여 점점 줄어들고 있는 세계의 숲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는 것「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가 숲이 줄어 들고 있듯 시들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비유적으로 표현-역자」이 도대체 무슨 정당성을 갖는다는 말인가? 이러한 의문에 직면하여 느끼게 된 당혹스러움은, 이 책이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또 다른 하나의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초조감 때문에 훨씬 더 고조되었다. 이러한 느낌은 1980년대를 경유하면서 모든 이론적 논의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끼어드는 방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필자 스스로가 초청되었던 각종 심포지움, 회의 혹은 특집좌담의 대부분이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것으로 판명되곤 했다. 몇 번이나 그것이 전혀 다른 것에 관한 것이라 여기고 참여를 했었기 때문에 당혹스러움은 더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결코 기이한 일은 아니다. 198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붐을 이룬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주요 선전자중의 하나인 이합 핫산이 1987년 출판된 한 논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이다.

완고한 학자들은 한 때 수상한 새로운 용어들을 회피하듯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피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이 영화, 연극, 무용, 음악, 미술 및 건축에 있어 여러 경향들을 판별할 수 있는 표식이 되었으며,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역사편찬학에서 그러했고 새로운 과학, 인공두뇌 공학 및 다양한 문화적 삶의 양식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진실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 대학 선생들을 위한 하계 세미나에서 인문학에 주어지는 국가의 관료적 후원까지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10여년 전만해도 그것을 소비사회의 배설물 혹은 일시적 변덕 아니면 싸구려 허튼수작의 또 다른 예 정도로 경시하던 후기 맑시스트들의 논리속으로도 파고 들어갔다.

이러한 핫산의 주장은 분명히 미합중국(혹은 적어도 북미: 카나다에서는 터무니없는 포스트모더니즘 열광자들이 있다)과 연관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지적 경향성이 영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영국학계의 악명높은 편협성 때문에 그 영향이 학계의 변방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는데, 예술의 최근 동향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이나 자유주의적인 좌파 지식인들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들 좌파 지식인들의 대변지인 「가디안지」가 1986년 말 이 주제에 대한 기획연재물을 냈으며 그들이 좋아하던 「신정치인」 및 「오늘날의 맑시즘」등의 잡지에서도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스트 주제를 선전한 바 있다. 지역에 따라 약간씩 변형되기는 했찌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서방세계의 다른 곳들에서 역시 수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이처럼 풍성한 논의들과 직면하게 됨에 따라 더욱 더 필자를 동요시키는 의문이다. 이러한 논의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쟝 프랑스와료타르나 챨스 젱크스 등이 제시하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는다. 그들의 정의조차 서로 일치하지도 않으며 내부적으로 모순에 차있을 뿐만 아니라 답답할 정도로 막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세가지 종류의 문화적 경향이 혼합된 것이라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그 첫 번째 것은 지난 20여 년 동안에 걸쳐 진행된 예술(이 책에서는 예술이라는 말을 회화, 조각은 물론 건축, 음악, 문학 드라마 등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할 것이다.)에서의 변화와 연관되는데, 특히 로버트 벤츄리나 제임스 스털링 등을 떠올리게 하는 건축 부분에 있어서의 ‘국제적 양식’에 대한 반작용이 그것이다. 이를 계기로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이 최초로 널리 사용되게 된다. 특히 과거나 대중문화에 의존하여 이질적인 양식을 추구하던 바우하우스나 미에스 반 더 로흐, 그로피우스의, 기능주의와 엄격성에 대한 거부는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그 분명한 동조적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회화에 있어 조형성으로의 복귀나 소설에 있어 토마스 핀쳔이나 움베르또 에코 등의 작품세계가 바로 그 예라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이러한 현대의 예술분야에서 추구하던 주제를 개념화하려는 철학의 한 흐름을 들 수 있다. 이는 영어사용권에서 197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탈구조주의’로 알려지게 된 프랑스 이론가들-특히 질르 드뢰즈, 쟈크 데리다, 미쉘 푸코-로 대변된다.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른 주장들을 펼치로 있지만, 1) 현실의 파편성, 이질성, 다의성을 강조하고, 2) 실체에 대한 객관적 설명의 가능성을 부인하며, 3) 이러한 생각의 주체를 잠재적이거나 전이된 개인의 충동 혹은 욕망의 앞뒤가 맞지 않는 뒤범벅으로 축소하려 한다는 면에서는 세 사람 다 일치하고 있다. 셋째로, 이러한 예술적 철학적 경향은 사회의 변화를(탈구조주의의 반사실주의와는 다르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서구사회에서 진행되었다고 추정되는 변화에 대한 이론은 다니엘 벨이나 알렌 투레인 등의 사회학자들에 의 해 제기된 후기산업사회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 이론가들에 의하면, 발전된 사회가 대중적 산업 생산에 의존하던 경제에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탐구가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경제체제로 변화를 겪고 있는데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9년 처음 출판된 료타르의 「포스트모던 상황」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에 있어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것은 이 책이 포스트모던 예술과 탈구조주의 및 후기산업사회론을 하나로 엮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명한 일관성은 많은 논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료타르의 다음과 같은 모던에 대한 성격 규정에서 그와 대조적인 거스로서 포스트모던의 특성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던’이라는 용어를, 메타담론(담론 자체에 대한 해석 혹은 분석-역자)과 관련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모든 과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할 것이다. 이러한 담론은 정신의 변증법, 의미의 해석학, 합리적 주체의 해방, 혹은 부의 창조 등과 같은 방대한 서술체계(우주적 원리나 사회적 질서 등을 하나의 커다란 체계로 설명하려 할 때 상정하는 틀-역자)에 명백하게 의존하고 있다.

헤겔과 맑스는 분명, 이론적 담론뿐만 아니라 사회제도까지도 그 정당한 근거를 제시해주는 ‘방대한 서술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포스트모던은 그러한 메타적 서술체계를 불신한다.’ 료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으로 규정하고 있는, 참된 이론과 올바른 사회의 근간으로서의 총체적인 틀의 거부는 분명히 탈구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다원주의 및 반사실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철학적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존해서만 그 객관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즉 ‘지식이 생산의 주요 원동력이 되는 후기산업 혹은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과학 자체가 결정적인 법칙 대신 불확정성을 추구하는 게임의 집합으로 분화되고 어떤 방대한 서술체계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오류론과 법칙의 파괴를 통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더 이상 통일성, 총체성, 하나로의 통합성을 추구하지 않는 예술의 여러 형태들은 바로 이러한 이론적 논의에 있어서의 변화에 조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분명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1950년대 의사 트로츠키스트의 일원으로서 맑시즘에 대한 반스탈린적 해석에 간여했던 료타르는 「포스트모던 상황」을 출판할 즈음 사회주의 혁명의 목표를 부인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는 틀림없이 체제애 대한 “순수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1970년대가 저물어가고 있는 지금, 이러한 종류의 대안이, 우리가 대체하려 하는 옛날의 체제를 전혀 닮지 않은 것임을 안다.’ ‘우리 모두’란 틀림없이, 1968년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들에 의한 맑시즘의 거부를 1970년대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현실화한, ‘새로운 철학’에 동조했던 파리 지식인들의 의견일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십여년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주제는 영어사용권의 좌파 지식인들의 경향과 잘 일치한다. 그리하여 후기 맑시스트의 두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프의 주장- 즉 사회주의는 역사발전의 추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이나 사회변혁의 원동력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의 위상을 강조하는 고전주의적 맑시즘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 의해서만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서구사회가 적어도 19세기와 20세기의 산업적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맑시즘의 결과론적인 결합은 「오늘날의 맑시즘」지에 의해 잘 대변되고 있는데, 1980년대 내내 영국좌파에 대한 ‘고전주의’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 였던 이잡지는 얼마전에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음을 선언한 바 있다.

좌파가 이 새로운 시대와 절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방관자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고전적인 포드식의 대량생산경제가 컴퓨터와 정보 기술 및 로봇산업에 근거한 좀더 새롭고 유연한 포스트포드식의 경제체제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경제적 변화 그 이상을 의미한다. 우리의 세계는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거대도시, 독재국가, 주택지의 확산, 민족국가 등은 기울어 가고 있다. 반면에 유연성, 다양성, 특수화, 유동성, 통신, 탈중심화, 국제화 등이 증가일로에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의 주체의식, 자아의식, 혹은 주관성도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변인에 의해 정의된 지형이다. 즉 그것은 포스트모던 예술과 탈구조주의 철학이 반영하고 있으며 그들 역시 참여하고 있는 변화된 사회로서, 새로운 종류의 정치를 요구하고 있다. 필자는 이 모두를 거부한다. 필자는 우리가 ‘새로운 시대’, 지난 2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지배적이었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탈산업적 혹은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탈구조주의자들의 주요 주장들을 부인한다.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허위다. 포스트모던 예술이 이십세기초의 모더니즘과 질적인 차이를 모여주고 있다는 점도 매우 의심스럽다. 더구나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많은 글들은 지적으로 조야하고 피상적이며 종종 무식하기도 하며 가끔은 앞뒤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방금 내린 판단에는 약간의 수식이 필요하다. 현재 탈구조주의자들로 알려진 철학자들의 작업이 이런 식으로 가볍게 처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드뢰즈, 데리다, 푸코 등이 근본에 있어 틀렸을 수는 있으나 이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상당한 기술로 정치하게 개진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매우 가치있는 통찰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사실까지를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포스트모던 시대라는 개념에 반드시 찬성을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죽기 직전에 포코는 이에 대해 냉소적으로 평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포스트모던이라 부르는 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나는 그 정도로 최신식 유행에 민감하지는 않소.” 1950년대에서부터 1970년대에 걸쳐 발달하여 결과적으로 ‘탈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몽뚱그려진 철학적 이론과, 지난 10년동안 포스트모던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행해진 이런 이론에 대한 전용과는 분명 구분지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주로 북미의 철학자, 비평가, 사회이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드뢰즈, 데리다, 푸코를 탈구조주의의 아류로 치부하여 한쪽으로 제껴두면서 등장한 료타르나 쟝 보드리야르라는 두명의 파리 출신 이론가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포스트모던 예술에 대해서도 비슷한 점이 지적되 수 있다. 조이스, 피카소, 혹은 미에스 등 모더니스트들의 걸작과 비교할 때 최근의 소설이나 그림 혹은 건축이 지니는 장점 아니면 단점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와 그 반대자들의 논점들은 종종 뒤바뀌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 판단과는 무관한 원초적인 문제가 있다. 이 책의 주 관심사중의 하나가 될 이 문제는 예술의 역사에 있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두개의 다른 시기의 것으로 확연히 구분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럴 수 없다면 그래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출현 혹은 존재에 대한 주장이 필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허위라면, 우리는 그 다음의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가 풍성하게 진행되고 있단 말인가? 왜 지난 십년동안 서구의 그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경제적 체계나 문화적 관습에 있어 직전의 과거와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고 믿게 되었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또 그러한 단절에 대한 믿음을 반박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철학, 사회이론, 역사적인 글의 수렴에 의해 규정되는 공간을 꽤 불편하게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분야들을 총괄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특징지어지는 지적 전통이 있다. 맑스 자신과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그람시 등의 고전적인 사적 유물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기독교를 계몽주의자들처럼 일련의 거짓된 믿음들로 보지 않고 계급사회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인간의 진정한 욕구를 뒤틀린 표현으로 간주했던 맑스의 종교비판과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유사하게 필자는 여기에서, 포스트모던 예술과 탈구조주의 철학 및 후기산업사회론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는, 우리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 부당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역사적 문맥에 위치지울 것이다.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징후로서 가장 잘 조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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