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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 | 연재 [문화와사람]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삶 노동자의 집 박복실 노 동 사 목
조 명 원 편집위원(2004-01-29 10:54:28)

「여성과 삶」에서 맨처음 만나본 여성 박복실씨는 태창 해고노동자이며 지금은「전주 노동자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노동사목이다. 그를 찾아 반문한 노동자의 집은 세평 남짓한 소박한 사무실로 쿠션이 너무 낡아 무심코 앉은 필자를 당황케 했다. 그러나 정작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근천 골목의 더작은 방 한칸은 그만큼 더 소박했다. 방안의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책상과 전태일, 문익환 등이 꽂힌 책상이 주인보다 훨씬 호사를 누리고 있는 형상이었다. 조심스레 담요속으로 다리를 들이민 온돌바닥이 따듯해 벽에 기대 앉으니 그와의 거리가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무슨 얘기를 할까요?” 먼저 서두를 꺼내는 그는 방문자보다 한결 침착하고 여유가 있었다. 고단함과 씩씩함이 하나된 얼굴과 걸직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반생역경(그는 이제 겨우 서른 네해를 살았을 뿐이므로)을 겨우 구세시간의 만남으로 수용하기는 벅찬일이었다.
그는 십이륙 직후인 80년 1월 15일 태창에 입사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을 시작한다. 김제 용진에서 농민의 딸로 태어나 학교를 마친후 ‘동생 밥해주며 그냥 지내’는 동안은 취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태창 통근버스가 79년부터 동네까지 들어오게 되면서 이웃사람들에 휩쓸려 들어간 회사였다. 이왕이면 미싱일을 배우고 싶었지만 ‘덩치가 커서 퇴짜맞고’ 검사부에서 일한지 3개월, 그는 어느덧 노조대의원으로 발탁될 정도로 성실한 일꾼이 되어 있었다. “79년에 생긴 노조의 위원장, 간부들이 전부 회사간부 중심이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이뻐하는 사람이 뽑힌거죠.” 그 당시 대의원으로서의 노조활동이란 기껏 어울려 다니며 먹고 놀고 하는게 전부였고 또 그것이 재미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회사에서 “찍혀 쫓겨겨나고” 지치지 않는 복직투쟁을 벌이는 투사로 변신하게 되는 계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81년 2월 노조임원의 임기 종료에 따른 선거를 맞아 5공의 입김이 작용, 회사에서는 유니언샵9=고용된 노동자는 의무적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어 있는 제도)에서 오픈샵(=희망자에 한해 가입하는 제도0으로 전환시켜 노조원을 50명으로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회사에서 내세운 총무과 직원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조합장을 뽑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엔 1,200명 중에 30명도 안되는 남자등에게 조합장 해보라고 열심히 쫓아 다녔어요. 근데 아무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 고민을 안은채 평소 다니던 이리 찬인동 성당 미사에 갔다가 만나게되는 노동사목 문진주씨, 그가 오늘의 박복실씨를 있게 한 장본인이다.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자한참 조용히 듣고 있던 문진주씨가 딱 한마디 하더란다. “니가 허믄 어떠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가 노조위원장이 되어야 한다는 극히 자연스러운 얘기가 그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내가 어떻게・・・・・” 꼬박 이틀을 망설였다. 공고기간이 끝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결국 회사, 관(官), 시(市)가 합작으로 만들어낸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 당해 추천을 맡았던 친구가 포기하는 바람에 자신을 추천하는 용기를 발휘하여 당당히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그때부터 1년 3개월여의 시간은 회사와의 치열한 줄다리기, 숨바꼭질 그것이었다. 회유와 탄압을 적절히 이용한 회사의 노조깨기 작전이 시된 것이다. 전에는 얼굴도 안내밀던 이사가 작업실을 돌아다니며 소리치는 “야! 박복실, 너 이리와 봐”식의 조롱과 무시를 단순히 유치한 발상이라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이에 노조위원장 박복실씨는 “그럼 나도 당신 이름 부르겠다”로 맞섰다고, 그들은 그가 다니는 성당의 지오쎄(JOC:카톨릭 노동청년회)와 연계시켜 좌익 용공으로 선전하는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기를 3개월, 그 파란 속에 서도 노조는 임금 18% 인상(당시 타회사는 10-11%인상) 이란 성과를 올림으로써 회유와 협박에 흔들여주었다. 여기서 잠깐 노동자들의 임금실태를 돌아보자. 80년 입사당시(전국적인 ‘주기적 불황’에 시달릴 때에도 섬유업계만은 호황을 누렸다) 일당 2,000원 정도였고 조합장이었을 때 한달에 8만원을 받았으며 그후 86년 10월까지 10만원을 넘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한다. 근무시간은 아침 여덟시 반에서 저녁 일곱시 반까지 111시11가1s, 자1w1은 연자1d과 이따1금1 철야까지 해서 꼬박꼬바1r 수당을 보탠 것이 그 정도라면 그보다 열악한 조건의 훨씬 많은 노동자들이 어떠했으리라는 걸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합원들의 신뢰를 회복한 노조는 새로운 의지를 결집하기 위해 5월에 무주구천동으로 단합대회를 다녀왔다. 형사들이 졸졸 따라다녔지만 그들은 소리소리 노래 부르고 춤추며 신이 났다. 호사다마라던가. 장부정리에 미숙한 회계담당 노조원이 단합대회 경비내역을 회의비로 기록하는 바람에 이 행사는 노조탄압의 또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는 경과를 낳고 만다. 11월 정기 감사가 도지사 특별감사의 명목 아래 회사, 노동부, 검찰 합동작전으로 연출되었고, 이듬해 4월의 업무조사는 그들에게 공금유용의 올가미를 씌우는데 성공했다. “조합원들에게 박복실이 도둑년이라고 떠들고 다니더군요” 담담하게 얘기하던 그의 표정이 굳이진건 오히려 그 다음이었다. “노조를 보완하고 잘못을 시정해 준다는 업무조사의 주업무는 바로 ‘노조깨기‘예요. 그 실체를 알아야 해요.” 실제로조사가 개뜨린 노조는 수 없이 많다고 한다.
82년 5월 31일 그는 7명의 조합간부(모두 여성노동자) 전체와 함께 해고되었다. 이뉴는 회사에 불이익을 가져왔다는 것. 한차례의 싸움은 이렇게 끝났다. 그 공로로 노동부소장은 일계급 승진되었고, 태창노조는 1년 3개월만에 다시 어용노조(현재 노조위원장은 사장 아들0로 전락, 그 질곡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만 3년의 복직투쟁 기간동안 거의 절반응 경찰에서 살았으며, 최근까지도 20여일의 천막농성을 벌일 만큼 끈질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러나 5공시절 부당 해고된 공직자들이 최근 법원에서 속속 복직 판결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해고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박복실씨는 자신의 원래의 자리를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다. 그후로 그는 일곱 번을 더 해고된다. 한편으로 복직투쟁을 하면서 광전자, 경성고무 이외에 지금은 자라지고 없는 소규모 공장들을 전전하다 군산에 있는 완구공장을 끝으로 노동현장을 떠난다. 블랙리스트에 사진이 없었던 당시 남의 이름으로 들어간 회사에서도 전적이 드러나 쫓겨나는 데는 3개월로 충분했던 것이다.
역시 문진주씨와의 인연으로 노동사목이 된건 노동현장을 떠난 지 2개월 후인 86년 12월의 일이다. 끝나지 않은 싸움을 위해서라도 노동현장을 등질 수는 없었던 것, 주로 지역내 사업장들의 노동조합결성을 돕고, 노동자와 산담하는 일을 하면서 찾아 다니는 현장과 그곳에서 만나는 노동자 수는 오히려 훨씬 많아졌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필자는 그에게서 여성의 모습을 구별해내기 어려웠다. 굳이 찾으려면 없는 것도 아니겟지만, 여성문제로 초점을 옮기려하자 다른 사람들 얘기로 대신하는 그를 볼 때 필자의 아둔함 탓만은 아닌 듯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성문제를 따로생각하지 않아요, 여성을 생각한다 해도 어느새 노동자 전체의 문제로 가 있거든요” 그러나 그가 정녕 여성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건 아니다. 그가 경성고무 시정을 들려준 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도 남는 배려였다. 처음엔 신발 밑창에 신나칠을 했는데 이틀만에 고피가 터지더란다. 부서이전을 신청했지만 통하질 않아 자퇴를 한후 다시 입사하는 방법으로 옮긴 곳이 생산부였다. 그런데 생산부엔 한가족 모두가 나와 일하는 사례가 여럿있었다. 같은시간동안 똑같이 일하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 이 문제 사무직 노동자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에 대해 그는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 “여자는 남자의 보조역할이랑 거죠. 가장이 벌고도 모자라는 부분을 아내가 조금 도와서 생계를 일은 여자가 되다 하거든요.”
또 하나, 같은 여성노동자에게 차별을 두는 예도 있다. 노동사으로 일하면서 접하게된 남원전자가 바로 그곳. 남원전자 내에는 이름만 다른 회사가 또 있었는데(요촌전자) 그것은 기혼여성노동자들을 따로묶어 일일 고용으로 부리기위한 공육책의 산물이다. ‘바로 옆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아가끼들은 임금 노동자니까 구정때 100%의 상여금을 주고, 아줌마들은 전에 설탕 한포씩 주던 것도 아까와 고등어 2,000원 어치를 주었대요.“ 결국 분노한 기혼여성노동자들의 농성이 남원전자 노조결성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뒷얘기다. 그러나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또 있었다. 기업주의 횡포에 의한 차별이 본원적인 것이지만 여성 노동자가 지니고 있는 계층의식 또한 극복해야 할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어느 병원에선 노조결성을 추친하면서 그가 느낀 완강한 벽은 간호사의 특권의식이었는데 그들은 같은 피억압자인 조무사나 식당잡역부 보다 우월하는 생각을 갖고 있더라는 것이다. 임금인상 폭에서부터 심지어는 ’노조를 같이 한다‘는 사실에 합의하기도 쉽지 않았다니 과연 ’적은 내부에 있는 것‘인지.
그가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덧붙인 말은 그런 의미에서 새겨 들어야 할 것이었다. “나도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편이예요. 일에 매달리다 보면 주변의 사소한 일에 일일이 신견을 쓸 수가 없죠. 말로는 노동운동을 주장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주위사람을 짓밟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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