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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 | 칼럼·시평 [문화칼럼]
올바른 예술적 전유에 대한 한 문예운동가의 단상 1압박축구 시대의 예술가의 촉수
김원호 전북노문연 의장(2004-01-29 11:12:52)


천박한 자본주의 대중문화가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감각’을 달콤하게 강요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서도 감동과 깨달음 그리고 의식적 재미보다는 ‘자극’이 그를 대체하고 있다. TV를 틀때의 무감각 수준으로 예술이 향유되고 있는 것이다. 예술적 전유(객관적 사물을 반영하고 변형하여 자기화시키는 것)의 올바른 방법이 점차 소멸되고 있고, 예술생산과 향유의 관계가 자유주의적으로 치매화되어 ‘어떠한 성숙의 긴장이 축소됨으로써 상호 핑계대며 ’어렵다‘고 얘기하고 있다.
모든 사물이 우리의 삶속에서 현상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다. 예술도 감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직관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등이 중층적으로 뒤섞여 있는, 독특한 인식과 가치평가 체계이다. 그 독특함이란, 예술이 추상-이론적으로만 분석을 할 수 없는 특수한 형상적 언어체계를 갖고 있어서 인간의 정서에 호소하여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복합체인 예술이 ‘감각으로 대체되고 있는 남한 예술적 풍토 속에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이어야 하는 창작자와 향유자는 공히 어떠한 고통과 그것이 틀림없이 보장해주는 미적 기쁨을 담보해내야 한다.
이 연재물은, 기본적으로 모순인 우리 사회 속에서 대중이 자신의 미적 이상을 실현시켜나가기 위한, 즉 예술을 우리의 삶 속에서 올바르게 전유해내기 위한 한 문예운동가의 단상(斷想)이다. 예술에 대한 교양과 사랑이 높아지는데 이 단성정도 수준의 글이 기여를 하였으면 한다.


TV를 통해 어쩌다 스포츠를 즐기는 필자는 지난번 월드컵축구중계 때부터 유행한 소위 “2-5-3 압박축구”를 보면서 앞으로 축구는 참 재미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전까지는 내노라 하는 축구스타들의 ‘환상적인’ 개인기, 양쪽 터치라인을 따라 질풍같이 짓쳐들어가는 현란한 드리볼, 상대방이 쳐놓은 수비벽을 벼락치듯 부셔버리는 돌파력들을 보면서 시원한 쾌감을 느꼈었는데, 폭이 20m 정도의 미들필드 지역안에서 스무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공 하나를 우르르 쫓아다니며 이전투구하느라고 그 귀한 시간을 다보내는 이놈의 압박축구를 보니 애들 동네싸움하는 것처럼 쪼잔하게만 보여졌다.
그런데 차범근 감독에 의해서 남한의 프로축구에도 도입된 이 압박축구라는 신조류는 묘한 현대적 자극을 갖고 있는데, 다름아닌 경제적 촉수의 치밀함이다. 광할한 개활지에서 툭툭 차대는 이전의 축구스타일은 일견 젠틀하면서도 우매한 맛을 주었는데, 공이 빠져나갈 틈새가 엄청 좁아진 곳에서 그 활로를 찾기 위해 승냥이 같은 눈빛들을 휘둘러대는 압박축의 모양새는 흡사 증권브로커의 투기눈빛이다. 그래서 그 좁은 틈새를 노리는 집요함과 그를 찾았을 때는 놓치지 않고 터트리는 약아빠진 골은 이전보다 더욱 포르노적인 재미를 물씬 풍긴다. 미세한 틈새에도 끈질기게 결정적 활로를 찾는 이 집요함의 현대성에 우리의 대중은 변함없이 열광하게 되었다. 사실 현재 진보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는 민중들에게 는 자극정도겠지만 그 볼품없는 내용일지라도 재미를 만들어내는 프로페셔널한 촉수는 여전히 지금 대중의 관심을 동원시켜 내고 있는 것이다.

자, 우리의 예술은 얼마나 혁명적 프로의 냄새가 날까? 이념의 게트림만 꺽꺽 뱉아내며 “나는 내 돈 내고 술먹었고”라는 교조적 열정에 아직 스스로 취해있지는 않을까? 반대로 그 자체로는 소시민적으로 짜그라들 수 밖에 없는 억지양심으로 보는 의지적 희망만 가지고서 현실을 누추하게 가슴 아파 하고 나 있지 않는가?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면서 ‘87년 투쟁을 만들어낸 우리의 발전한 대중들에게 예술가들은 얼마나 당대의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예술감동을 촉촉하게 보장해주고 있는 걸까? 그 이전에 우리 예술가들의예술적 촉수의 현실적 치밀함은 몇 점?현실의 모순이 조건지워준 ’압박예술‘의 이전투구 미드필드를 뚫고 나와 감동어린 골을 혹 만들려고는 하고 있을까? 또 그 이전에, 압박예술인지 봉건적 개활지예술인지 당대 예술위상은 점검조차나 되고 있는지.....

예술은 살아있는 인간의 희노애락부터 출발한다. 예술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런대로 괜찮은’ 취미가 아니라 생산적 ‘노동’인 까닭에 예술가들에게 어떤 의무를 부여하는데, 그것은 대중보다 깊은 희노애락의 감수성. 즉 예술적 촉수의 현실천착성이다. 그래야 예술적 인식과 가치평가를 만들어서 대중을 감동을 통해 진보시켜내는 그 고유의 예술기능이 일단 초기화(formatting)될 수 있다. 대중보다 먼저 기뻐할 줄 알고, 대중보다 먼저 슬퍼할 줄 알고, 대중보다 먼저 분노할 줄 알아서 총이라도 잡을 수 있는 그러한 삶의 깊이없이. 즉 미세한 사물의 변화까지 감지해내어 그 본질을 해석해내고 그래서 패배 속에서도 낙관을 만들어내는. 현실을 생생하게 증거해내고 진보시켜 주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최소한 ‘노동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될 수 있겠는가? 물론 나아가 보다 분명한 사실은, 예술가의 노동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역사-사회적으로 진실되고 풍부하게 해야 하는 ‘사회적’노동이어야 함은 더말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남한의 현재’는 변혁시대이니까.
예술가는 일상생활에서도 예술적으로 조직할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는 일상의 채널 속에서도 ‘예술채널’을 따로이 운영한다는 것인데 제 현실의 풍부함을 보게해 줄뿐더러 그로부터 올바른 예술적 전유를 출발시켜 준다. 현실의 현실적 소재는 무궁무진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소재의 부족감에 스스로 허덕이는 예술가들의 못된 게으름은 이 예술채널의 운영이 관성화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으름이란 생활의 편의적 느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인 것이다. 부지런하고 끈질기게 현실에 천착하는 예술촉수의 넓이와 깊이의 확장관성만이 대중에 대한 예술적 예의를 갖춰줄 수가 있다.
우리의 예술은 이제 ‘설움과 꿈’ 정도를 노래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찍이 엥겔스가 강조했던 ‘고도의 사상적 자각성과 세익스피어적 생생함과 풍부함’만이 실천적 휴머니즘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야 “그 휴머니즘은 강간당한 의미로서의 휴머니즘이 아닌 사람과 사회의 본질을 밝혀내는 휴머니즘”이 될 수 있다. 맑시즘이란 기본적으로 역사 - 사회적 실천의 휴머니즘이지 않겠는가. 따라서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예술은 설움과 꿈이 아닌 ‘절망과 희망’을 제대로 움켜쥐어야 한다. 우리의 변혁은 아직 ‘비극적 낙관’의 시대인 것이다.
요즘 우리 예술가들이 즐겨 말하는 ‘새벽’이라는 시어의 무게가 그 객관적 당대성이 상당히 없다라는 사실은 아직 제대로 절망과 희망을 변증시켜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의 희망을 제대로된 절망속에서 확보해나가야 할 전망의 영역과 수준의 현실성을 내용적으로 구별못하고, 자의적으로 뭉뚱거려 대충 뭔가를 억지로 그리워할 뿐이어서 어떤 구체적 새벽을 말하는지 실체감의 감동이 없다. 대중에게 책임감없는 자기의 양심 어루만지기 수준의 새벽은 자위 낭만일 뿐이어서 고통 속에서 잉태되어 나올 수 밖에 없는 구체적인 남한의 아침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20년전의 시인 김지하의 새벽, ‘캄캄한 밤에 그토록 / 새벽이 오기를 애가 타도록 / 나팔꽃 위에 맺힌 영롱한 아침이슬을 볼수만 있다면’ 이라는 설움과 꿈의 새벽은 그 시대의 물질운동과 변혁운동의 수준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어여쁜 서정이었다고 치자. 주․객관적으로 급격히 발전한 90년대의 사회-변혁의 수준에서, 30년전의 시인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는 오기조차도 없는, 현실적 예술촉수조차도 없이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치장된 ‘민족’으로 뭉뚱거려 폼만잡고 억지 노래하는 새벽 정도로는 90년대의 현실적 대중에게는 전혀 감동을 줄 수가 없다.
반면 현실주의적 예술촉수를 갖고 있는 리얼리스트 김정환의 시는 우리에게 90년대 수준의 절망과 희망을 보여준다. 그의 시어는 철저히 변증법이어서 90년대의 현실성을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새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이제 새벽은 / 흰 옷을 입고 어둠을 양손으로 밀어내는 / 수줍은 몸짓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 이제 새벽의 옷깃에는 / 핏덩이가 엉겨 있을 것이다 / 우리는 누구나 / 새벽이 우리가 잠든 사이에 / 어느 틈에 와 있어 주기를 바란다 // 새벽은 이제 / 어둠을 산산조각으로 까부수는 / 비명소리로 올 것이다 // 혼미한 두뇌세포가 흔들린다 / 수없는 어둠의 산산조각들이 / 다시 갈라지는 것이 보인다 / 그들은 흐린 빛깔로 우리 앞에 다가와 / 눈부신 태양의 피흘림을 펼쳐 보일 것이다 / 이름 부를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외쳐 부르는 / 수많은 양팔벌림의 장관을 펼쳐 보일 것이다 // 깊은 욕망이 짧은 아픔을 짓누르듯이 / 고통의 생애가 죽음을 거부하듯이 / 이제 새벽은 그렇게 매일매일 / 힘들이며 올 것이다 / 그것은 이별의 새벽이 아니다 / 아픔의 기쁨곁, 아니면 기쁨의 아픔 곁 / 영원토록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탄생의 피비린 눈부심이다 // 우리가 일어서야 할 피비림. / 우리가 이룩해야 할 눈부심 / ”(「끝노래, 새벽」) 그는 기쁨을 얘기하기 전에 꼭 고통을 요구한다. 우리를 ‘벅찬 한줌의 먼지’로 여기며, 우리가 바라는 것은 ‘훨씬 더 아픈 / 훨씬 더 심장이 터질 듯 벅찬 / 감격으로 오리라’고 말한다. ‘밤새 너의 두 발목에 / 서릿발 같은 대못이 들어와 박히질 않나’라는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너희들의 상처로 나타나리라’는 사랑과 그리움을 말하며, ‘추억도 그리움도 핏발서리게 하라’한다. ‘우리가 없다면 아름다운 / 이별도 없다’하고 ‘여전히 패배로 놀라움도 갈 길도 우리 속에 있다 / 물론 희망은 우리속에 있다’며, 지배자에게는 ‘고통이 없으므로 / 기쁨 또한 그들의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절망이 한 십년 이어질 것임을 알고 / 그것이 또 길일 것임을 알’기 때문에 ‘절망은 더욱 흔쾌’한 것이며 ‘관념뿐이라면’‘희망은 몸살을 앓’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서정의 분신(焚身), 나는 그 길을 질주해 왔다”라며 자기양심 어루만지기의 서정이 아닌 더 높은 고통의 서정을 찾아다닌다. 그는 당대가 요구하는 예술적 촉수를 가지고 있다.
이런 그의 시를 하도 난해하다고 해서 그의 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난해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싸워보았다. 제대로 자기 근거를 대지 못하며 하여튼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다수였따. 알고 봤떠니 그 이해란 예술적 감동의 교호차원엣의 예술적 인식과 가치평가의 수준의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 이론적 차원에서 자신의 인식을 쉽게 도해시켜주지 않는다라는 무책임한 투정이었다. 대중의 예술적 인식과 가치평가의 수준도 점차 제고되어야 한다. 물론 이는 당대의 전형성을 획득한 빼어난 예술전범을 통한 예술적 감동이 많은 부분을 보장해줄 것이지만 예술을 향유하는 개체도 예술을 ;이해‘(=향유)하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하며 그 익숙함의 접점은 당대를 살아가는 각 개체의 희노애락의 깊이, 즉 각자가 꾸려가는 절망과 희망의 깊이 수준이다. 지금은 예술가만 시대를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체도 아플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 모순의 깊숙한 갈등 속에서 나오는 한 편의 시가 단박에 좋아질 수는 없다. 설사 어렵더라도 대중의 사회심리를 건드리고 궁금한 것을 노래한다면 이미 향유주체의 ’이해‘는 시작된 것이다. 자신 삶의 바람직한 성숙과 더불어 읽을수록 점차 좋아지는 것이 빼어난 당대의 시인 것이다. 예술향유자의 ’현실촉수‘도 날카로와져야 한다.
예술가들이여, 그대의 예술적 감수성이 최소한 프로페셔날하다면 예술을 대중들에게 거저 ‘막주지’말자. 아직 예술가보다 더욱 현실적인 대중들이여, 예술을 거저 먹지 말자. 대충해대는 예쑬을 얻어먹는 거지는 아니지 않은가 ? 90년대의 예술적 촉수조차도 없는 시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자존심과 그 책임성을 갖자. 절망과 희망의 90년대 남한의 수준속에서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 서로들을 혁명적 예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보자.
“그러나 저는 이 늦은 5월까지 살아 / 나이든 누님의 눈 밑, 잔주름같이 / 다시 당신을 유혹하고 있어요 / 오셔도 오셔도 더욱 멀어지는 / 이렇게 먼산, 먼 발치에서.”(김정환, 「철쭉꽃, 5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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