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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 | 연재 [문화저널]
고창 오거리 당산
이상훈 편집위원(2004-01-29 11:15:37)

민속신앙은 마을사람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이루어져야 그 본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렇게 해야만 마을 공동체의 식으로서 민속신앙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에 와서는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행하여지고 있음을 볼 때, 신성한 의식이 형상화되고 박제화되어 본래의 의미가 변질된 곳이 상당히 많다. 오늘날 우리가 민속신앙을 고찰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 생활상만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생활에 활력을 제공하고 미래 문화를 올바르게 창조하기 위한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다.
고창읍을 중심으로 한 동, 서, 남, 북 중앙에 위치한 소위 “오거리 당산제”는 돌기둥(짐대, 화포), 선돌, 당산나무 등으로 복합되어 마을굿의 원형과 신앙형태 변화된 모습까지도 파악이 가능한 대단히 귀중한 민속자료이다.
오거리 당산제(이하 당산제를 마을굿)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는 「고창 오거리 당산 보존위원회」에 의하여 관주도로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래 마을굿은 마을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빌기위한 것인데 지금의 그 모습은 원래의 것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오거리는 즉상거리(동부, 천북동), 중거리(남부, 중앙동), 하거리(서부, 신흥동), 중앙(중앙, 중앙동), 교동(북부, 교동) 등에 위치한 당산을 일컫는데 여기에서는 전체적인 맥락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돌기둥, 선돌, 당산나무 등으로 구성된 오거리 당산은 그 재료가 돌로 형성되었기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된 것으로 생각되며 대부분의 당산나무는 고사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중거리, 하거리, 중앙, 교촌당산의 할아버지당산으로 모셔지는 것은 돌기둥인데 그 형태가 모두 돌기둥에 관석을 올려 놓은 것이다. 그 명칭은 짐대, 화표라 부른다. 또한 그 형태에 기인하여 갓당산이라고도 불리운다. 각기 돌기둥 정면에는 “천년완골흘연진남”(天年頑骨屹然鎭南-중거리), “진서화표”(鎭西華表-하거리), “시주”, “화주”, (施主, 化主-중앙), “진북화표”(鎭北華表-교촌) 등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창읍 사방을 수호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고창읍내를 비보(裨補)하기 위해서 세워짐). 즉, 일설에는 고창읍의 지형이 배형국으로 되어 잇기 때문에 배가 떠 있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사방과 중심에 당산돌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는 특히 하거리 당산 선돌에 씌여있는 “고창읍내 수구입비”(高敞邑內 水口立碑) 기록은 고창읍내 서쪽이 터져있어 서쪽으로 수기(水氣)가 흐르기 때문에 수구를 막는 역할을 한다고 보겠다.
그리고 시주, 화주와 같은 명문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거리 마을굿(예전에는 각기 마을별로 모셔졌다)도 여느곳과 마찬가지로 생기복덕에 맞게 제주를 뽑고, 비용, 제물 등을 마련하여 음력 정월 초에서 보름날까지 사정에 따라 행하고 보름날에는 읍내를 동,서로 나누어 연등놀이와 줄다리기를 행하면서 그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한다. 줄다리기는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여 여자편이 이기도록 한다.
보통 짐대가 나무로 만들어진 지역에선 마을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마을굿이 지금까지도 행하여 진다. 이는 나무이기에 으면 신앙대상이 없어지므로 다시 짐대를 세워 마을 굿을 행한다(만약 짐대를 세우지 않으면 신앙은 단절되고 마는데 오늘날까지도 행하여 진다는 것은 매년 짐대를 한두 기씩 세우면서 마을굿이 모셔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거리 마을굿의 신체는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존되고 관주도로 매년 행사를 하고 있기에 존속할 수 있으리라 보여지나 진정한 민속신앙의 의미를 상실되어 간다는 점에서 지역주민들의 보다 자발적인 참여가 아쉽기만 한다. 그러나 당산이 단독으로 있지 않고 여러 복합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문화의 다양성과 포용성이 민속신앙에 배어나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민속신앙의 창조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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