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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2 | 칼럼·시평 [문화시평]
「탁월한 안보적 상상력의 기록」- 남자는 위, 여자는 아래를 보고 -
이종남․월간 人物界 기자(2004-01-29 11:17:52)

지난 연말 전주에 소극장을 개고나해 전북 연극계에 새로운 장(場)을 마련한 극단 ‘창작 극회’는 제 68회 공연작품으로 ‘남자는 위 여자는 아래’를 무대에 올렸다.
이 작품은 전국 초연(初演) 이어서 작품명에 있어서 지금까지 행해진 얼치기 ‘포르노 연극’ 과 연결지어져 세인들의 오해를 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제인 ‘탁월한 안보적 상상력의 기록’을 통해 엉뚱(?)하게도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분단 현실과 민족 자주화 문제가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케된다.
즉 작가 안종관씨는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충족조건에 연결지어 통일문제 및 반독재 투쟁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을 처음부터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전주에서는 지난 84년 전북대 기린극회에 의해 ‘兎先生傳’이 공연되었고 오랜 침묵 끝에 ‘남자는…’가 발표됐지만 이 고장 관객들에겐 그다지 낯선 작가는 아니다.
극작가 안씨는 1943년 충남 부여 출생으로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4년 국립극장 장막회곡 공부에 ‘늙은 수리, 나래를 펴다’로 등단했다.

〈정권의 모순과 사회 부조리 꿰뚫어〉

한국 사회의 현 상황에서 당면한 민족적 과제는 궁극적으로 민족구성체 안에서 역사적 진보의 실현을 뜻하는 자주적인 민족문화의 창출과 발전을 가져오면서 민족자주통일로 이어가는데 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이는 우리 민족이 일제등의 굴절된 근․현대사를 멍에로 한 채 5․17, 6월 항쟁이라는 투쟁을 거친 뒤에도 계속되는 ‘억압과 독재’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민족미술의 예술행위에 대한 탄압’을 소재로 이러한 체제하에서 통일문제를 악용해 정권유지책 대외 선전용으로 사용하는 정권의 모순과 사회의 부조리를 냉철히 꿰뚫고 있다.
물론 이같은 냉철한 시각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뿌리로 하며 ‘새로운 무대형식’의 접목에서 비롯된다.
지난 89년 8월 미술계에도 평양축전으로 인한 파장이 크게 일었다. 평양축전 전대협 대표 임수경씨 방북사건을 수사중인 안기부가 평축에 걸개 그림 〈민족해방운동사〉슬라이드를 보낸 사실과 관련, 민족민족미술운동전국엽합 건설준비위원회(민미련건준위) 공동의장 홍성담씨 등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제작등의 혐의로 구속했던 것이다. 이어 미술운동탄압은 가속화되었다.
이 연극은 당시의 이런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사건경위와 가담자를 ‘재판놀이’라는 형식을 빌려 펼쳐진다. 우선 우리는 무대에서 사진이 진행되는 동안 적절하게 배치돼 사용된 슬라이드 그림을 보면서 작가가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프랑스 작가 사무엘․베케트의 작품 ‘연극’에서 보이는 시간과 구성의 치밀성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관객들에게 합리적 현실비판의 끈을 제공한다.

〈과감한 관객의 참여 유도 필요해〉

연출가 김정수씨는 공연팜플렛에서 ‘연출의 면’을 통해 어려웠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 …실제 공연 현장을 쉽게 연상하지 못함에서 오는 감정의 척도가 시종 부담스럽게 가로막고 있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작품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주제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음은 확실하나 일반적인 극적 구성이 아니기에 자칫 산만해질 우려가 대단히 높았다.”
덧붙여 그는 “이 작품이 한 연출의 뛰어난 개인적 감수성에 의존하기보다는 모든 참여자의 충분한 의식교류로 조합”해 나가는데 제작의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인지 사건의 주제는 예술의 자유 및 민주화 투쟁, 통일문제등이 함께 뒤섞여 다루어지면서도 하나하나의 장면과 과장이 각기 노는 산만함이 ‘재판놀이’라는 행사속에 용해되어 일관되게 사건을 이끌어가 훨씬 강렬한 극적효과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문화란 문화로부터 소외된 민중이 자기문화를 누릴 수 있는 생활여건을 쟁취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좀더 과감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지 못한데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
연극이 단지 ‘연극을 위한 연극’ ‘순수연극’ ‘보여주는 연극’이 아닐바에야, 그리고 열린 무대를 좋아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라면 연극이 사회구조의 변혁에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민족적 과제를 실현할 이는 민중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객체로만 남아있는 민중을 문화의 주체로 일으켜 세워 민중 스스로 제(諸) 문제를 소화하고 해결하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공연을 본 사람도 공연을 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절실함을 부여받고 공유된 삶의 원형을 마련할 수 있겠다.

〈연기자들의 진지함과 성실성〉

원작대본을 읽은 뒤 공연을 보았다는 어떤 이의 지적이 있었듯이 무대상의 재미있는 면을 너무 강조해 대사의 예리함이 무뎌지지는 않았는지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또 잡다한 부수적 인물들의 기능 및 상호관계 역시 정비․강화하여 좀더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다면 사건의 흐름이 뚜렷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무대진행에 있어서 독특한 운영은 원작의 속도감과 맞아떨어졌으며 오판돌역은 편안함을 보이는 연기를 해냈다. 검사 노릇을 하는 최곡도역의 홍석찬씨도 돋보이는 연기를 보여줬으나 이로 인해 오히려 상대역인 정의순과의 균형과 조화가 깨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연기자들의 진지함과 성실성에 힘입어 극진행이 이루어지는 동안 의식의 개안이 주는 감동과 무게감을 그 나름대로 유지하여 ‘재판놀이’가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다.
아무튼 ‘창작극회’는 이번 공연으로 30년 역사를 가진 이 지역의 대표적인 극단이면서도 전통을 고집하지 않고 재출범의 좌표를 마련했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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