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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2 | 칼럼·시평 [문화칼럼]
한국 비평가의 자세
김교선 문학평론가(2004-01-29 11:21:34)

알다시피 요즘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는 한국인들의 무분별한 외래 상품에 대한 선호의식을 비판 계몽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외국 상표만 붙어 있으면 가짜도 비싼 값으로 잘 팔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같은 기현상은 어떤 원인에서 발생된 것일까? 우선 그 가까운 원인은 한국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선진국의 상품에 비하여 질일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원인은 한국인의 의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사대주의적인 외국 숭배의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가령 한국 제품이 월등하게 나은 경우에도 외국상품을 좋아하는 일반인들의 심리상태를 생각하면 그렇게 밖에 해석할 수가 없지 않을까?
그런데 이같은 사대주의적인 정신은 무식한 일반 대중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지식층에서 더 심한 병폐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같은 어리석은 지식인들의 범람으로 오늘날 한국 문화는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기형적으로 이지러지게된 부면이 많다. 말하자면 한국 상품이 한국인 자신에 의하여 푸대접을 받는 것처럼 한국 문화도 한국인 스스로에 의하여 병들어 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무식한 대중들만 아니라 유식한 지식인들까지도 뿌리깊은 사대주의적인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인의 물질적 정신적 생활에 이처럼 침투되고 있는 사대주의적인 병증을 이글에서는 각 분야에 걸쳐서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명시하고 있듯이 이 글에서는 논의의 초점을 한국 문학 비평가의 자세에 두기로 하였다.
한국의 문학 비평가들은 그 비평 방법을 선진국의 비평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에서 빌려다 쓰고 있다. 그러면 선진국의 비평가들은 그 방법을 어디에서 빌려 왔는가? 그들은 빌려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창조한 작품의 특성에서 그 비평방법을 이끌어 낸 것이다.
가령 일례를 들면 20세기 초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유행하였던 뉴․크리티시즘 같은 것도 그 무렵에 영․미국에서 나타났던 전위적인 작품들의 긍정적인 해석을 위하여서는 요청될 수 밖에 없었던 비평방법이었다. 종래의 내용비평 같은 것으로는 엘리어트나 파운드의 시, 죠이스의 소설 같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 비평가들도 남의 방법을 빌려올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 문학의 특성에서 그 비평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실천에 옮기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비평의 방법을 이끌어 내야 할 한국문학 작품 자체가 아직도 서구 문학의 모방 형태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성격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 비평가들에게 현재로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고 싶지는 않다. 또 요구하였다고 하여 되는 일도 아니다. 따라서 한국 비평가들이 선진국에서 유행하는 비평 방법을 도입하는 것을 무조건 비나하려는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원용의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비평가의 주체적인 의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새로운 이론의 도입에만 급급한 경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같은 한국 비평가들의 자세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 외국에서 유행하는 이론이면 무조건 도입하려고 한다. 그것은 한국 문학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데에 도움이 될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결과가 아니다. 선진국에서 유행하는 이론이니까 말할 나위도 없이 탁월한 것이라는 선입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외국 제품이니까 틀림없이 좋다는 대중심리와 아무런 차이점도 없다.
둘째, 외국 이론 중에서도 새로우면 새로울수록 그것에 매력을 느끼고 그 방법을 도입하려고 한다. 여자들이 새로운 유행을 따르는 심리나 그 바탕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셋째, 남보다 앞서서 하루라도 더 빨리 새 이론을 소개하려고 고심한다. 새 이론을 남보다 앞서서 소개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보다 이론적으로 자기가 앞서고 있다는 자랑거리가 된다는 허영심 때문이다. 그 결과 그 이론에 대한 충분한 연구도 없이 새로운 작품 해석을 한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작품 평가를 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은 비평가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작품해석을 하나 소개하여 보겠다.
나는 근자에 어떤 분의 논문을 읽고 매우 놀랐다. 그것은 김동인의 「감자」에 대한 연구였는데 신화비평의 방법을 적용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해답은 감자에 대한 종래의 해석을 완전히 뒤엎은 새로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감자의 여주인공 「복녀」의 죽음에서 인간 현실의 추악하고 냉혹한 극한점을 본 것이 아니라 재생의 이미지를 본 것이었다.
도대체 감자를 읽고 재생의 이미지를 느끼는 독자가 현실적으로 있을까? 아마 이글을 쓴 이도 사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 같다. 다만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 내려는 성급한 욕구 때문에 신화 비평에서 말하는 죽음과 재상의 관계를 안이하게 잘못 적용하여 이처럼 허무맹랑한 해석을 하게 된 것 같다.
말할 것도 없이 비평가가 새로운 시각에 의하여 새로운 해석을 가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종래의 해석을 갱신하는 것은 비평가의 임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감자의 비평에서처럼 비평가의 자세가 안이하지 않고 성실하기만 한다면 어떤 비평의 방법을 도입하여 한국 문학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하더라도 나쁠 것은 없다. 비평에서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적절하게 적용하느냐 하는 데에 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가령 감자에 적용하려면 무리가 있었던 신화비평의 방법을 「심청전」에 원용하면 종래의 유교적인 윤리의식의 표현으로만 보았던 관점을 갱신하여 재생의 이미지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심청전에 대한 이같은 관점의 갱신은 이 작품의 의미를 더욱 심층적으로 느끼게 할 것이다.
위에서 보아온 것처럼 한국 문예 비평가들은 외국에서 빌려온 이론으로 한국 문학을 재단하는 단계에 있다. 그러므로 외국 문학의 새로운 이론의 도입은 한국 비평가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외국 문학 이론의 적용에 있어서 주체성이 결여된 사대주의적인 안이성을 청산하여야 한다. 특히 강단 비평가들에 대하여 이런 충고를 하고 싶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분들 중에는 작품에 대한 감상 능력이 없으면서도 빌려온 이론만으로 비평을 쓰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이런 충고가 필요 없는 성실한 자세의 비평가들도 많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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