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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4 | 연재 [문화저널]
【역사의 향기】전북지방의 독무덤
곽장근 전북대 박물관(2004-01-29 12:12:03)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후손들이 정성스럽게 마련해준 무덤에 묻혀서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런 무덤들 중에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도 약간 있으나, 언제 살았던 누구의 무덤인가라는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우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분류의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 중에서 한 가지는 인간은 죽음을 방치하지 않고, 당시의 풍습과 관례에 따라 정성스럽게 묻어주는 매장풍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매장풍습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다만 한 인간의 죽음을 보고 한 없이 슬퍼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매장풍습은 인간의 출현과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은 사람이 죽으면 목관에 넣어 양지바른 명당을 찾아 땅속에 묻어주는 장례의식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을 갖지 않고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장례의식은 우리의 풍습과 전통에 의해 정착된 것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매장풍습은 시대, 민족, 신분 혹은 지역에 따라서 변화를 거듭하여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정착되면서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며, 우리의 역사와 함께 매장풍습도 끊임없는 변천을 계속해 왔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매장풍습중에 흙으로 구워 만든 크고 작은 항아리나 독과 같은 토기를 관으로 이용하여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묻어 주었던 묘제가 있었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독무덤(甕棺墓)이라고 한다. 이러한 독무덤은 관으로 사용된 하나의 토기를 수직으로 세우는 것도 있으나 보통은 2개의 토기를 맞대어 옆으로 놓은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3개 혹은 하나의 토기를 사용한 것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독무덤의 존재를 보통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나 발굴조사를 통해 때때로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기회가 없는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과연 이런 묘제가 있었을까? 이런 묘제가 있었다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될 정도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요즈음에도 일부 섬지방이나 산간지방에서 어린아이가 죽으면 독에 넣어 묻어주는 일명 ‘아장살이’ 또는 ‘애기무덤’이라 부르는 무덤을 연상한다면 누구나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독무덤은 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묘제로서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 등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 이후 즉 기원전 5세기 경부터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도 일부 섬지방에서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독무덤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고분의 크기와 형식등 여러 가지 점에서 강한 지역성을 보이는 묘제로 평가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전북지방에서 조사된 여러 독무덤 중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독무덤과 그 유적을 소개하고, 아울러 전북지방의 독무덤에 대한 성격을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익산 석천리 독무덤
익산군 낭산면 석천리 석원대마을 뒤편에 있는 낮은 구릉의 동쪽 하단부에서 발견된 독무덤은 1989년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2기로 조사되어, 현재는 국립전주박물관 1층 전시실 중앙에 복원작업을 통해 원형대로 전시되어 있다.
이 독무덤의 축조방법은 직경 60cm , 깊이 70cm정도 크기의 풍화암반층을 파내어 구덩이를 만든 다음 바닥에 7cm 두께로 자질토를 깔고 바로 위에다가 넓적한 소형 판석을 올려 놓고 그 위에 관으로 사용된 독을 수직으로 세워 놓았다. 그리고 관으로 사용된 독 위에는 넓적하고 평평한 판석형 돌을 이용하여 입구를 막고서, 그 위에 다시 대형 판석 한 장을 올려놓아 이중으로 입구를 막고 있는 특이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관으로 사용된 독은, 바닥은 평평하고, 갸름한 몸통에 거의 곧게 올라간 짧은 목이 붙어 있으며, 바닥의 중앙에는 일부러 뚫어 놓은 한 개의 구멍이 있다.

남원 두락리 독무덤
이 독무덤은 1963년 남원군 아영면 두락리에서 발견 조사된 것으로, 그 지역 일대는 전북과 경남의 도계를 형성하는 험준한 능선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지류들이 완만하게 흘러내려 형성된 해발 약 500m정도 되는 고원지대이다.
발견 당시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되어 있던 것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현재 국립전주박물관 1층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이 독무덤은 달걀처럼 생긴 토기를 주관(주棺)으로, 그 보다 작으면서 둥근 공모양의 토기를 부관(副棺)으로 2개의 토기를 경사면과 거의 수평이 되도록 맞대어 놓았다. 관으로 사용된 2개의 토기 중에서 주관으로 사용된 토기가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이 곳에 묻힌 사람은 머리를 남쪽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2개의 토기를 맞대어 놓은 상태에서 전체 길이가 86cm정도로 소형이기 때문에 성장한 어른을 전체 크기대로 매장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추정된다.

고창 신월리 독무덤
고창군 고창읍 신월리 원신월 마을 뒷산에서 1974년 새마을사업 일환으로 실시된 농수로 확장 공사를 하던 중 그 마을 주민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이 지역은 고창읍에서 북서쪽으로 약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험준한 능선에서 서쪽으로뻗어내린 여러갈래의 지류들이 완만하게 흘러내려 형성된 해발 50m 내외의 구릉지대이다. 작업 중에 우연히 발견되어 독무덤이 놓인 정확한 본래 모습을 알 수 는 없다. 다만 당시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에 의하면 지표면에서 아래로 40cm 되는 지점에 관으로 사용된 커다란 두 개의 토기를 맞대어 놓고, 그 주변에 부장품으로 보이는 여러개의 토기가 가지런하게 놓인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관으로 사용된 토기는 달걀과 비슷한 몸통에 좁아드는 목이 달려 있고, 아가리 부분은 약간 밖으로 벌어진 형태로 2개 모둔 유사한 기형을 하고 있다. 이 두 개의 토기중에서 하나는 길이 89cm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길이 83.5cm로 2개의 토기를 맞대어 놓은 상태에서 전체 길이가 160cm 이상으로 성인을 펴서 묻는데 충분한 길이를 가진 독무던으로 추정된다.
이상으로 전북지방에서 조사된 독무덤 유적 중 국립 전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독무덤 유적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며, 이외에도 전북지역에서는 고창 송용리, 정읍 삼성림, 부안 당하리 등 여러지역에서 독무덤 유적이 조사되었다. 최근에는 도내 전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하여 독무덤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독널편이 각지에서 발견 보고 되고 있으며, 이러한 독무덤과 관련된 유적은 대체로 전북지방의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작년에 고창 아산면 남산리에 우연히 조사 보고된 독무덤은 농로를 개설하면서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있었으나 독널 하나의 크기가 1m 이상되는 대형으로 지금까지 전북지방에서 조사 보고된 것 중에서는 가장 대형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북지방에서 조사된 독무덤들은 정식 발굴조사가 아닌 파괴된 고분에 대한 수습조사 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와 관련된 문헌사료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 것에 대한 상세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전북지방과 인접하고 있으면서 독무덤 유적에 대한 많은 발굴조사에서 얻어짐 축적된 자료들 근거로 그 성격 규명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전남지방 및 주변지방과의 비교를 통해 성격을 파악하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독무덤은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점차 전국저긍로 퍼져나간 묘제로, 가장 시기가 오래된 것은 부여 송국리에서 조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송국리에서 조사된 독무덤은 하나의 항아리를 수직으로 세워서 매장한 형태로, 이와 유사한 계통의 독무덤이 익산 석천리에서 조사되었다. 이러한 유적의 존재를 통해 전북지방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독무덤 묘제가 전래되어, 그 당시 토착집단의 묘제로 사용되었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에 나타나는 독무덤은 두 개의 독널을 맞붙여셔 옆으로 뉘어 놓은 형태로 바뀌면서 점차 변화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 형식에 속하는 독무덤들은 시기적인 선후관계에 따라 독널의 전체 길이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유적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 지금까지 전북지방에서 조사된 것 중에 익산 석천리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독무덤들은 이 형식에 속한다.
그런데 두 개의 독널을 맞붙여 놓은 독무덤 중에서 비교적 시기가 오래된 것은 독널의 전체길이가 50cm내외 정도로 적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어떠한 매장방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 성인용보다는 오히려 병사한 어린아이를 묻기 위한 어린이용 무덤으로 보거나, 또는 살이 부패한 뒤에 뼈만 추려서 장사지내는 세골장, 즉 이차장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등이 있다.
이러한 방법 중에서 과연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단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세골장의 경우로 가정해 본다면, 얼마 전까지 일부 해안지방이나 섬지방에서 계속되고 있었던 초분의 매장방법과 유사한 성격을 보이는 점에서 어떤 관련이 있지나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흥미를 가져볼 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토기의 제작기술이 발달하고 그와 함께 독무덤은 독널의 규모가 현저하게 대형화되면서 지역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묘제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3~4세기에 이르러 다른지방에서 조사된 독무덤 중에 전혀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대형 독무덤이 전남 지방에 밀집하여 분포되어 있어 그 지역의 두드러진 지역성을 보인다.
전남지방의 독무덤은 일제 강점기에 일인학자들을 주관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처음으로 그 존재가 확인되었고, 그 후 활발한 발굴조사를 통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지역적 독자성을 띠는 묘제로 알려져 있다.
전남지방에서 조사된 독무덤의 지역적 특징은 대체로 두 가지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죽은 사람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하여 특별히 제작된 대형독널을 하나의 봉분 내에 여러개 매장한 형태의 대형 독무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대형 독무덤은 나주와 영암지방을 중심으로 영산강 유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는데, 대체로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형독무덤에 속하는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어, 그 고분의 피장자를 강력한 토착세력 집단의 지배층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금동관 유물이 출토되는 사실에 근거하여 대형 독무덤이 조성된 시기, 즉 백제초기에 영산강 유역 일대에는 백제와 전혀 다른 토착문화를 토대로 발전한 독자적인 정치집단이 존재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영산강유역에 산재되어 있는 대형 독무덤을 축조한 집단은 백제와 별개의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마한과 관련이 있는 집단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이같은 집단은 문헌에 기록된 마한 54개국 중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목지국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견해도 있다.
최근에 전북지방에서는 전남과 인접된 고창지역에서 대형 독무덤과 비슷한 크기의 독무덤이 조사된 예가 있으나, 아직까지 이들 유적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를 실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확한 성격 규명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조사된 독무덤들이 전남지방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소형 독널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다만 고창지방을 중심으로 한 곳에서 대형독무덤의 존재가 일부 확인될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북지방의 독무덤 묘제를 사용한 토착세력 집단은 대형독무덤으로 발전되기 이전 단계에 이미 백제에 복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전남과 인접된 고창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북지방은 전남지방보다 이른 시기에 백제에 복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전남지방에서 조사된 대형독무덤의 봉분 형태는 원형, 타원형 등으로 다양하며, 특히 앞쪽은 사각형이고, 뒤쪽은 원형의 형태를 보이는 전방후원분이 이 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지역에서 조사된 이 독무덤들 중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분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 점에서 한․일간의 고대사 연구에 있어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동북지방을 제외한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를 최고 통치자인 천황이나 그 주변계층에 속하는 집단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영산강지역에 분포된 전방후원분을 근거로 4세기경에 우리나라의 남부지방을 정복 지배하였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주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앞으로 이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더욱더 확실한 사실이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성과만으로도 근거 없는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독무덤 묘제가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분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전북지방의 독무덤은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삼국시태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 지역에 정착한 토착세력 집단에 의해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전북지방은 우리나라서 청동기세대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돌이 단일 지역 내에 가장 밀집 분포된 지역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시기에 등장한 독무덤 유적은 지금까지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를 통해 극히 일부만 발견조사되었다. 이처럼 양 고분이 수적인 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은 문화발전 단계에서 의문이며, 또 이 지역 독무덤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점이 제기도리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현상은 고고학적으로 발굴 조사된 유적이 많지 않기 때문에 파생된 결과로 보인다. 앞으로 땅속에 묻혀 있는 독무덤 유적을 찾는 조사뿐 아니라 그 유적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고 그를 통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전북지방의 독무덤에 대한 실체와 그를 통한 마한시대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설득력있는 추론이 가능할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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