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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4 | 칼럼·시평 [문화칼럼]
사월 혁명의 사회경제적 배경
오진구․전북대 사회대학원 사회학(2004-01-29 12:16:35)

우리는 간혹 과거의 일에 집착하거나 또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을 그 속에서 찾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특히 현실 속에 부유(浮遊)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나, 암담한 현실이 자신을 속박해 올 때는 더욱더 지난날의 기억들을 되살려 그 의의를 재평가하면서 오늘의 자기 행동지침을 설정한다.
올해로 31년째를 맞이하는 4․19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뇌이는 까닭은 아마도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중차대한 민족, 민주과제의 미해결이라는 시대적 산물의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학생들의 폭발적인 항거의 시발로 이승만 독재정권의 백색전제의 아성을 무너뜨린 4월 혁명이 당시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피폐 그리고 정치적 부패의 반영이라 할 때, 오늘의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그리고 빈민중적인 정치적 행각은 지금 우리가 4월 혁명을 교훈삼고자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현 사회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한 사회가 지향해 갈 올바른 사회상의 정립은 역사적 연속선상에서 총체적인 상황평가가 전제되어야만 할 것이다. 즉, 객관적인 상황이 어떻게 사회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구조와 맞물려 주관적인 상황들이 어떻게 노정되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적 틀의 마련이 중요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4․ 19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올바르게 실시되고 그 의의가 오늘의 우리 삶에 계승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1960년대를 전후한 세계사적 배경은 어떠했고, 한국의 대내외적 상황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인식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즉, 세계대전 이후 세계열강의 새로운 제국주의적 질서 재편성기로 제국들간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구식민지국들에서 민족해방투쟁의 성공으로 자본주의 진영이 점차 위기국면으로 치닫으면서 체제모순이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은 식민통치가 종결된 이후로 주체적인 해방정국을 이끌지 못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 제국과 소련에 의하여 남북분단의 비극을 맞이하면서 결국 비극적인 남북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또한 전후 변사 상태에 빠진 남한사회는 지속되어온 관료의 부패성과 민주적 기반과 민족자본의 기초 소멸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미국의 지배의 일환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한 정치적 지배와 대외원조경제를 통한 경제적 지배가 완숙되면서 남한은 신식민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총체적 상황고려가 평가되었을 때만이 우리가 한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올바르게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4․19와 같은 일대 변혁적 사건이 역사의 합법칙적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음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4․19가 불가피한 역사운동법칙임을 부연설명하기 위해서 4․19 당시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마지막으로 4월 혁명이 미완으로 그쳐버린 요인들을 검토하면서 4월 정신의 비판적 계승을 오늘의 의미에서 규명하고자 한다.

2.
자본주의에서 공황은 불가피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전반의 구조를 뒤흔드는 마술의 역사성인가. 19세기이래 공황은 사회적 재생산과정 자체의 내부로부터 발생하여 일정한 주기성을 가지고 규칙적으로 발생한다. 20세기 이후 역사상 과잉생산공황은 1907년 필두로 대략 10년을 주기로 발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황은 자본의 집중 가능성을 조성하여 독점자본으로 전환하게 했다. 더불어 공황은 노동자계급의 빈곤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까지 가중시킴으로써 생산관계가 생산발전에 질곡을 초래하여 그 결과 계급대립을 격화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 위와 같이 장황하게 공황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공황의 주기성과 상응하는 세계체제 변화와 한국의 정치, 경제적 흐름들을 연관 분석하고자 함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2차대전 이후 1957년 공황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이에 따른 4․19읠 불가피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2차대전 이전의 식민지는 주기적인 공황의 시점과 더불어 제국주의에 의한 가혹한 초과착취를 당하게 되었고 한국에서도 일제에 의한 폭력적 수탈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착취와 수탈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 심화는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에 따른 자구책으로 새로운 시장 확보를 통해 위기를 해소하고자 하는 식민지 재조정작업(2차 세계대전)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조정 작업의 결과는 오히려 식민지국에서 민족해방투쟁을 완수할 수 있는 계기를 주면서 사회주의체제의 강화를 수반했고, 전쟁에서 패배한 제국주의 국가는 전후복구라는 더 가중된 정치․경제적 문제를 간직하게 되었다. 반면 전승국으로서 미국은 막대한 자본 시장확보로 2차대전 이후에 자본주의의 맹주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전후에 사회주의체제의 영향력 차단과 항구적인 세계경제지배, 그리고 식민지의 계속적인 지배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은 세계사적 질서 재편성, 즉 열강의 세계구조의 재편성을 위한 직접적 대상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국은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구식민지에 대해서 예전의 직접적 지배방식을 탈피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대응전략 요충지로서 그 실효성이 있는 한국의 경우, 일정 부분 경제적 원조, 군사적 지원 등을 통해서 자본형성의 기초를 제공하는 간접적 지배방식을 관철시킨다. 이는 결국 한국경제가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 아래 종속적인 길을 밟아가는 경제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경제는 선진자본주의국가의 경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50년대의 대외원조경제체제가 위기를 맞고 즉, 57년 세계공황으로 원조체계의 파탄, 그에 따른 국내 경제의 위기와 정치적 부패가 낳은 4․19의 필연적 귀결임을 주시해야 한다.
해방 후 한국경제의 전개과정은 우리 민족경제상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고 자본주의를 전개하는 과정이었으나 일제의 식민지적 반봉건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대미의존적 파행구조적 경제를 심화시켜 결국 외국경제를 위해서 시장을 창출해 내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하여 한국기업은 외국자본을 위해서 봉사하는 매판기업성을 심화하고 농업등 국내산업을 제약하는 데 기여하고 말았다.
한편 외국 원조물자와 자금의 배분에 있어서 정부권력이 크게 개입하면서 각종 특권과 특혜를 부과하여 자본축적의 계기를 주나 당시 산업은 삼백산업을 중심으로 한 소비재 산업이 줄를 형성하며 농업과 같은 국내 원료재산업부문을 파괴,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1960년 4월 19일 학생주도의 민중봉기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중첩되면서 57년을 고비로 한 미국원조의 감소와 경제성장율의 둔화 및 인플레이션의 심화들이 민중들의 저항의식을 극도로 고조시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경제적 파탄과 더불어 정치적 부패가 낳은 4․19는 52년 ‘부산정치파동’ 사건, 54년 9월 이승만의 종신집권수립을 위한 ‘사사오입’사건, 58년 1월 ‘진보당’ 사건, 58년 8월 국가보안법 개정등 등의 꼬리를 물고 계속된 폭압적이고 반민족, 반민주적인 정치적 테러, 그리고 60년 3월 15일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를 자행하면서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을 연출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러한 4․19는 결국 사회계층간의 불평등과 갈등의 심화로 인해 소외된 대중이 더 이상 그 사회질서 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속박의 굴레를 벗어버리고자 했던 민중들의 분노의 발현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4․19는 한국 사회 경제의 질곡과 모순을 심층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지도 못하고 정치․경제적 실현운동이라는 한계성을 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이 조직성과 자기 운동 방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부패, 무능한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정치, 경제, 사회의 각분야에 걸친 전반적인 개혁을 실현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4월 혁명 이후 또 다른 독재자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꼴이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 있지만, 한 사회의 역사는 잘못된 오늘의 현실을 바로 잡고 새로운 사회질서의 구축이라는 과제의 해결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인식은 현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됐으며, 그 역사성은 무엇이고, 그리고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에 대한 원리규명이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사회발전의 원리규명은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역사가 오늘의 현실에 어떤 측면으로 귀착될 수 있는가라는 즉,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파악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변혁운동의 과제를 수행해 나갈 때 4․19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4․19는 첫째, 정치지도계층의 미분화문제. 둘째, 강대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 셋째, 혁명선도세력의 한계. 즉, 혁명의 열정을 구체적인 정치적 결실로 유도하는데 있어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이상적이었고 비조직적이고 비체계적이었다는 점. 넷째, 민족통일을 위한 뚜렷한 이데올로기 설정에 실패했다는 점 등을 한계로 지닌다 할 때, 현재의 변혁운동이 안고 있는 사상적 혼란과 그 조직의 분열상황 등은 우리가 시급히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명확한 민족 민주 이념을 정립해야 하며 복잡하게 얽힌 문제의 극복을 위해 한층 치열한 조직적 역량의 유기적 성장에 노력해야 함을 4․19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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