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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 | 연재 [문화와사람]
엄마가 공장에 일하러 가면-일터교회 「아가들의 집」원장 이혜숙씨-
조명원․편집위원(2004-01-29 13:32:39)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하 셋방에서 불이나 방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권씨는 경기도 부천의 직장으로, 어머니 이씨는 합정동으로 파출부 일을 나가 있었으며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깥 현관문도 잠가둔 상태였다. (중략) 어머니 이씨는 경찰에서 “평소 파출부로 나가면서 부엌에는 부엌칼과 연탄불이 있어 위험스럽고,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거나 유괴라도 당할 것 같아 방문을 채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평소 이씨는 아이들의 먹을 점심상과 요강을 준비해 놓고 나가 일해 왔다고 말했다. 정태춘, ‘우리들의 죽음’ 작년 봄에 일어났던 끔찍이도 슬픈 사건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일년새에 꼬릴 물고 발생한 비슷한 사건들로 하여 이제 우연히 벌어진 일회성 참사가 아님을 강변하고 있다. 핵가족화된 가정구조 내에서 일을 가진 여성들이 부닥쳐야 하는 가장 절박한 걱정거리가 ‘아이 돌보기’다 그중에서도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임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도시빈민들의 탁아문제는 이미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가 되어 있다. 전주시 팔복동 공단지역의 맞벌이 부부를 대상으로 「일터 아기들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혜숙씨는 그런 의식의 소유자다. 신학교를 나와 교회 전도사로 일하다가, 결혼 후 YWCA 간사일을 보던 중 “평소에 지니고 있던 여성운동에의 꿈과 진보적인 여성의 삶을 실천해 보고자, 현장을 가는 기분으로” 뛰어들었다는 그는 이 일을 ‘평생 할 일’로 생각하고 있다. 89년 3월에 시작할 당시 일터교회에서 운영하던 탁아소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목사님(남편을 지칭함이다) 혼자서 해내기에는 너무 힘든일이었다”는 애정어린 평가와 함께 비로소 남편의 일 (그는 ‘교회일’이라 표현했지만)에 간여(?)하게 된 것이다. 우선 활용할 수 있는 공간(교회에 딸린 방)이 있었기에 당장에는 아이들 장난감과 매월 운영비만 있으면 족했지만, 자모들에게 받는 최소한의 보육비(월 2만5천원)로는 턱없이 모자라 탁아에 관심을 가진 이웃들을 중심으로 후원회를 조직했다. 들쭉날쭉이지만 20여명의 후원회원들이 성의껏 보내주는 후원금의 의미는 훨씬 크고 든든한 것이었다,. “뒤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만 2세에서 5세가지 열두명의 아이들을 두 분 선생님이 돌보고 있는데, 아침 여덟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만 그보다 길어질 때도 많다. 필자가 때아니게 퍼붓는 봄비속에 아가들의 집을 찾았을 때, 그날 처음 온 네 살박이 사내아이가 엄마 생각으로 칭얼대며 줄곧 선생님 등에 업혀 있었다. 대부분 공단의 생산직 노동자인 부모들은 단칸 월세방에서 아이의 보육비조차 버거운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다(물가상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3만 5천원으로, 또 다시 5만원으로 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기혼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잔업많고, 월급 적고, 수당없고, 노조는 애초에 불가능한’ 하청업체 뿐이다. 잔업, 야근 때는 아이를 아빠가 돌보거나 그도 어려울 땐 어쩔 수 없이 공장에 데리고 가야 한다. 자연 ‘남편도 싫어하고 고되기만 힌 일’을 포기하는 사람, 떠나는 사람이 속출한다. 또 적은 월급으로 보육비를 감당할수 없어 아이를 그냥 집에 두고 일나가는 엄마들도 적지 않다. 점심시간 외출이 허락되면 겨우 밥이나 챙겨주고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이혜숙씨가 가슴 아파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을 다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깍아주고, 외상으로’ 맡아주기도 해봤지만 그런 아이들일수록 오래 버티지 못하고 어느날 발걸음을 끊기 일쑤였다. 그럴때마다 ‘누굴 일방적으로 돕는다’는 관계에 한계를 느낀다고. 자식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감도 문제지만, 탁아소에 못오는 아이들 때문에 갈등을 겪어야 하는 그는 높은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민자당에 의해 날치기 통과된 탁아법이란 걸 보면 이건 탁아소의 양성, 지원과는 동떨어진 탁아소 규제법이다. 그저 행정편의적 발상으로 법안을 기초한 사람들의 의식에는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투철한 신념만 있을 뿐 ‘여성의 일’에 대한 인식은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혜숙씨한 사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핵가족구조속에서 더욱 팽배해가는 개인주의, 이기주의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공동체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탁아문제가 고작 ‘전국1200개 탁아소에 8만명 수용계획’을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질 수는 없다는 얘기다. 법대로 하자면 그나마 어렵게 유지하고 있는 달동네 탁아소들은 교사자격, 공간확보, 시설완비 등의 규제조항에 걸려 문을 닫아야 한다. “월 소득 4만 8천운 미만의 생활보호 대상자나 5만 6천원 미만의 의료보호 대상자에게 탁아비를 지원한다는 구상은 말도 안되는 얘기예요. 차라리 한 가구 소득 50만원 미만이라면 훨씬 현실적으로 들리죠.” 이런 의견이 단지 개인적인 생각에 그치지 않는 합리적이고 타당성있는 방아니 될 수 있겠다는 느낌은 그가 지역탁아소협의회란 보다 큰 울타리 안에서 조직적으로 사고하고 실천해 왔음을 알게 되면서 더욱 확실해 졌다. 지역적 필요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빈민탁아, 노동탁아 등 전국의 100여개 지역탁아소들이 연계해 만든 지탁연에 전북지역탁아소협의회가 이름을 올린 건 작년의 일이다. 거기에서 2대 회장직을 맡고 있는 연합자모회, 연합소풍 등의 행사를 통해 탁아문제를 일반 대중에게 알리는 작업과 교사의 교육사업에 특히 신경을 썼다. 의식있고 나이 어린 ‘기특한’교사들이 찾아왔다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취감을 맛볼수 없어 쉽게 포기하고 돌아서는 걸 안타까워 하는 마음에서였다. 스스로 ‘탁아운동가’로 불리우는 걸 몹시 어색해 하는 그는 “이 일은 몸으로 부딪치는 일이며, 무엇보다 지식인의 껍질을 벗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만큼 어렵다”고 말한다. 실제로 일하다 보면 자모들과의 거리감을 느낄 때가 의외로 많다. “그들은 우리의 근본 취지를 이해하기보다는 ‘값 싼 탁아소’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벽에 맞닥뜨릴 때마다 “설익은 의식만 가지고 나댄건 아닌가” 반성하곤 한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성서에 나타난 가부장적 문화에 반감을 나타낼 정도로 진보적 여성관을 지닌 그에게 ‘자신의 경우’로 슬쩍 시선을 옮겨 보았다. “성장과정에서 크게 성차별을 당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구조적 피해자임에는 틀림없겠죠. 여자는 결혼 생활 그 자체가 억압이예요. 아이가 생기면 더 심각하고,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직장을 조퇴, 결근하는 일은 당연히 아내의 몫이죠. 남편이 돌보는 건 여가선용이고…” 객관적으로 볼 때 ‘많이 도와주는 남편’인데도 살아보니까 ‘아니다’싶을 때가 많더라는 것. 하지만 여성문제가 결코 ‘남편과 싸우는 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와 억압적 권력구조를 대상으로 남편과 동반자적 관계를 맺어 함께 풀어나가야지요” 이렇듯 열린 인간관은 그대로 탁아지침으로 이어진다. 교사들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는 그가 당부하는 두 가지 금기사항이 있다. 하나, 성차별 용어를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분단의식을 심지 말 것. 울긋불긋, 오밀조밀 방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과 공작품들, 키작은 실내용 미끄럼틀과 장난감들, 원탁을 이룬 낮은 식탁겸 책상들, 앙증맞게 얹힌 흙묻은 신발들, 쌔근쌔근 잠든 귀여운 얼굴들…다시 한번 돌아보고 문을 나선 등 뒤에서 푸른 새싹들이 씩씩하게 자라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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