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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6 | [정철성의 책꽂이]
고은의 시집 「내일의 노래」 (창작과 비평사, 1992)
정철성․전북대 강사, 영문학 (2004-01-29 13:49:06)
고은 시인이 또 시집을 냈다. "또"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도대체 그의 생산량에는 매번 감탄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만인보」 아홉권과 「백두산」 네권을 상재한지가 언제인데 칠십 여편의 시를 모아 두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두 대작을 출판하는 사이사이에도 그는 「눈물을 위하여」등의 시집을 펴냈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글들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흘리고 다닌다고나 할 수 있는 그의 시들을 따라 읽기란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고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들 게으른 독자를 위하여 전집을 간행하기로 한 것은 정말 다행스런 결정이었다. 지천으로 흘러나오는 모양새를 우리는 거미줄 나오듯 한다고 말한다. 거미가 줄을 뽑아도 고은시인의 양에 비하면 피리똥 만큼이나 될까? 게다가 그가 뽑아내는 것은 명주실이다. 그의 시집은 한권 한권이 비단이다. 이제 우리는 돈도 없이 눈요기하러 시장에 나온 사람처럼 그 비단위에 그려진 꽃그림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아보기로 하자. 이번 시집의 제목은 『내일의 노래』이다. 제목만 보아도 앞날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게 쉽게 얻은 희망은 아니다. 시인은 "아무리 눈부신 육체와 독재가 하나일지라도 / 그것이 오늘이라면 / 이미 저 건너 바람 속으로 / 한 어린아이처럼 / 어떤 환영 인사도 없이 혼자 빗발쳐 오리라 / 내일!"(「내일」)이라고 노래한다. 고은 시 인은 우리가 손을 접고 하늘만 바라보는 무능에 빠졌을 때 "옛이야기 아기장수 "(「백도라지꽃」)를 보여준다. 우리들의 사소한 실수로 뜻을 펴지 못했던,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달린 전설의 아기장수가 다시 태어날까? 시인은 그렇다고 믿고 있고, 그 점이 그가 우리와 다른 점일 것이다. 이런 결연한 의지와 분명한 확신은 요즈음의 젊은 시인보다 더 젊은 발언이다. "길이 없다! /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 그리하여 / 길을 만들며간다"(「길」)는 선언을 보라. 이만하면 무엇이 두려우랴! 문제는, 문제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자꾸 부서져 내려 발바닥 두개 간신히 얹어 놓은 천길 낭떠러지 꼭대기에서 용맹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는 것이 쉬운 일인가? 아주 쉬운 예를 시인은 「서산 할머니」에서 보여준다. 할머니께서는 손자놈이 업고 마실갔다가 돌아와 며느리한테 아야, 니 새끼 받아라, 나 이제 갈란다아, 하고 방으로 들어가 누워 그대로 열반에 드셨다. 보살 말고는 여자 부처님을 본 적이 없는 데다가 한복입은 부처님도 보지 못한 우리들은 ‘서산할머니불’의 32상을 떠올리는데 상당히 고심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그분이 내려놓고 훌쩍 저승으로 건너간 노동의 등짐은 힘꼴깨나 쓰는 장정도 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서산 할머니는 죽어 부처가 되었다. 이제 누가 그 자리를 메꿀 수 있을까? 절망이 크면 희망도 그에 비례하여 큰 것이 사실이다. 이때 우리는 희망의 실현 가능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내일의 노래』에서 희망은 종종 선문답같은 어투로 제시된다. 문득 깨달아 감탄을 터뜨리면서 한편씩 읽어가는 재미는 다른 시집에서는 맛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직관의 즐거움은 흔히 습관에서 자리를 내주고 만다. 물론 이는 우리들 독자의 몫이지만,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처음의 감동을 그대로 간직할 뿐 아니라 두배 세배 배가시킬 수는 없는가? 『내일의 노래』를 읽는 재미는 발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시집의 발문은, 소설을 쓰는 송기숙 선생이 덧붙인 것인데, 참 재미있다. 송 선생은 평소 자신의 포(?)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거니와 그 수준이 함포에 비기지는 못해도 야포에 대하기는 아깝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효봉 선사의 ‘딸깍’소리 일화는 이 시집의 분위기를 익히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술이야기는 술꾼들의 무용담이 흔히 그렇듯이 과장이 섞여 있지만 고은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보게 한다. 아무튼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이래 대하기 힘들었던 수준급의 술이야기이다. 시를 읽으면 이상하게 두려움과 혐오감이 앞서 평생 시집을 펼쳐 본 적이 없는 분에게도 우선 이 발문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내일의 노래』는 창비시선 101번으로 나왔다. 백권이 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고은 시인의 시집을 내기로 약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마지막 한편을 제외한 칠십편이 어디에도 발표한 적이 없는 신작이라 한다. 그러니 『내일의 노래』는 고은 시인이 지금 어디까지 갔는가를 알려주는 이정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권하는 책 슬기를 오늘의 삶속에 되살리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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