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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6 | [문화저널]
연애 편지 좀 씁시다
이종민․주간, 전북대 교수, 영문학 (2004-01-29 13:49:37)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구요? 그래요. 갖가지 사건들이 옳고 그름의 가름 없이 프로야구나 경마 중계하는 것처럼 보도되고 있는 이때, 별 한가로운 제안을 다 한다고 여기시겠지요? 이 나라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내년 봄쯤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와 피래미 의원들에게 망신을 당할까봐 '구국의 결단'을 공모했던 동지(?)를 울며 겨자먹기로 도와주고 있는 풍신을 보며, '피플스 파워'에 의해 괴물스런 독재자를 몰아냈던 여장부가 자기를 낳아준 모태를 부인하고 이전 독재자의 전철을 되짚어 재현하면서 각종 해괴스러운 일들을 벌리 고 있다는 남녘 나라의 웃기지도 않는 해외토픽을 접하며, 또 80년 광주를 연상시키는 아열대 민중들의 처절한 항쟁 소식에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기껏 생각해낸 것이 고작 이것이라니 잠자던 소도 웃을 일이지요. 임명권자의 인사권을 강화하기 위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조차 무시한채 별스런 제도들을 다 고안해내고 있는 대학당국의 전횡에 한마디 항의도 하지 못하면서, 학생들의 판단력을 오히려 마비시키는 각종 이론들이 거창한 이름을 앞세우며 위세를 떨치고 있는 마당에 어떤 대응의 논리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문학이론의 이름으로 문학을 소외시키고 언어학의 이름으로 언어를 '낯설게 만드는' 등 우리 학문의 고고한(?) 풍토에 주눅들어 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이에 빌붙어 어정쩡하게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연구실에 주저앉아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사라지는 아카시아 향을 안타까와하며, 한다는 소리가 고작 '연애편지 좀 씁시다'라니! 약속한 사람이 조금만 늦어도 무슨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닌가 염려를 해야하고 밤늦게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끔찍한 사고가 떠올라 깜짝깜짝 놀라야 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각종 성폭력, 성범죄에 딸 낳기를 두려워해야 하는 말세적 상황에서, 이에 편승하여 갖가지 사이 비 말세론들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판국에 '연애 편지 좀 씁시다'는 아무래도 좀 지 나친 일이지요. 그러나 조급한 결론이랑 조금 유보해 둡시다요. 옛말에 급할 때일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던 가요? 서둘러서 제대로 된 일이 하나나 있던가요? 성급한 경제 개발 정책이 그렇고, 조급한 근대화가 그렇고, 무분별한 산업화나 수출정책이 결국 농촌 피폐화와 환경오염 등 더욱 심각한 문제만을 야기시키지 않았냐 말입니다. 이런 미증유의 말세적 증후들이 성급한 대증요법으로 해결될 일은 결코 아니지요. 오히려 이를 더 악화시키겠지요. 이런 성급한 대응에 가장 격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 어쩌면 미국에서 수입되어 요즘 우리 문화예술계를 뒤흔들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인가 뭣인가 하는 것, 혹은 학문적 영역에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해체주의'니 '탈구조주의'니 하는 것들일 겝니다. 그러나 이들의 대응 또한, 물론 이들은 조금도 인정을 하지 않겠지만, 성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도 없는 복잡한 개념과 논리로 되어 있는 이 것들을 이렇게 단순하게 진단을 하면 무식하다고 혼나겠지요. 무식하면 용감해서 단선적이지죠. 그러나 또 유식하면 너무 둘러대지요. 모든 잘못이 중심을 세우려는 데서 비롯 되었으니 그 중심을 해체하거나 더 나아가 그 중심 세우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 니겠냐는 이들의 전략은 사실은 해결책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포기한 것이라봐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게 헛되도다 '라며 도사님들 처럼 손털고 일어나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 아니냔 말이지요. 결국 백주 대낮에 자행되는 온갖 비행 비리들을, '탈중심'이니 뭐니 어려운 말을 써가면서, 그냥 인정해주고, 뿐만 아니라 이를 정당화 할 수 있는 빌미 혹은 그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서구에서 그동안 심각한 고민과 토론을 통하여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들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겝니다. 중심을 잘못 세웠으면 바르게 세워야 하고 잘못된 중심을 세웠으면 올바른 중심을 찾아야죠. 물론 이들은 이것을 소박한 19세기적 '계몽주의' 혹은 '이성만능주의'의 소산이라고 면박을 할 겝 니다. 아니라고 거세게 대들면, '세상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가' '언어의 재현 능력을 믿는가' 등 너무도 어려운 질문으로 챙피를 주거나,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라거나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 라고 점잖게 훈계를 하지요. 그래도 '그러니까 6.29가 진실이라는 말이요?''3당 합당이 잘 한 일이오?' 혹은 '이런 거짓과 이를 공박하는 비판의 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단 말이오?'라고 앙알거리면, '그래 당신 말도 일리가 있어. 사실 모든 진술은 스스로의 규칙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게임에 지나지 않아. 각각의 게임은 자신의 그 규칙에만 충실하면 돼. 이 모두를 포괄하고 또 이의 옳고 그름이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총체적 체제나 초월적 근거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야. 중요한 것은 이러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거야'하며 실재적인 폭력에 시달려 이에 항의하는 사람을 폭력배로 몰아 자기들만 도통한 것처럼 흥분한 사람을 무안케 하지요. 그래요. 흥분한 사람은 항상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연애 편지 좀 쓰자'는 얘기이지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연애 편지를 쓴다는 말이 말도 안되는 얘기지요. 연애 편지를 쓸 때 보통 사람은 가장 고양된 감정에 싸이게 되니까요.(그래서 밤에 쓴 편지는 새벽에 되읽는 게 아니예요. 그러면 못 보내요. 보낼려면 쓰고 바로 봉하세요.) 이 말은 연애 편지를 쓸 때처럼 보다 순수하고 원초적인 마음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뜻이지요. 신동엽 시인이 바라던 '향아'의 흙가슴으로 돌아가자는 얘기지요. 복잡한 문제에 부딪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에는 잠시 머리를 식혀 애초의 원칙을 되돌아보는 것이 바람직 할 수 있다는 게지요. 전화로 신속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고 글을 쓴다 해도 컴퓨터나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할 수 있을 때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을 든다는 것은 그 자체가 벌써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일이 지요.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다니! 어디 3당 합당 같은 불순한 생각이 끼어들 수 있겠어요? 어디 성폭력같은 망령된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티없이 맑은 푸른 하늘을 본' 사람처럼 경건한 마음이 되겠지요. 차마 삼가는 마음이 되겠지요.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가요? 사랑의 한자말은 어질 인(仁)이지요. 인은 생명의 원동력, 그래서 식물 생명의 원천인 씨의 속을 인(仁)이라 하지요. 이것이 공자님의 말씀하신 덕의 기초이며 우리 도덕률의 핵심적 요소지요. 이러한 생명의 정신이 발현되는 질서를 쫓아 인간의 행위 규범으로 정한것이 예(禮)요, 반생명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적인 것을 지키는 것이 의(義)이며, 이 생명적인 것과 비생명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예지가 지(智),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켜야 네가지 기본적 덕이지요. 생명이 발현되는 모습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요, 스스로 생명의 편이 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반생명정신을 미워함이 수오지심(羞惡之心)이며, 생명의 질서가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비켜설 줄 아는 마음이 사양지심(辭讓之心)이요, 생명과 반생명의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마음이 시비지심(是非之心),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씨 곧 사단(四端)이지요. 그래 모든 덕의 근원은 사랑에 있다 하는게 아닙니까? 하여 연애 편지를 쓰는 마음이란 바로 생명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요 생명을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연애 편지 좀 씁시다'하는 얘기는,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복잡한 얘기일랑 걷어치우고,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로 지키려는 사랑의 마음, 그 근본원리를 상기하고 그 상태로 돌아가 마음을 정리하고 새출발을 해도 해보자는 말의 다른 표현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사랑했던, 그 생명정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업수단을 포기하기까지 했던, 우리 시인은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를 이렇게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시인의 말대로 스무살 안팎 사랑을 할 수 있을 때, 연애 편지를 쓸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렇지 않았지요. "사랑을 위해서라면 / 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며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줄" 알고, "집안에 도둑이 들며 물리쳐 싸우"며 비록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것을 올바른 사랑의 삶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뜨거운 연애편지"를 쓰던 시절에는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 한 발자국씩 찾으로 떠나는 거라고" 믿으며 온몸을 다바쳐 사랑을 살았던 것이지요. 그 순수한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미소에 천국을 느끼고 그의 찡그린 얼굴에 지옥을 느끼는 그 순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구정물 같은 세상에 절망하고 그러한 세상을 제대로 비워내지도 못하는 자신에 실망하다가도 "우연히 당신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새벽녘 음울한 대지를 박차고 솟아올라 하늘 문밖에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종달새와 같다"라던 사랑하는 이들의 그 천진스런 마음을, 항상은 아닐지라도, 잠깐씩은 되찾아야 합니다. 이 순진스러운 연애의 감정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라서 하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사랑에 모든 것을 걸던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는 없지요. 시간을 거스르는 것 또한 생명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허나 생명의 참정신은 신비롭게도 죽음의 순간에 생명을 잉태합니다. 절망의 순간에 희망의 불씨를 키우는 것이지요. 사실은 신비로울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자연의, 우주의 원리이니까요. 겨울은 종말이 아니라 회생의 봄을 위한 축적과 휴식의 계절입니다. "겨울이 왔는데 어찌 봄이 멀리 있다할 수 있으리요?"라던 한 시 인의 노래는 결코 단순한 수사학이 아닙니다. 물론 곤궁한 가운데 생명의 불씨를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러한 고궁(固窮)의 정신을 군자의 덕이라 칭송을 했던 것 아닌가요 ?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사랑의 정신입니다. 흩날리는 향그러운 아카시아 꽃잎에 애타는 마음이 생명을 아끼는 참사랑의 마음이지요. 그런 마음을 실어 편지를 쓰십시오. 가을만이 편지를 쓰는 계절이 아닙니다. 세상이 금방 망할 것 같은 오늘날 연애의 감정을 되살리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을 파멸의 구렁텅이로부터 지켜주는 살림의 시작입니다. 전화질만 하지말고 편지를 씁시다 ! 연애질만 하지말고 연애편지 좀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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