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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6 | [문화저널]
금 연
김상용 (2004-01-29 13:50:04)
그때는 어설프게 지어진 일본식집과 길쪽으로 창문을 낸 오래된 기와집들이 천변로를 따라 줄지어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먼지 낀 골몰길이 비밀처럼 숨어 있었다. 처마 밑으로 난 그늘을 밟고 골목길을 한참 돌고 나면 오랫동안 '신작로'라고 불려지던 팔달로가 나왔고, 엄마손을 잡고 명절옷을 사기 위해 신이나 빠른 걸음질을 하던 중앙시장도 그 즈음에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내게는 그 골목길이 보물을 향해 꼬여 있는 숨은 길 찾기 놀이처럼 긴장과 익살을 품고 있는 화려한 꿈길이었다. 그 골목길의 어느 모퉁이에 그만그만한 집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의 하나에는 보나네와 광주 아주머니네, 그리고 우리 여섯 식구가 울웃음을 같이 하던 집이 있었다. 보나네는 가톨릭을 믿었기 때문에 모두들 영세명을 그대로 불렀었고, 광주 아주머니는 나를 오지게 귀여워해 주어서 한번은 함께 살겠다고 장난감 바구니를 들고 그 단칸방으로 가서 밤을 지낸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입이 크다고 하여 '매기'라고 하거나 얼굴이 둥글다고 하여 '넓 죽이'라고 불렀다. 나는 아직 화장실에 가는 걸 무서워했으므로 마당에다가 신문지를 깔고 똥을 누었고 작은 형은 냄새가 난다고 투덜거리며. 나의 엉덩이를 씻어주곤 하였다. 담 너머에는 미란이네와 학철이네가 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과 함께 이도령․춘향이의 옷을 입고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그 골목길을 지나서, 이어진 또 다른 골목길로 이사를 하였고, 나는 학철이나 보나보다 일찍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슴에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고 길고 긴 아침 조회를 운동장에서 치뤄야 했고, 오후 내내 누나나형이 불려 주는 받아쓰기 숙제에 진땀을 흘리곤 하였지만, '미꾸사꾸'를 짊어지고 소풍도 가고 운동회 때 달리기를 잘하여 '상(賞)'이라고 도장이 찍힌 공책을 받기도 하는 즐거운 날도 있었다.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10월 유신이라는 말이 나돌고 길가에는 이해할 수 없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라디오를 듣고 계시는 때가 잦았다. 아침상을 물리며 '나는 찬성이야'하며 일어서시던 투표일 아침의 아버지의 음성은 꽤 단호하였던 걸로 기억된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아버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더 이상 대학교로 출근하지 않으셨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내게 화를 자주 내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가끔씩 담배를 피우셨다. 나는 입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이 신기하여 아버지를 멀뚱멀뚱 쳐다보곤 하였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자, 한번 피워봐'하면서 내 입에 담배를 물리곤 하셨다. 그날에도 나는 담배를 한번 빨아 보겠다는 속셈으로 아버지 곁에 앉았다. 정말 아버지는 내게 몇 번이나 담배를 내미셨고, 나는 기침을 하면서도 연신 담배를 빨아 대었다. 그걸 보던 아버지의 친구분들은 큰 소리로 웃으셨다. 이날 아버지의 술자리에서 학교가 어쩌니, 간첩 사진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오고 갔던 것 같지만, 나는 머리가 핑하기도 하고 친구들한테 담배 피운 걸 자랑하고도 싶어서 골목길로 뛰어 나갔다. 며칠 전, 황박사라는 분한테서 아버지를 찾는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든 아버지는 갑자기 '아니, XXX박사가 출소했단 말야'하고 소리치셨다. 그 말만으로 나의 기억사슬은 어지럽도록 담배를 피울 수 있었던 그 날까지 이어졌다. 아버지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고, 나의 방정맞은 상상은 음울한 현실로 판명되었다. XXX박사. 그가 나의 삶에 개입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천변로가 포장이 되고 골목길이 한길로 변하는 동안, '앞으로 나란히'를 죽도록 싫어했던 내가 장성하여 대학을 졸업하는 동안, 한 인간을 잔혹하게 짓밟았을 시간의 군홧발을 마음 속으로 재어보며 몸을 떨었다. 스스로에게, 한인간을 파멸로 이끌었던 바로 그 사건과 사람과 제도와 권력 아래에서 튼튼하게 성장한 나를 고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때 총장의 물망에 오르내렸다고 하는 그 앞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었다. 이제 나의 건강은 의심되어야만 한다. '과연 현대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자연상태가 극복된 계약사회인가'하는, 곰팡내 나는 질문을 씹고 있는 이십세기 말의 내 입안에 쓰디쓴 물이 괸다. 담배를 문다. 그러나, 이제는 자랑거리가 못된다. 그걸 알고 있다. (전주시 덕진구 진북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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